예천 용문사
예천 용문사
용문사는 소백산 줄기에서 흘러나오며
이룬 아름다운 용문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용문산은
“신라시대의 고승 두운(杜雲)이 당나라에 다녀온
뒤 이곳에 암자를 짓고 지내고 있었으니
신라 후기인 경문왕 10년(870년)의 일이었다.
이 때는 신라의 세력이 약해지고 궁예의 태봉,
견훤의 후백제가 일어나서 후삼국이 겨루고 있었다.
궁예의 휘하에 있던 왕건은 후백제를 정벌하러 가던 길에 두운의 이름을 듣고
이곳에 들렀는데 길목의 바위 위에 용이 앉아 있다가 왕건을 반겼다 한다.
그래서 용문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왕건은 935년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고,
바로 이듬해인 936년 옛일을 생각하고
절을 크게 창건해 주었으며 용문사는
고려왕조 내내 왕실의 후원으로 번성을 누렸다
윤장대(輪藏臺) 보물 제684호
용문사 대장전 안에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내부에 불경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서 극락정토를 기원하는 의례를 행할 때 쓰던 도구이다. 마루 밑에 회전축의 기초를 놓고 윤장대를 올려놓았으며, 지붕 끝을 건물 천장에 연결하였다. 불단(佛壇)을 중심으로 좌우에 1기씩 놓여있는데 화려한 팔각정자 형태이다. 아래 부분은 팽이모양으로 뾰족하게 깎아 잘 돌아갈 수 있도록 하였고, 난간을 두른 받침을 올린 후 8각의 집 모양을 얹었다 8각의 집 모양에는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각 면마다 8개의 문을 달았다. 문은 좌우로 구분되어 4개의 문에는 꽃무늬 창살이 다른 4개의 문에는 빗살무늬 창살이 정교하게 꾸며져 있다. 문을 열면 8면에 서가처럼 단이 만들어져 경전을 꺼내볼 수 있도록 하였다. 보존이 잘 되어있고 8각형 모양의 특이한 구조수법이 돋보이는 국내 유일의 자료로, 경전의 보관처인 동시에 신앙의 대상이 되는 귀한 불교 공예품이다. 대장전을 창건할 당시 함께 제작된 것인지 조선 현종 11년(1670) 대장전을 새 단장 하면서 만들어진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목불좌상 및 목각탱(木佛坐像 및 木刻탱) 보물 제 989호
숙종 10년(1684)에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목각후불탱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 기본구조는 상하가 긴 사각형이지만 좌우로 구름무늬 광선을 표현한 둥근 모양의 조각을 덧붙여 장엄하게 장식하고 있다. 중앙에 모셔진 본존불은 넓적한 얼굴, 날카로운 눈, 작은 입 등에서 다소 수준이 떨어지는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두 손은 모두 무릎 위에 올렸는데 왼손은 손가락을 위로, 오른손은 아래로 하고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어 아미타불의 손모양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두꺼운 편이며, 간략한 몇 개의 선으로 신체와 옷을 구분하여 주름이 없다면 신체의 근육으로 여길 정도다. 본존불 이외의 상(像)들은 상·중·하 3행으로 배치시키고 있다. 아랫줄에는 사천왕상이 본존의 대좌(臺座) 좌우로 2구씩 일렬로 서 있다. 가운데줄과 윗줄에는 각기 좌우 2보살씩 8대 보살이 배치되고, 윗줄의 보살 좌우에는 다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은 모습의 2대 제자를 배치하여 구도의 미를 살리고 있다. 보살은 본존불과 동일한 기법을 보여주며, 불과 보살상 사이의 공간에는 구름, 광선 등을 배치했다. 목각탱의 앞면에는 삼존목불좌상이 놓여져 있는데 본존상의 경우 머리에는 반달 모양이 표현되었고, 신체는 둥글며 옷은 두꺼워 신체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다. 목각탱과 같은 기법으로 동일한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임에는 확실하지만, 목각탱의 상에 비해 가슴표현이 유기적이며 조각기법에서 조각가의 정성을 엿볼 수 있다. 하단에 표현된 조성기(造成記)에 의하여 숙종대의 작품이 분명하며, 17세기 후반 조각양식을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므로 역사적 의의가 매우 높다. 이외에 용문사에 잡역을 면제해준다는 교지(보물 제729호)와 석가모니의 일생을 잉태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묘사한 그림인 팔상탱화(보물 제1330호), 입상의 삼존불상을 배경으로 본존불상 머리 좌우에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배치시켜 5존도 형식을 취하고 있는 영산회괘불탱(보물 제1445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