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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초간정

꼴통 도요새 2017. 2. 5. 20:07

예천 초간정


예천의 용문산 골짜기를 굽이쳐 흐르는 금곡천 개울가 바위 위에는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기암괴석이 날아갈 듯 암반 위에 올라앉은 정자와 소나무 숲과 계곡이 어울려 우리나라 전통원림의 아름다움을 잘 묘사하고 있다. 바로 예천 초간정(草澗亭) 원림이다.

초간정

계류가 바위를 감돌아 흘러가는 모서리에 우뚝 자리하고 있는 초간정은 마치 계류에 한쪽 팔을 늘이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계자난간 바로 아래로는 수직의 석벽이 있어 이곳에 기대면 계류가 한눈에 보인다.


초간정은 풍류나 안식을 위해 지은 정자가 아니다. 조선시대 정자는 보통 관직에서 은퇴한 사류가 노후의 안식을 위해 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권세와 탐욕이 만연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한적한 곳에서 은일하고자 하는 은둔자에 의해 지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안식이나 은일과는 전혀 다른 학문과 집필을 위한 공간으로 쓰인 정자가 있다. 오롯이 묵향으로 가득 찬 정자가 바로 초간정이다. ‘초간’이라는 뜻은 당나라 시인 위응물이 읊은 시 〈저주서간(滁州西澗)〉의 “홀로 물가에 자라는 우거진 풀 사랑하노니(獨憐幽草澗邊生)”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초간 권문해(權文海, 1534~1591)는 관향이 예천이다. 총명한 자질을 타고난 그는 유년 시절에 아버지 권지로부터 가학을 전수받았다. 초간의 행장을 보면 어린 시절부터 글을 읽을 때 다른 사람들보다 총명함이 넘쳤다고 한다. 일례로 역사서를 읽으면 눈에 한 번 스친 것은 모두 기억하는 능력을 지녀 인물의 성정, 문장, 내용의 높고 낮음에 대해 일별로 모두 헤아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아우 문연(文淵)과 함께 용문사에서 공부할 때는 침식을 잊을 정도로 혹독하게 매진하여 늘 밤을 밝힐 등잔 기름이 모자랐다고 한다. 가학에 통달한 권문해는 1546년 한서암(寒棲庵)으로 가서 퇴계 이황에게 수학한다. 총명한 두뇌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 그는 향시에 장원으로 합격했으며, 명종 15년(1560) 별시문과에 병과로 대과 급제한다.

권문해는 명종조부터 선조에 걸쳐 벼슬길에 나갔다. 우부승지, 좌부승지, 관찰사, 목사 등의 중앙관료와 지방수령을 역임했다. 그는 공주목사직을 사임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노년을 보내기 위해 초당을 짓는다. 이 정자가 바로 초간정이다. 1582년 그가 49세 되던 해 완성한 초간정은 그의 종가에서 약 2km 떨어진 풍광이 아름다운 금곡천 계류가에 조성되었다.

노구의 권문해는 초간정에서 집필에 몰두하여 56세 되던 1589년,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평가되는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완성한다. 초간은 일찍이 조선의 선비들이 중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역사는 잘 모르고 있어 이를 한탄했었다. 이는 눈앞에 있는 자신의 물건도 보지 못하면서 천리 밖의 남의 것만 주시하려는 것과 같다고 말하며, 우리나라 역사와 사적을 담은 백과사전을 만들 뜻을 일찍이 품은 것이다.

《대동운부군옥》은 20권 20책으로 은나라 음사부의 《운부군옥》을 본떠 단군에서 조선의 선조까지의 사실을 지리, 역사, 문학, 철학, 인물, 예술, 풍속 등 다방면에 걸쳐 총망라한 방대한 저작이다. 초간은 이외에도 초간정 원림에서 《초간일기》, 《초간집》, 《선조일록》, 《신묘일기》 등 많은 저서를 남긴다. 《대동운부군옥》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쓰인 것으로 선조 이전 우리 조상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며, 이 책의 판각이 보물 제878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동운부군옥》

현존하는 유일한 초간본이다. 책명에서 ‘대동’이라는 말은 ‘동방대국(東方大國)’, ‘운부군옥’은 운별로 배열한 사전이라는 뜻이다.


초간정의 형태는 매우 특이하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자로서 진입하는 마당 방향에 2칸이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나머지 4칸은 대청마루로 온돌방을 두르고 있다. 이 마루는 밖에서 보면 마치 누마루와 같은 느낌을 준다. 마루의 가장자리에는 계자난간을 두르고 있으며, 누마루에서 밖을 바라보면 암반을 굽이쳐 흐르는 계류가 바로 아래로 내려다보인다. 이곳에서는 계류에 바로 낚싯대를 드리울 수 있다. 정자의 북쪽 편액에는 석조헌(夕釣軒)이라 쓰여 있는데 ‘저녁 무렵 낚시하는 마루’를 의미하는 것으로, 종일 집필에 몰두하고 난 후 석양에 낚싯대를 계자난간에 걸쳐놓은 초간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별서란 제2, 제3의 주거, 즉 별장을 의미하는 고어로 근래에 다시 쓰이기 시작했다. 본가를 소유하고 있어야 별도의 주거인 별장을 가질 수 있듯이 별서의 성립 조건은 본가를 전제로 한다. 오늘날 별장은 본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짓는다 해도 차량과 같은 빠른 이동수단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별서를 본가에서 가까운 곳에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초간정 원림은 다른 별서와 달리 도보로 왕래하기에는 다소 거리가 있는 곳에 위치한다. 본가를 왕래하며 식사를 하기에는 거리가 멀어 초간정 옆에는 별채가 별도로 지어져 있다.

초간정의 정문 방향에는 초간정사(草澗精舍)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정사란 학문에 정진하는 집을 뜻하는 말로 초간정의 본래 이름이 초간정사였다. 정자를 지은 후 대사간을 지낸 박승임(朴承任, 1517~1586)이 정자의 이름을 ‘초간정사’라 지어 직접 글을 써서 보냈는데 지금 정자 전면에 걸려 있는 현판이 바로 그것이다. 초간정과 별채 사이에는 담으로 가로막아 엄격하게 공간을 구분하고 있는데, 이것은 학문을 위한 공간인 초간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초간정 원림은 맑은 계곡과 푸른 소나무의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두른 대표적인 정자원림이다. 건너편 송림 사이에서 바라보면 바위 위에 자리한 정자 이외에는 소나무 숲, 계곡과 계류, 암반과 암벽 등 모두가 자연으로만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정자조차 자연의 일부분인 듯한 느낌을 갖게 만든다.



기암 위에 절묘하게 지어진 초간정은 정자가 조망 대상으로서 아주 빼어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초간정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4년(1612)에 재건되었으며,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다시 불탄 것을 고종 7년(1870)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두 차례의 전란을 겪으면서 정자가 불탔을 때 초간정사의 현판이 정자 앞 늪에 파묻혀 있다는 말이 전해졌는데, 늪에 오색무지개가 영롱하여 종손이 그곳을 파보았더니 현판이 나왔다고 한다.

학문과 집필의 공간이었던 초간정 원림은 묵향으로 가득 찬 곳이어서인지 초간이 56세 되던 해에 얻은 아들 권별(權鼈, 1589~1671) 또한 이곳에서 집필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신라 이후 조선시대까지 1,000여 명에 달하는 인물을 대상으로 한 우리나라 최초의 인물사전인 《해동잡록(海東雜錄)》을 저술한다. 초간정 원림은 가히 묵향이 묻어나는 학문의 공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