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양민학살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
[居昌良民虐殺事件]
탐방일자: 2017년 2월 18일(토)
요약
6·25전쟁 중 빨치산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했지만 빨치산의 유격전술 때문에 만족할 만한 토벌성과를 올리지 못하던 중 9연대장 오익균의 지시로 한동석은 1951년 2월 신원면 주민 570명을 빨치산 또는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다이너마이트로 대부분을 죽이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총살했다. 학살당한 570명 중 327명이 젖먹이를 포함한 아이들었고, 나머지는 노약자거나 부녀자였다.
이 학살사건 후 사병이 엄상섭 의원에게 사건의 내막과 사진, 학살당한 사람의 명단을 보내어 국회차원의 조사가 시작되었고 신중목의 집요한 추적으로 국회에 공개되었다. 범죄자들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무기징역 등을 선고받았으나 이승만은 김종원을 특사로 풀어 경찰간부로 채용했고, 오익균· 한동석을 형집행정지로 석방했다.
설명
6·25전쟁중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38°선 이남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1951년 초반,
국군은 전방의 조선인민군과 중공군뿐만 아니라 후방의 빨치산으로부터도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이에 국군은 전선을 단일화 하기 위해 빨치산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했다.
빨치산 토벌을 위해 거창에 배치된 군부대는 11사단 9연대 3대대였다.
그러나 빨치산의 유격전술 때문에 만족할 만한 토벌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9연대장 오익균(吳益均)의 지시를 받은 3대대장 한동석(韓東錫) 소령은
1951년 2월 10, 11일 양일간에 신원면 소재 부락주민 570명을 빨치산 또는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다이너마이트를 폭파시켜 대부분을 죽이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총살했다.
학살당한 570명 중 젖먹이부터 16세까지의 아이들이 327명이었고, 나머지는 노약자거나 부녀자였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학살당한 사람들은 빨치산이 아니었다.
이 학살사건이 발생한 지 며칠 후 한 사병이 엄상섭(嚴祥燮) 의원에게 사건의 내막과 학살당시의 사진, 그리고 학살당한 사람의 명단을 보내옴으로써 국회차원의 조사가 시작되었다. 국회조사단의 현지조사는 경남지구 계엄사령관 김종원(金宗元) 대령의 집요한 방해를 받아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거창출신 국회의원 신중목(愼重穆)의 집요한 추적 끝에 사건의 진상이 국회에 공개되었다. 국회의 결의로 이들 범죄자들은 1951년 12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오익균·한동석은 무기징역을, 김종원은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얼마 되지 않아 김종원을 특사로 풀어주어 경찰간부로 채용했고, 오익균·한동석을 형집행정지로 석방했다.(출처: 다음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