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화령장 전적지
상주 화령장 전적지
내용
화령장지구 전적지 상주에서 한국전쟁과 관련된 유적은 화령장지구 전적비와 전쟁에서 순직한 군경과 관련된 유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화령장 지구는 공원화되어 국방유적으로 조성하였고, 군경과 관련된 유적은 개인이 비를 세워 공적을 기리고 있다.
화령장지구 전적비 화령장지구 전적비는 북한군 제15사단이 화령장을 통하여 대구를 점령하려는 적의 기도를 좌절시키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상주시 화서면 신봉리 산1-3, 산 2-8번지 일대 약 11,800㎡를 도시공원으로 결정하고, 경역면적 약 7,196㎡, 비 높이 8m로 1980년 11월 8일 조성하였다. 비신에는 군관민 합동으로 북한군을 섬멸시킨 내용을 상지하는 동상 조각이 새겨져 당시의 전투 상황을 상기시켜 주고 있고, 비의 전면 좌측에는 백전불굴(百戰不屈)의 전투상인 높이 4m의 칼과 국민총화단결상(國民總和團結象)인 높이 2.4m의 방패를 조각하여 세워두고 있다. 이 전승 기념비는 국방부의 협조를 얻어 교통부와 국제관광공사가 주차장, 휴게소, 전기조명시설 등을 설치하였다. *비문 소백산맥을 가로 지르는 삼국시대의 고전장, 이곳 화령장 요새지에서 붉은 침략의 무리를 쳐부수고자 봉황산 언저리의 동관리와 상달리를 지켰던 국군 제1사단과 제17연대 그리고 제1군단 정찰대의 장병들은 벽력같은 기습공격으로 북과 15사단의 주력을 여지없이 섬멸하였으니 그 눈부신 전공을 청사에 길이 남겨 자손만대에 전하고자 이 전적비를 세운다. *전사약사문 전쟁이 발발한지 2주째로 접어드는 1950년 7월 중순에 북괴 제2군단은 조기에 소백산맥을 넘어 아직도 대전과 청주지방에 분전중인 국군 및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하여 일대 섬멸전을 전개할 기도 하에 그들의 선봉인 제15사단을 속리산 동쪽의 깊은 계곡으로 투입하여 상주~김천 축선으로 돌파구를 확대코자 중앙돌파를 획책하였다. 이때에 제1군단에서는 이 지역의 적정이 불명하여 군단 정찰대로 하여금 화북~화서면 간의 공백지대를 탐색케 하였던 바, 14일 12시에 동비령에 다다른 동 정찰대가 북괴의 첨병소대를 발견하자 이를 기습하여 12명의 포로를 사로잡은 끝에 이 같은 적정을 확인하여 곧 군단에 보고하였다. 이에 육군본부에서는 보은에서 함창으로 이동중인 제17연대를 이곳 화령장에서 정지시켜 동정찰대와 함께 이 적을 현지에서 저지 격멸토록 명령하니 이로부터 매복 작전을 전개한 연대는 6일 동안에 걸쳐서 상곡리와 중달리 그리고 동관리 등을 오르내리며 유리한 지세를 이용한 기습공격으로 그들 제48연대의 주력을 격멸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25일에 현지에 도착한 제1사단이 그 임무를 인수하여 25일까지 지연전을 피므로서 군은 다시 전선전마다 시간 여유를 얻어 제1군단은 안동지구로 이동하고 제2군단은 함창-상주 전선을 막았으며, 또한 미 제24사단을 비롯한 미 제25사단과 미 제1기갑사단도 상주-김천 정면에 병력을 전진하는 등 낙동강 방어선의 형성에 크게 기여 하였던 것이다」라고 동판으로 한글과 영문으로 병서 조각하였다.
무공수훈자 공적비 무공수훈자 공적비는 화서면 신봉리 산2-8번지에 위치한다. 상주 출신 무공보훈 훈장 수여자 174명의 전공을 기리기 위하여 2001년 10월 30일 설립하였다. 무공 및 보국수훈자를 추가 명각하여 2008년 현재는 243명이다. 부지면적 52.8㎡ 탑 높이는 6m이다. 매년 10월 30일 100여명이 기념식 행사를 한다. 정부는 이 전투의 전승을 기념하고 호국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전승기념공원 조성에 나섰고, 육군본부는 참전 유공자회 등과 함께 화령장전투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일 계획이다. 상주 화령장전투는 6·25전쟁 중 한국군에 의한 최초의 승전지로, 지난 1980년 상주시 화서면에 화령장지구 전적지를 조성했다. 지난해 장비전시장에 탱크와 장갑차를 전시하는 등 전시장과 조형물을 보수하고, 산중턱에 있는 전적비까지 방부목 계단을 설치하고 곳곳에 조망테크도 만들었다. 전적지에는 화령장전투의 요도 및 홍보판을 제작, 설치하는 등 말끔히 정비했다. 정부는 올해부터 2014년까지 5년 동안 100억원을 들여 화서면 일원에 ‘화령장전투 전승 기념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국가보훈처 보훈선양사업으로 화서면 송계분교에 전승기념관을 건축해 안보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문화체육관광부 강변문화관광개발사업으로 산악지구 테마공원을 만들어 전투현장을 재현하고 서바이벌, 산악트레킹 코스도 개발할 방침이다.
화령장 전투 개요
배 경
국토가 38선으로 분단되면서 본의 아니게 대한민국의 역외 영토가 된 지역이 있었는데 바로 옹진반도였다. 전쟁 직전 이곳을 담당하던 부대가 독립 제17연대였는데 무려 10배의 전력을 가진 북한군의 공격으로 개전 이틀 만에 이곳을 완전히 포기하고 해상으로 후퇴하였다. 사실 6·25전쟁 초기에 모든 아군 부대가 후퇴를 하였지만 개전 당일 당시 신성모(申性模) 국방부장관의 후퇴 지시가 내려왔을 만큼 이곳을 사수할만한 전략적 가치는 사실 없었다. 비록 마지막 철수선에서 장병들은 비통의 눈물을 흘리며 옹진반도를 바라보았지만 당시의 상황으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전력을 보존한 채 해상 철수에 성공한 제17연대는 새롭게 창설된 국군 제1군단에 배속되어 청주지역에서 적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그러던 7월 중순, 중부 전선에서 부산을 향하여 남진하고 있던 북한군은 험준한 소백산맥을 돌파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특히 북한군은 개전 이래 그들에게 계속하여 치욕을 안겨준 국군 제6사단이 방어하고 있던 충주-문경-상주 축선을 돌파기 위해 2개 사단을 집중하였다. 비록 제6사단이 선방하고 있었지만 병력증원이 절실히 요구된 중부전선의 위기였다. 다급한 상황을 직감한 육군본부는 제17연대를 제2군단으로 배속전환하고, 상주 북방의 함창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제17연대는 제1대대를 선발대로 하여 7월 17일 04시에 대대별로 출발을 개시하였다. 청주를 출발한 제1대대는 보은을 거쳐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선 부근인 상주의 화령장을 통과하는 도중 시골 노인으로부터 어젯밤 북한군이 이곳을 지나 상주 쪽으로 갔다는 첩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1차교전 - 상오리 전투
화령장은 속리산과 주흘산으로 연결되는 소백산맥 지대를 말하는데 800m 고지와 깊은 계곡으로 협로였다. 또한 보은~상주 간의 25번 도로와 괴산~상주 간의 977번 도로의 접합점에 있기 때문에 소백산맥 방어에서 중요한 전략적 교통의 요충지였다.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불법 기습남침한 북한 인민군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후 7월 중순에 총력을 기울여 소백산맥 일대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전력이 부족하였던 국군은 이곳에 방어선을 구축하지 못하였고 이점을 간파한 북한 인민군은 국군의 대비가 없는 공백지대인 977번 도로에 예하 15사단을 투입해 조기에 상주를 점령하고 국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기 이전에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직행하려고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국군 제2군단 예비였던 제17연대 제1대대장 이관수 소령은 정찰대를 파견하여 때마침 그 곳을 지나가던 북한군 전령 1명을 생포하여 북한군 1개 대대가 어제 밤 이곳을 통과해 상주로 진출했으며, 본대인 제48연대가 후속할 예정임을 알게 되었다. 대대장은 북한군 사이에 끼여 상주 쪽으로 행군할 것이 아니라, 상곡리에 매복하여 북한군 제48연대 본대를 기습할 것을 결심하고, 7월 17일 15시경까지 전투준비를 완료한 후 북한군의 접근을 기다렸다. 이윽고 16시경, 제1대대가 매복중인 상곡리에 북한군의 행군대열이 나타났는데 그들은 선발대대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던 관계로 경계를 풀고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바로 그때 제1대대의 모든 화기는 일제히 불을 뿜었고 1시간의 공격 끝에 북한군 제48연대는 붕궤되어 버렸다. 이 전투로 제1대대는 250명의 적을 사살하고 30명의 포로를 잡았으며 1,200여정의 소총 등 수많은 군수품을 노획하는 대승을 거두었는데 전사는 이를 ‘상곡리 기습전’이라 명명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직 제17연대의 선전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2차 교전 - 동관리 전투
다음날 제17연대 제2대대가 제1대대를 후속하여 화령장에 도착하였는데 마침 북한군 제15사단의 제49연대가 제48연대를 후속할 예정이라는 귀중한 첩보를 입수하였다. 제17연대장 백인엽(白仁燁) 대령은 제49연대마저 격멸하기로 결심하고, 제1대대를 현 위치인 상곡리에, 제2대대를 상곡리 북서쪽 동관리에 매복시켰다. 그리고 3일 후 도로를 따라 밀집종대로 행군하며 내려온 북한군 제49연대는 제2대대의 포위망 안에 완벽하게 갇히게 되었고 기습에 순식간 무너져 버렸다. 이 작전으로 적 356명 사살, 26명을 포로로 잡고 박격포 16문 등 다수의 전투장비를 노획하는 큰 전과를 연이어 올렸다. 바로 59년 전의 일이다. 이 공로로 제17연대장(김희준 중령)과 전 장병이 1계급 특진하는 영예를 안았던 반면에 적 15사단의 상주 공격 시도는 무참히 좌절되고 말았다. 결국 화령장 전투는 가장 완벽한 매복 기습작전을 전개해 최소한의 희생으로 적의 주력을 섬멸한 공세적 방어전투의 모범적 전례가 되었고 ‘무적불패 제17연대’ 신화의 출발점이 됐다. 이 전투가 바로 동관리 기습전이다.
화령장 전투의 교훈
당시 17연대에 파견되어 있던 미 고문관은 “30년 군대생활 중에서 이처럼 통쾌한 전투는 처음 보았다”고 감탄한 바 있다.내년이면 6·25 60주년을 맞는다. 전 국민의 80% 이상인 전후세대들 가운데 대부분은 6·25전쟁을 누가, 언제 일으켰는지도 잘 모르고 있으며 6·25전쟁을 단순히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잊혀진 전쟁’으로 간과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이 행사를 주관한 6·25 참전유공자회에 경의를 표하면서 오늘의 이 행사가 우리나라를 이끌고 나갈 젊은 세대들에게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지키기 위해 한 목숨 초개와 같이 버렸던 선배전우들의 위국헌신의 애국심을 피부로 느끼게 하고 아직도 변하지 않고 있는 북한의 한반도 적화야욕을 새삼 상기시키는 데 큰 전기가 될 것을 기대해 마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