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팽로[柳彭老]
유팽로[柳彭老]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는 자(字)가 군수(君壽)이고, 옥과현(玉果縣)에 살았는데,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나, 그 뒤로 벼슬에 뜻이 없었다. 이에 사람들이 그에게 벼슬하기를 권유하면 공(公)이 말하기를, “나도 벼슬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힘을 써서 파리 떼가 몰려드는 것과 같이 할 수는 없다. 개처럼 구걸하는 것은 진실로 나의 본심(本心)이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그가 권세와 이익에 초연한 것이 이와 같았지만, 그때 사람들은 그가 현명(賢明)한 줄을 알지 못하였다.
초야(草野)에 은거한 지가 10여 년이 되었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에 공이 여러 고을의 많은 선비와 더불어 담양부(潭陽府)에 모여서 고경명(高敬命)공을 추천하여 (의병(義兵)의) 맹주(盟主)로 삼았다. 공이 이로 인하여 그의 막하(幕下)에 종사(從事)하였다. 금산(錦山)으로 가게 되자, 공이 여러 장사(將士)들에게 이르기를, “금산의 적(賊)은 그 무리가 수 만 명이므로, 우리의 오합지졸(烏合之卒)로서는 결코 저항하여 감당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나의 뜻은 여러 군사들과 더불어 함께 힘을 합하여 험한 요새에 나누어 의지하여, 적이 교만하고 나태한 때를 기다렸다가 정예병(精銳兵)을 보내어 사방에서 힘을 합쳐 그들을 공격한다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한쪽 눈이 애꾸눈이고 용모가 드날리지 못하니, 막하(幕下)의 여러 장사(將士)들이 모두 그를 깔보고 그의 계책을 쓰지 않고 마침내 군대를 진격시켰다. 군대가 모두 괴멸되던 날, 공과 고경명공은 처신하는 뜻이 서로 달랐다. 고경명공은 이미 탈출하여 여러 장사들과 더불어 동시에 도주하여 돌아왔는데, 공은 고경명공이 아직도 탈출하지 못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말을 타고 되돌아 들어갔다. 종이 말을 잡고 울면서 만류하였으나, 공은 듣지 않고 칼로 종을 쳤으므로, 종이 부득이 말의 재갈을 풀고 뒤를 쫓아서 따라갔다. 그리하여 공은 말을 달려 나아가서, 수재(秀才) 안영(安瑛)과 함께 힘을 합하여 고경명공을 구하다가 마침내 적에게 살해당하였다.
사건이 임금에게 보고되니, 공에게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을 증직(贈職)하고 정문(旌門)하였다.[출처: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