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및 전설

녹두장군 전봉준 생가

꼴통 도요새 2018. 4. 9. 15:26

녹두장군 전봉준 생가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梨坪面) 장내리(長內里) 조소(鳥巢)마을에 있는 조선시대의 집.


사적 제293호. 1878년(고종 15)에 세워진 초가 3칸의 돌담집으로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전봉준의 옛집이다. 남향으로 동쪽부터 부엌·큰방·윗방·끝방 순서로 되어 있다. 부엌은 앞뒤로 두 짝의 널문을 달았고, 큰방과 윗방은 장지문을 통하며 연등천장[椽背天障]이다. 끝방은 곳간으로 사용되었으며, 끝방 앞쪽은 담을 둘러 땔감을 두었다. 두 방 앞은 툇마루를 놓았고, 대문 동쪽에 화장실이 있다. 집둘레의 돌담은 돌 사이에 회를 넣어 굳히고 짚으로 이엉을 엮어 덮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전래 민요를 들어본 적이 있나요? 이 전래 민요는 조선말에 동학 농민 운동을 주도했던 녹두 장군 전봉준에 관한 것입니다. 전봉준은 어려서부터 몸집이 작아서 녹두라고 불리었다고 합니다. 전래 민요 속 녹두꽃은 전봉준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파랑새는 일본군, 청포 장수는 조선의 백성들을 상징합니다. 녹두꽃이 떨어진 것처럼 전봉준과 동학 농민 운동이 일본군에 의해 실패하자 많은 조선의 백성들이 눈물을 흘렸다는 뜻입니다.

19세기 후반 조선은 나라 안팎으로 큰 혼란을 겪고 있던 시기입니다. 나라 밖에서는 서양 열강들과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으로는 조선 왕조의 통치력 상실로 인해 백성들에 대한 지방의 수령들과 양반들의 수탈 과 횡포 가 극심했습니다. 기존의 정치와 종교 등 사회가 너무 부패하여 백성들에게 안정한 삶을 주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최제우 가 조선 왕조를 부정하고 백성을 위해 만든 동학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조선 왕조는 동학의 인내천 사상이 신분제를 부정하고 백성을 현혹하는 종교라며 배척합니다. 그리고 혹세무민 의 죄를 들어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를 처형합니다. 하지만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동학은 더욱 퍼졌었습니다.

전봉준도 조선의 몰락 양반으로 반봉건 · 반외세 를 주장하는 동학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 지방관의 수탈이 가장 극심했던 전라도 지방의 동학 지도자가 됩니다. 전봉준은 지방관의 수탈로 고통을 겪는 백성들을 보고 참다못해 대항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동학군을 이끌고 백성을 위해 그리고 조선을 위해 두 번 봉기 합니다. 지금부터 백성의 지도자이자 동학의 지도자였던 녹두 장군 전봉준의 이야기를 알아봅시다.

 

백성을 위하여 1차 봉기

전라도는 예로부터 농사가 잘 되는 곡창 지대였기 때문에 백성들에 대한 수탈이 심했던 곳입니다. 특히 전봉준이 살았던 고부군은 군수 조병갑의 수탈과 횡포가 심했습니다. 필요하지도 않은 저수지를 짓겠다고 백성들에게 돈을 걷었고 백성의 돈으로 만든 저수지에는 사용료를 부과했습니다. 군수 조병갑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는 비석을 세우겠다고 백성들에게 엄청난 기부금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견디다 못한 고부군 백성들은 전봉준의 아버지인 전창혁를 중심으로 탄원서 를 제출했지만 정부의 외면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전창혁은 매를 맞고 죽기에 이릅니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를 보다 못한 전봉준은 사발통문 을 돌려 농민을 모읍니다. 그리고 고부 관아로 쳐들어가 조병갑을 추방합니다. 정부에서는 고부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 이용태를 파견합니다.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온 이용태는 고부 민란을 백성들을 수탈하는 데 이용합니다. 이에 분노한 백성들은 전봉준을 중심으로 다시 봉기합니다. 이번에는 김개남, 손화중 등과 같은 다른 지역의 동학 지도자들도 함께 모입니다. 백산에 모인 농민들과 동학도들은 정부와 탐관오리 를 몰아내기 위해 반봉건을 내세우고 봉기합니다.

백산에서 봉기한 동학군은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군을 물리치고 봉기한 지 3달 만에 전주성을 점령합니다. 그러나 전봉군과 동학군은 청과 일본의 개입을 막기 위해 더 이상의 진군을 멈추고 조선 정부와 화해를 합니다. 동학군이 계속 진군한다면 청과 일본이 조선에 군대를 보내게 될 테고 그러면 청과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게 되는 빌미를 주게 되기 때문입니다.

 

조선을 위하여 2차 봉기

전봉준과 동학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으로 군대를 파병합니다. 동학 농민 운동을 막기 위해 조선 정부가 청에 군대를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청이 군대를 보내자 일본도 조선의 일본군을 보호하겠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보냅니다. 조선에 온 일본군은 경복궁을 장악하고 청에 선전 포고를 합니다. 일본이 동학 농민 운동을 빌미로 청일 전쟁 을 일으킨 것입니다.

전봉준은 조선을 집어삼키려는 일본을 막기 위해 다시 동학군을 소집합니다. 전봉준과 동학군은 막강한 일본군의 화력을 알고 있었지만 조선을 위해 반외세를 외치면 모여듭니다. 동학군은 논산에서 모여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공주를 향해 진격합니다. 동학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을 만나 여러 차례 치열한 전투 끝에 크게 패배하고 맙니다. 당시 일본군은 청과 전쟁에서 승리할 만큼 막강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총과 대나무로 만든 창이 전부였던 동학군은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질 것이 뻔한 상황에서도 동학군은 애국심과 의리로 무장하고 조선을 위해 끝까지 전투에 임했습니다.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에게 패한 이후 동학 농민군은 전라도로 후퇴하면서 병력을 재정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동학 농민 운동을 주도했던 지도자들은 대부분 체포되었고 동학군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이때 녹두 장군 전봉준도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재판을 거쳐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당하게 됩니다. 이로써 동학 농민 운동은 실패하고 녹두꽃은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동학농민 운동 이후

동학 농민 운동은 전봉준이 고부에서 탐관오리 조병갑을 몰아낸 때부터 1년여 동안 전개되었습니다. 전봉준은 농민의 지도자로 나라를 위한 마음으로 동학 농민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전봉준은 조선 왕조와 탐관오리의 횡포에 고통 받던 백성들을 위해 노력한 사상가였습니다. 그리고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농민 항쟁을 주도한 혁명가였습니다.

동학 농민 운동은 지배층인 양반의 방해와 조선 정부의 외면, 일본의 막강한 화력으로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동학 농민 운동은 농민과 백성이 중심이 된 봉건 지배 계층에 대한 농민 항쟁이었으며 청과 일본의 침략을 막고자 했던 민족 운동이었습니다. 이러한 동학 농민 운동의 사상은 이후 조선의 근대화와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동학 농민 운동의 반봉건 사상은 이후 조선의 근대화 개혁에 반영되어 신분 제도 변화에 기여했습니다. 그리고 반외세 사상은 조선 멸망 이후 독립 운동인 의병 운동과 3 · 1운동으로 계승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