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재산을 군자금으로 사용한 독립운동가 민순호
전 재산을 군자금으로 사용한 독립운동가 민순호
[閔舜鎬]
위치: 경북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출생: 1880(고종 17), 경북 문경
사망: 1965
국적: 대한제국
자는 봉래(鳳來), 호는 우초(愚樵). 1895년 민비학살사건과 단발령 실시로 반일기운이 높아지면서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이 일어나자, 1896년 1월 이강년을 따라 문경에서 전 재산을 군자금으로 삼아 의병을 모았다. 일제에 협력하는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과 순검 이치윤(李治允), 김인담(金仁覃)을 생포해 효수했다. 그 후 마성면 마고성(麻姑城)에서 적과 싸웠으나 졌다.
한편 유인석을 의병대장으로 연합부대가 결성되자 이에 호응해 돌격대장이 된 이강년의 종사(從事)로서 서상렬(徐相烈) 부대와 함께 조령에서 적과 싸웠다. 그러나 일본군과 정부군이 제천으로 공격해왔을 때 날씨가 나빠 화승이 젖어 총을 쏠 수 없어서 주요의병장들이 전사하고 이강년 부대도 해산되자 단양 산중으로 피신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다시 의병활동을 시작해 이강년과 함께 단양·제천·원주·연풍·영주·강릉·봉화·충주·안동·문경 등 3도 14개 군에서 유격전을 전개했다.
1907년 7월 제천에서 적 500명을 무찔러 충청도·강원도 일대에서 명성을 날렸다. 이에 고종은 이강년을 도체찰사에 제수했으며, 이후 이강년은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으로 추대되고 민순호는 후군소모장으로 임명되어 영춘에서 의병을 일으킨 민긍호와 합세해 충주를 공격하는 등 각지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이해 12월 전국의 의병이 서울을 공격할 때 가평 광악산에서 일본군을 격파한 뒤 인제·강릉·양양 등지의 전투에서도 승리했다. 1908년 이강년이 체포된 후에도 중군장(中軍將) 김상대(金尙臺)와 태백산 일대에서 3년여 동안 계속 투쟁했다. 〈운강선생창의일록 雲岡先生倡義日錄〉의 간행에 참여했다. 1968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