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털싸나이 아우가 보내 온 글
코털싸나이 아우가 보내 온 글
1대간 9정맥 150만에 마무리 한 코털싸나이 [나이 49세]
오늘도 하루가 시작됐네요^^
어제 얘기한 글입니다.
이 글은 약간의 문장 수정과 탈, 오자 수정이 필요한 미완의 글입니다.
감안하시고 봐주세요^^
- 산경표 저자에 대한 논란 -
우리는 『산경표』를 통해 우리 고유의 전통적 지리인식 개념을 알게 되었다. 그로 인해 지금 사용하는 산맥체계는 우리 전통적 지리인식과 완전히 다른 것이고,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가 지질구조와 지질 구조선을 바탕으로 지금의 산맥체계를 만들었으나, 그마저도 맞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이런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우리 고유의 지리인식 개념의 원상복원을 바라고 있다.
한편으로는『산경표』의 저자에 관해 너무나 쉽게 다루어지는 듯하여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산경표』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 우리의 전통적 지리인식 개념이라고 주장하면서도 본의 아니게 그 책의 저자를 사실과 다르게 이야기하다면, 과연 누가 믿어줄까 하는 생각마저도 든다. 산경표』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산경표』와 관련된 모든 것은 사실에 근거한 주장이어야 한다.
『산경표』의 저자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산경표의 저자와 간행 시기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논란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논란은 확실한 증거자료가 나올 때까지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지만, 그러나 근거가 없는 주장들이 기정사실인 것처럼 알려지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주장이 설득력을 갖고 큰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하나하나 모든 게 사실에 근거해 공익에 부합되는 합리적인 주장일 때 가능할 것이다.
개인 블로그는 물론, 카페까지 『산경표』는 1769년(영조 45년) 여암 신경준이 편찬한 것이라는 내용의 글이 수 없이 많다. 마치 기성사실처럼 돼버렸다. 그러나 『산경표』를 연구했던 다수의 분들이 편찬자 미상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도 심심치 않게 ‘『산경표』의 저자는 여암 신경준‘이라는 말을 듣곤 한다.
따라서 이 글은 『산경표』의 저자에 대한 여러 주장들과 근거자료들을 바탕으로 비교 및 검토를 통해 되짚어보기 위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산경표』의 저자가 여암 신경준이라는 박용수님의 주장과 그 근거를 살펴보고, 그 주장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함과 동시에 이를 위한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미 양보경 교수, 조석필 님, 한상진 님 등의 문제 제기가 있었다. 그중 한상진 님이 좀 더 구체적인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지금까지 제기된 『산경표』의 저자와 간행 시기에 관한 다른 주장들도 정리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짧은 글이지만 나름대로 구체적인 근거와 문헌을 소개했다. 또 문헌을 중심으로 지극히 상식적인 분석을 하기도 했다. 이 글의 내용이 합리적이라고 판단돼서 바로잡는 분이 계신다면 무한한 영광이겠다. 어디까지나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또 이 글의 잘못된 부분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이나 지적이 있다면 감사히 받아들여 배우는 계기로 삼을 것이다.
『산경표』의 저자가 누구냐에 대한 논란을 떠나 사실 신경준은 조선 후기에 우리 지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실학자로 알려진 그는 여러 학문에 뛰어나면서도『동국여지승람』신증작업에 편찬의 일익을 담당했던 신공제(申公濟) 의 8대 손답게 특히 지리에 관해서 남달랐다. 『강계고』,『도로고』,『사연고』,『산수고』, 『가람고』, 『동국문헌비고』 의 『여지고』 등과 지도편찬까지 지리학자로서도 뛰어난 활약을 하였다. 영조 45년(1770년) 신경준이 편찬한『동국문헌비고』 의 『여지고』는 그가『강계고』,『도로고』,『사연고』,『산수고』,『가람고』등을 펴내며 쌓아온 자신의 지리인식과 그 당시 지리에 관한 다른 사람들의 자료를 참고하여 만든 결과물이라 생각된다.
조선 후기 지리학자로서 활약이 뛰어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신경준이라는 인물에 관심을 가진 결과 『산경표』의 저자로 관심을 받은 면도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산경표』는 1769년(영조 45년) 신경준이 편찬했다’라는 주장과 그 근거를 살펴보고, 그 주장에 맞서 제기된 주장들과 그 근거들을 알아보고자한다. 속 시원하게 밝혀질 날을 기대하면서 논란 속으로 들어가 본다.
『산경표』의 저자가 신경준 선생이라고 알려진 데에는 1910년 민족 전통의 계승을 위해 고전 간행 및 보급운동을 목적으로 설립된 조선광문회에서 발간된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의 ‘서문‘이 영향을 줬다는 의견도 있으나, 그 보다는 『산경표(해설)』의 저자 박용수님의 주장이 더 많은 영향을 줬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에는 ’편찬자 미상’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는 반면, 박용수님은 자신의 저서 『산경표(해설)』을 통해 『산경표』는 1769년(영조 45년) 신경준이 편찬했다고 단정적으로 유일하게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제기된 주장들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산경표』의 저자는 신경준이며, 영조 45년(1769년) 편찬한 것이라는 박용수님의 주장과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를 보고 누군가 만든 것이라는 그 외 주장으로 나뉜다.
박용수님의 주장을 먼저 살펴보고, 그 외 주장들을소개한다.
I. 박용수님의 주장과 근거.
박용수님이 해설한『산경표』를 통해 밝힌 주장.
"『산경표』의 저자는 바로 여암 신경준이며 편찬 시기는 1769년(영조 45년) 경이다"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근거로 제시한 내용.
영조가 신경준이 지은 『강계지』를 보고 1769년 『여지편람』의 감수를 맡겨 편찬케 하였다, 이 책의 체제가 중국의 『문헌통고』 와 비슷하여 여기에 착안해 편찬한 것이 앞서 설명한 1770년『동국문헌비고』였다.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를 담당하기 바로 전 해에 완성한 『여지편람』은 그동안 저자와 간행 시기 그리고 그 가치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문헌이었다. 『여지편람』의 일부가 『산경표』이다. 이 책은 건책과 곤책으로 되어 있는데, 건책이 바로 『산경표』이다.
내제가 『산경표』로 되어 있는 이 『여지편람』의 건책은 백두대간, 장백정간 등으로 우리나라 산줄기를 나누어 그 밑에 각각 중요한 산 이름을 적고 그 옆에 부읍의 지명과 거리를 이수로 표기하여 산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도록 기술하였다. 『여지편람』에는 저자와 편찬 시기 등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 때문에 저자 등 관련된 사항이 그동안 밝혀지지 않은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참고로 조선광문회본 『산경표』 서문의 『여지고』의 산경이라는 표현은 잘못됐음을 지적한다. 산경이라는 항목은 없고 산천이라 표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용수님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성신여자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지리학과 양보경 교수는 일본 정가당문고에 전하고 있는 같은 제목의 『여지편람』은 전혀 다른 내용의 6책으로 된 조선 지도책이며, 영조가 『동국문헌비고』편찬과정을 설명하면서 『여지편람』의 범례가 중국의 『문헌통고』와 비슷하다고 언급한 점을 볼 때 『산경표』의 저자를 신경준으로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보다 신중해야 한다고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카페 고천의 우리 들뫼, 고천님의 글 신경준의 『산수고』와 『산경표』에서 인용)
1. 근거의 문제점.
박용수님의 주장은 영조가 신경준이 지은 『강계지』를 보고 1769년 『여지편람』의 감수를 맡겨 편찬케 하였다는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1769년 『여지편람』 편찬에 신경준이 관여했다는 것은 전혀 틀린 얘기가 아니다. 단지, 그 『여지편람』은 흔히 『산경표』를 말할 때 얘기하는 장서각 도서인 건책과 곤책으로 구성된 『여지편람』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정확히 말하면 그 당시 『여지편람』은 책명이 『동국문헌비고』로 개명되어 완성되었다. 『동국문헌비고』로 확정되기 전의 이름이 『여지편람』이었으나『동국문헌비고』로 개명되어 편찬된 것이다. 한마디로『여지편람』은 『동국문헌비고』의 초고였다.
2. 구체적 근거.
『동국문헌비고』,『증정문헌지고』, 『증보문헌비고』의 『여지고』를 연구한 『조선후기 지리학 연구』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박인호 님의 논문을 보자. 이 논문은 『산경표』에 대한 연구가 목적은 아니다. 그러나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에 관하여 자세히 연구한 논문으로 이 논문을 통해『동국문헌비고』가 만들어진 과정을 살펴보면, 박용수님의 주장이 어디에서 잘못됐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박인호님의 논문을 살펴보면.
『문헌비고』는 처음에는 강역과 여지에 대한 글에 불과했다. 신경준이 개인적으로 『여지승람』을 초략해서 작성한 『강역지』(저자는 1756년 신경준이 편찬한 『강계고』를 말하는 것으로 추측한다)를 홍봉한에게 보여주었고, 이를 본 홍봉한이 계를 올려 비국에서 수정하기를 청했다고한다.
이렇게 1769년 10월 14일 홍봉한이 청하여 영조의 허락으로 『강역지』를 편찬하게 된다. 그해 12월 영조는 강역, 산천과 도리의 원근뿐만 아니라 균역, 준천 등에 관한 사항도 싣도록 하고, 이름도 조잡함으로 『강역지』에서 『여지편람』으로 바꾸도록 명을 내렸으며, 이때 신경준는 홍찬해와 함께 『여지편람』 편찬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1770년 1월에는 신경준과 홍찬해에게 초고를가지고 입시하도록 하였으며, 『여지편람』이 중국의 『문헌통고』와 체계가 비슷하여 책명을 잠정적으로 『동국비헌무고』로 개명하였다. 책의 편찬을 위한 편집청이 따로 설치되었다. 그리고 인원도 당랑 8인을 더하였으며, 각기 분담하여 편찬하도록 하였다. 이때 신경준은 편집청의 낭청의 직책을 맡아 『여지고』를 직접 편찬하였다.
좀 더자세히 설명한 부분을 그대로 옮긴다.
영조 46년(1770) 1월 5일에는 신경준과 홍찬해에게 초고를 가지고 입시하도록 하였으며, 다음날에는책의 명칭에 대하여 논의가 있었다. 영조는『여지편람』 혹은 『강역지』 등의 이름이 편벽됨을 지적하고 여지는 그 중에서 하나이므로 홍계희의 주장에 따라 『해동문헌편람』 혹은 『해동문헌』으로 할 것을 검토하도록 하였다.[각주 - "上曰, 洪奉朝賀, 謂以海東文獻通考爲名, 恰好云, 此名, 何如? 輿地便覽·疆域誌等名, 皆是偏獨, 靑丘文獻之名, 似好矣, 判尹意, 則何如? 濟恭曰, 其名皆可用, 而名以海東文獻便考, 亦好矣。上曰,然乎? 昌誼曰, 再貼進御, 何以爲之乎? 上曰, 下敎時入侍, 可矣。上曰,仁陽君韓光會, 騎判摠戎使代爲試官。出傳敎 上曰, 今番編輯之名, 初以輿地便覽下敎, 輿地卽一事, 名曰海東文獻便覽, 一曰只海東文獻, 可也。以此令郞廳, 問于時原任後, 入侍以奏, 定公廨然後, 有書寫便考覽, 況各在其家, 何時凝聚? 此正作舍道傍, 其令相臣先爲講定後, 入侍以奏, 後入侍時, 奉朝賀洪啓禧同爲入侍"(승정원일기 72책(탈초본 1300책) 영조 46년 1월 6일 갑신 1770년 乾隆(淸/高宗) 35년)]
그리고 8일에도 홍계희에게 『해동문헌편람』으로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고 자문을 구하기도 하였다. (각주 - 승정원일기 1300책, 영조 46년 1월 8일 병술: 72-726 라). 11일에는 이름을 잠정적으로 『문헌비고』로 정하고 편찬작업에 박차를 가하였다.(각주 - 이석재란조권 14 경이 1770년1월 11일)
그 후에도 책의 명칭을 무엇으로 하는가는 계속 논란이 있었다. 홍계희의 주장에 따라 책명을 다시 『해동편람』으로 고칠 것을 검토하기도 하였다. 또한 『해동통전』 『동국통전』등의 의견이 제시되었으나 최종적으로 『문헌비고』로 결정되었다.[각주 - "편집청에분부하라는 備忘記 ○ 備忘記。今者編輯廳, 以文獻之名, 有此議, 正可哂也。若韓愈諱辨詩文之名, 通稱若此, 君詩稱何名, 君文稱何名? 且靜而思之, 有可奇者, 昔此闕營九梁閣命名文獻,可謂今日編輯之錫名。且備考二字, 亦若仁者仁, 智者智, 見大則大, 見小則小, 雖一器膳, 有味則可飽, 雖雄粧盛飾, 有美然後可稱, 正類此也。思其名眩其實, 此猶愈於疆域, 依前其名之意, 分付編輯廳"(각승정원일기 72책(탈초본 1302책) 영조 46년 3월 5일 임오 1770년 乾隆(淸/高宗) 35년)]
참고: 책에서 설명한 각주 내용 중『승정원일기』의 내용은 『승정원일기』 사이트에서 해당 부분을 퍼옴.
『동국문헌비고』는 처음부터 붙여진 이름이 아니었다. 『강역지』-> 『여지편람』 -> 『동국문헌비고』로 3번의 개명을 통해 확정되었다. 한마디로 『동국문헌비고』로 명칭이 확정되기 전 『여지편람』이라는 이름이 잠시 붙여진 『동국문헌비고』의 초고였을 뿐이다. 박용수님의 주장에서 밑줄로 표시한 부분과 박인호 님의 논문 발취본의 밑줄 부분을 보면 서로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박인호님과 비슷한 주장을 하는 다른 분들과의 차이점은 박인호님의 글은 박사학위 논문답게 다른 분들과 달리『동국문헌비고』의 편찬과정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고, 구체적인 문헌까지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라 객관적인 자료에 의한 주장인 것이다.
3. 또 다른 근거.
역시, 박인호님의 논문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박인호님은 현진상님과 비슷한 주장을 한다. 참고로 박인호님의 책은1996년에 발행했고, 현진상님은 2000년에『한글산경표』를 발행했다.
박인호님 주장.
각주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조선광문회본 『산경표』는 『문헌비고』가 나온 뒤에 그것을 참고로 만들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근거를 하나 든다면 광문회본 99항과 장서각 소장 『여지편람본』 50 A면에 『문헌비고』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 점이다. 『문헌비고』의 『여지고』를 신경준이 지었기 때문에 자신이 지은 『문헌비고』 내용을 비판하였다고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참고로 여기서의 『문헌비고』는 『동국문헌비고』를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박용수님이 주장한 바와 같이 신경준이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를 편찬하기 전, 1769년에 영조가 신경준에게『여지편람』의 감수를 맡겨 편찬케 하였다는 『여지편람』은 장서각 도서인 건책과 곤책으로 구성된 『여지편람』과 같은 내용의 책이 아니라는 사실이 여기서 입증된다.
같은 내용의 책이라면 위의 밑줄 친 내용에서 보듯, 1769년 편찬됐다는『여지편람』에서 아직 편찬도 안 된 1770년『동국문헌비고』내용의 잘못을 1년 전에 미리 지적하는 격이니 말이 안된다. 장서각본 『여지편람』은 최소한 『동국문헌비고』가 편찬된 1770년 이후에 편찬됐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만 보더라도 박용수님의 주장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동국문헌비고』 전에 편찬했다는 『여지편람』의 내용이나 체계가 나중에 완성된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의 내용보다 더 구체적이고 체계적이다는 것도 납득하기 힘들다.
둘째.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에서 신경준이 편찬한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의 잘 못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아 신경준은『산경표』의 저자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정황증거로 볼만하다는 것이다. 신경준이『산경표』를 편찬했다면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비판하는 모순점이 있기 때문이다.
4. 추론.
박용수님의 주장은 『동국문헌비고』의 편찬과정에서 잠시붙여진 이름인 『여지편람』을 장서각 도서인 2책(건책, 곤책)으로 구성된 『여지편람』과 같은 것으로 판단한 결과 『여지편람』을 신경준이 1769년에편찬한 것으로 판단하여『산경표』를 1769년 신경준이 편찬했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5. 박용수님 주장에 대한 결론.
박용수님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객관적 자료를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에 의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박용수님의 주장의 핵심은 영조가 신경준이 지은 『강계지』를 보고 1769년 『여지편람』의 감수를 맡겨 편찬케 하였다는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박인호 님의 논문을 통해 봤듯이『동국문헌비고』편찬과정과 장서각본『여지편람』의 50A면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박용수님이 주장한 1769년 신경준이 편찬했다는 『여지편람』은 『동국문헌비고』의 초고였을 뿐, 장서각본 『여지편람』과는 전혀 관계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박인호님의 논문 내용은 『승정원일기』, 『이석재란조』 등 수많은 구체적 문헌자료를 제시함으로써 객관적 자료에 근거한 주장으로 이 자료들의 내용이 잘못된 것이라는 증거가 없는 한,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장서각 도서인 『여지편람』을 1769년 신경준이 편찬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장서각본『여지편람』을 1769년 신경준이 편찬했다는 것을 전제로 『산경표』를 영조 45년(1769년) 신경준이 편찬했다는 박용수님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II. 이우형님의 주장과 근거.
이우형님의 주장.
『산경표』의 원본은 『해동보리보』이고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 을 보고 누군가 편찬했으나 편찬자는 미상, 편찬 시기는 1800년 전,후라는 입장.
근거로 제시한 내용.
이우형님은 『산경표』는 여암 신경준이 동국지도류의 산줄기 흐름을 토대로 『문헌비고』의 『여지고』 『산천』을 집필한내용을 가지고 누군가 편찬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또, 규장각의『해동도리보』를 원본으로 보는 입장이다. 『해동보리보』는 』『산경표』와 『도리표』"로 되어있는데 『도리표』는 수원을 화성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수원은 1789년에 화성으로 옮기고 1795년에 정식으로 설치되었기 때문에 『산경표』는1800년 경이고, 저자는 미고라는 입장이다.
1. 결 론.
『산경표』의존재를 세상에 알린 분으로 주목해보지만『해동보리보』를 『산경표』의 원본으로 보고 있다는 점과 지명의 변화를 보고 편찬 시기를 1800년경으로 추측할뿐, 편찬자는 미상이다. 조석필님의 표현처럼 신중한 편이다.
2. 이우형님에 대한 이야기.
이우형 선생님은 『대동여지도』 목판본을 처음 발견했고, 어렵게 『대동여지도』를 복간시켰다. 또 일본 국회 도서관까지 가서 자료를 뒤져서 고토 분지로가 지금의 산맥 개념을 만듦으로써 우리 고유의 전통적 지리 개념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고 세상에 알렸고, 교과서에 김정호의 잘못 수록된 부분을 홀로 백방으로 뛰어다니면서 바로잡기도 했다. 뜨거운 열정으로 큼직한 일들을 많이 했지만 어느 날 이슬처럼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산경표』를 처음 발견한 사람으로만 사람들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분의 진짜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
III. 노상복님의 주장과 근거.
노상복님의 주장.
자신의 저서 『장서각도서한국본개제보-지리류( I )』를 통해 『산경표』의 편찬자는 미상이며, 편찬 시기는 1895년 이후라는 입장.
근거로 제시한 내용.
『여지편람』 제 2권 곤의 『정리표』의 (제1 서북저의주, 제2 동북저강전서수라, 제3 동전편해, 제4 동남전부산, 제5 동남저태백산, 제6 남저통영별로, 제7 서저강화) 목록은 오횡묵이 편찬한 『여재촬요』의 『팔도도리표』와 같은 내용임으로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여지편람』의 『정리표』는 "『여재촬요』의 7책이나 되는 『팔도도리표』를 한 권으로 축소해서 여행자가 여행할 때 신속하게 간파하고 싶은 대중의 조급성에 더욱 영합되고 있다.
이 책의 곤부인 『정리표』의 내용이나 그 체제가 『여재촬요』의 『팔도도리표』의 요약이라는 증빙만으로도 1895년 이후에 편집된 것임을 알 수 있고, 조선광문회본 『산경표』는『여지편람』의 건부 『산경표』를 대본으로 발간한 것이다.
『여지편람』에 대해 설명하면서 앞부분에 써놓은 글 소개.
『여지편람』은 저자도 필사 년대도 없으며 편찬 과정이 소개된 서발문 등은 더구나 없다. 어떤 시대에 어떤 책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는가를 보면 변화되어가는 정신문화의양상과 시대별 구획할 수 있고, 성립과정 등이 모호한 책이 있을 때도 내용을 구획 설정되어 있는 것을대입해 보면 저작의 시기와 목적 등을 파악하는 방법이다.
1. 결론.
『여지편람』의 곤책의 『정리표』의 목록이나 내용, 그 체제가 『여재촬요』의 『팔도도리표』와 같기 때문에 『여재촬요』를 보고 누군가 요약해서 만든 책이 『여지편람』이고 1895년 이후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제1 권인 건책의 『산경표』 부분에서 『여재촬요』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설명하지 않고 있는 게 아쉽다. 『여지편람』의 곤책 『정리표』의목록이나 체제가 『여재촬요』와 같다면 어찌 된 것인지 흥미롭다. 연구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여지편람』을 『산경표』의 원본으로 보는 시각은 박용수님과 같으나 『여지편람』의 저자와 편찬 시기에 관해서는 서로 많은 차이가 있다. "『여지편람』은 저자도 필사 년대도 없으며 편찬 과정이 소개된 서발문 등은 더구나 없다"는 노상복님의 글 내용은『여지편람』을 연구해본 결과 저자, 필사 년대, 서발문 등의 자료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여지편람』은 1769년 신경준이 편찬했다는 박용수 님의 주장과 크게 다르다.
IV. 현진상님의 주장과 근거.
현진상님이 자신의 저서 『한글산경표』에서 밝힌 주장.
『산경표』의 원전은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이다. 신경준이 『여지고』를 집필한 게 사실이라면 신경준이 『산경표』를 만들었다고 할 수 없다. 편찬자 미상, 편찬 시기는 1800년경이다.
『산경표』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면에서 훌륭한 책이다. 구체적이고 많은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고, 단순히 한글로 옮기는데 그치지 않고 오류가 많은 조선광문회본 『산경표』를 『증보문헌비고』의 『여지고』를 보며 일일이 대조하면서 오류를 수정하며 『한글산경표』를 완성했다고 한다. 같은 이면에서 서로 비교할 수 있으므로 그것만으로 『산경표』의원전은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임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근거로 제시한 내용.
1. 조선광문회본 『산경표』 99쪽 호남정맥 지래산 갈래 옆에 붙인 주석 첫머리에서 『문헌비고』 본문을 살펴보면..." 이라는 문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신경준이 자신이 만든 『문헌비고』의 『여지고』를 자신의 또 다른 책에서 그렇게 적을 리 없으므로 신경준은 『산경표』의 저자가 아니며, 『산경표』의 원전은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라는 것이다.
2. 조선광문회본 62쪽 한북정맥 추모현의 부기에 "본명은 사현이다. 영조 45년(1769년)에 개명하였다"라고 되어 있는데, '영종'이라는 묘호는 1776년 3월 10일에 정해졌고, 1890년 1월5일 영조로 추존 개정하였다고 한다.
3. 조선광문회본 9쪽 백두대간 좌역령의 부기에"이원 동쪽 37리에 있다" 하였는데, 이성현을 이원으로 고친 시기는 순조 1800년이다. 따라서 『산경표』는 1800년 이후에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를 원전으로 하여 만든 것이며, 편자는 알 수 없지만 신경준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4. 조선광문회본 『산경표』 서문의 산경은 『여지고』의 산줄기의 흐름을 뜻하는 보통명사라고 주장한다.
5. 1769년 신경준이 영조의 명을 받아 편찬했다는 『여지편람』과 건, 곤 2책으로 된 『여지련람』은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책으로 볼 수 있다. 영조조 어제 『동국문헌비고』에서 처음 『강역지』로 인하여 『여지편람』을 편찬하라고 명하였는데, 그 범례를 들어보니중국의 『문허통고』에 가까우므로 그 이름을 고쳐 『동국문헌비고』라고 하도록 하였다. 이때 『여지편람』은 별도로 편찬된 책이라기보다는 『여지고』 또는 『동국문헌비고』의 초고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6. 『산경표』는 2차 편찬된 『증정문헌비고』의 출현을 보지 못하고, 주석이 상태 즉『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를 보고 만들었다.
1. 참고사항.
2의 내용은 임금이 죽은 뒤 붙여지는 묘호인 영종은 1776년부터이므로『산경표』에 영종이라는 내용이 있는 만큼 최소한 1776년 3월 이후에 편찬됐다는 입장인 것이다. 1769년이라는 박용수님의 주장에 대한 오류을 지적하는 샘이다.
4의 내용은 박용수님이 조선광문회본『산경표』 서문의 “오직 신경준이 지은 여지고의 산경만이 그 줄기와 갈래의 내력을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는 내용 중 『여지고』에는 산경이라는 항목은 없고 산천이라는항목이 있음을 지적하는 주장에 대해, 산경은 책의 항목이 아니라 『여지고』에 나와 있는 산줄기 흐름을 말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5의 내용은 앞서 설명한 박인호 님의 논문 내용과 정확히 일치하는 견해다. 『동국문헌비고』를 연구한 두 사람이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2. 결 론.
박용수님의 주장이 잘못됐음을 설명하고 있다. 현진상 님은 자신의저서 『한글산경표』를 통해 조선광문회본 『산경표』 '서문'에 『산경표』의 원전은 신경준이 지은 『여지고』 임을 밝히고 있다고 설명하면서도 직접 연구를 통해 구체적인 여러 사례를 들어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글에서 밝힌 내용과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서문의 내용을 종합해보면『산경표』의 원전이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편찬 시기는 지명의 변화를 보면서 추론한 결과이므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지명 변화가 중요한 단서이기는 하지만 절대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명을 개명할 때 없던 지명을 새로 만들 수도 있지만, 한 가지 이상의 지명으로 구전이나 소수의 사람들이 사용해 전해져 오던 명칭 중, 더 부합하다고 판단해서 그것으로 개명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별다른 근거가 없는 현재로서는 지명의 변화를 보고 추정해 볼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지명의 변화를 근거로 삶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V. 조선광문회본산경표 서문.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살펴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서 있지 않음을 지적하게 된다. 오직 신경준이 지은 여지고의 산경만이 그 줄기와 갈래의 내력을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높이 솟아 어느 산을 이루고, 비껴 달리다가 어느 고개에 이르며 굽이돌아 어느 고을을 둘러싸는지를 상세히 싣지 않은 것이 없기에 이야말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인 표라 할만하다.
이 산경표는 산경을 바탕으로 삼고, 옆에 이수를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마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듯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이 산경표는 그 원전이 되는 산경에 금상첨화일 뿐만 아니라 실로 지리 연구가의 지침서가 될만하다.
VI. 조선광문회본『산경표』 서문에서 말하는 두 가지 핵심.
조선광문회본 서문의 내용이 절대적일 수는 없지만,『산경표』의원전이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라는 사실은 아주 간단하게 증명이 된다. 조선광문회본 『산경표』 서문에 이미 나와 있기 때문이다.
"오직 신경준이 지은 여지고의 산경만이 그 줄기와 갈래의 내력을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오직 신경준이 지은 『문헌비고』의『여지고』의 『산천』에 있는 산줄기(산경)만이 그 줄기와 갈래의 내력을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이 산경표는 그 원전이되는 산경에 금상첨화일 뿐만 아니라 실로 지리 연구가의 지침서가 될만하다"
(이 『산경표』는 그 원전이 되는『문헌비고』의 『여지고』의 『산천』의 산경(산줄기)에 금상첨화일뿐만 아니라 실로 지리 연구가의 지침서가 될만하다)
첫째. 이미 서문에 『산경표』의 원전은 『문헌비고』의 『여지고』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둘째. 『산경표』의 편찬자는 미상이지만, 『산경표』의 원전은 『문헌비고』의『여지고』라고 밝힘으로써『산경표』는 신경준이 바탕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경준이 『산경표』의 저자가 아니라는 소리도 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산경표』 저자에 대한 결론.
『산경표』는 1769년(영조 45년) 신경준이 편찬한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그 말을 뒷받침할만한 자료는 아직 없다. 오히려 신경준은 『산경표』의 저자가 아니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정황들이 나오고 있다.
조선 후기 신경준이 뛰어난 능력으로 우리 산줄기 체계 정립에 대단한 공헌을 했음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근거 없이 『산경표』는 신경준이 편찬했다는 식의 주장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어떤 주장을 할 때에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산경표』는 1769년(영조 45년) 신경준이 편찬한 것이라는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러므로 현재로서는 여전히 『산경표』는 편찬자 미상으로 보는 주장이 맞다고 판단된다.
지금까지 조선광문회본『산경표』서문의 내용이 사실과 다른 점을 하나도 발견할 수 없으므로, 서문의 내용이 그만한 이유가 있어 작성된 신뢰성 높은 것으로 봐야 한다.
내용과 구성, 체계가 동일한 『여지편람』과 『산경표』가 편찬자 미상이라는 사실은 두 책이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굴욕의 역사 35년이 모든 것을 깨끗이 지워벼렸다. 수많은 자료들이 사라졌다. 우리전통적 지리인식 개념도 지워벼렸다. 지리와 인문은 떼려야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나는 우리 민족의 문화를 지우기 위해 지리를 바꿨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우리 선조들이 이 땅을 활용하고 바라본 전통적 지리 개념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물에 의해서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 것으로 본 것이었다. 섬나라 사람들로서는 얼마나 열등감을 느꼈을지 짐작이 간다. 그들이 지우려던 우리 전통적 지리 개념은 그들에 의해 끊어지지 않고 『산경표』를 통해 우리에게까지 이어졌다. 『산경표』는 그만큼 소중한 역사적 자료이다.『산경표』는 이런 역사적 상징성이 있기 때문에 그 이름 자체가 보존의 대상이라 생각한다.
『산경표』의 오류를 지적한다. 산줄기 방향의 일부가 산자분수령의 원리하고 다르다고 말한다. 오류를 지적하는 것은 깊은 연구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산경표』연구를 위해서도 필요하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현미경을 들고 따지기 전에 쓰러져있는 『산경표』에 우리 모두가 힘을 모아 심폐소생술을 할 때이다. 그다음 원상회복하고 뛰어다닐 때 꼼꼼히 따져도 늦지 않다. 너무 지엽적인 문제를 지나치게 큰 문제로 부각시켜 견해가 갈리고 힘을 분산시키지는 말자는 것이다.
현시점에서는 『산경표』가 맞느니, 틀리느니 보다는.『산경표』대 고토 분지로의 산맥론을 가지고 맞느냐, 틀리냐를 따져야 한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고토 분지로의 산맥론의 부당함을 지적해야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산경표』의 산자분수령의 논리로 『산경표』를 검증한다는 것이다.『산경표』에서 이미 우리 지리 개념의 원리를 말하고 있다. 원리를 만든 사람이 자신이 만든 원리를 몰라서 오류를 범했을 리 없다.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떠한 이유가 됐든 핵심은 원리이고, 오류는 아주 작은 지엽적인 문제다. 명확한 원리가 있으므로 충분히 합리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문제다.
『산경표』의 원리, 즉 산자분수령의 원리를 보다 작은 산줄기에 적용한 것이 기맥, 지맥이라고 본다면 기맥, 지맥도 분명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작은 산줄기까지 직접 답사하며 실제 지형에 맞게 산줄기 흐름을 파악하고 체계를 정립하는 일은 그 자체가 엄청난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들에게 존경하는 마음으로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이제 원상복귀의 대장정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단지 시간이 걸릴 뿐이다. 산행을 하다 일명 알바를 해도 원상 복귀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알바해서 간 거리만큼, 똑같은 거리를돌아와야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왜곡되었던 시간만큼 복귀하는 데에도 똑같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일본은 고토 분지로가 만든 산맥 개념을 사용하다가 틀린 부분이 많아 다시 조사해서 새로 바꿨다고 한다. 우리도 우리 전통적 지리 개념이 하루빨리 복원되길 바란다. 정확한 지질 구조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 두 가지 다 우리 땅을 바르게 알고 활용하는데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쩌면『산경표』의 편찬자가 미상이어서 우리가 『산경표』에 대해 더 궁금해 하고 관심을 가졌을지 모른다. 세상에 다 좋은 것도, 다 나쁜 것도 없다. 현재까지『산경표』의 편찬자를 알 수 없어 가슴 한편에 아쉬움이 있지만,『산경표』를 통해 우리 전통적 산줄기를 알았다는 사실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어쩌면『산경표』의 임무는 이것으로 끝났을 수 있다. 나머지는 우리들의 몫이다.
제목: 우리 산줄기
백두산이 첫 줄기를 잉태하니 나라의 경사인데
웅장하게 동북으로 뻗어나간 기백 또한 일품일세
그 끝이 백두보다 위쪽 이 땅의 끝자락에 다다르니
가히 백두산의 장자라 아니할 수 있으랴
오직 간(幹)에만 산의 이름을 붙임은
혹여 먼 훗날 맥(脈)이 간(幹)이 되어
질서를 어지렵히는 우를 범하지 않게 함이 아닐런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구나.
백두에서 시작해서 지리에서 머물게 함은
대마불사 와도 같은 이치이가 아닐런지
이 땅의 정기가 가득하길 바람 아니겠나 생각하니
이 또한 경이롭다
산경표가 한때 죽어 다시 태어남은
진리는 영원함을 증명함이 아닐까 생각하니
이 또한 경이롭다
혹세무인 시대에
혹여 산경표가 입을 열까 두렵구려
내 수천 년을 들여다 보고 논했거늘
고작 책 몇 권 알고 내 흠을 논하느냐
세상이 어지럽게 변함을 미리 걱정하였나니
내 충심이 절로 붓 자락에 매달려 혼을 다 하였으니
그 정기는 이 땅에 영혼 하리라
어느 때고 할 말이 있거든
나를 끌어들여 논하는 걸 누가 마다하리오
다만 한푼 이익이 있는 곳에 내 영혼 설 곳 없어라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세상이 어지럽다한들 돌고 돌아 다시 산경표이거늘 ~~~~ [발췌: 다음 카페 산경표따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