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및 전설

우암 송시열선생

꼴통 도요새 2018. 9. 27. 05:34

우암 송시열선생

우암선생계녀사[尤庵先生誡女詞]

시대: 조선 

저작자: 송시열 

성격: 여훈서, 유학전적 

유형: 문헌 

권수/책수: 1책(19장) 

분야: 종교·철학/유교 

소장/전승: 서울대학교 규장각 


개설

조선후기의 학자 송시열(1607-1689)이 출가하는 딸에게 지어준 글을 240자 원고지에 펜으로 필사한 것이다. 내용은 부녀자가 살아가면서 지키고 실천해야 할 규범을 담고 있다.
 

서지적 사항

필사본. 1책(19장). 240자 일제(日製) 원고지에 제목은 한자로, 본문은 한글로 세로쓰기가 되어 있으며‚ 띄어쓰기 없이 펜으로 필사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 연세대학교도서관 등에는 본서와 동일한 내용을 담은 필사본 『우암계녀서(尤菴戒女書)』가 소장되어 있다.
 

내용

첫 머리에 “여자의 행실은 아비가 가르칠 일이 아니로되, 네 나이 비녀를 꽂을 나이에 이르러 행실 높은 집으로 출가하니, 마지 못하여 대강 적어 주나니 늙은 아비 말이 전후 없고 소략하다 말고 힘써 행하라.”고 하여 글을 짓는 이유를 밝혔다.

이어서 20개의 항목에 걸쳐 결혼한 부녀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제시했는데, 부모, 남편, 시부모, 형제와 친척, 자식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적고, 이어 제사를 받드는 일에서부터 일상 생활에 필요한 일까지 자세히 정리하였다.

주제는 ‘부모 섬기는 도리’, ‘지아비 섬기는 도리’, ‘시부모 섬기는 도리’, ‘형제 화목하는 도리’, ‘친척과 화목하는 도리’, ‘자식 가르치는 도리’, ‘제사 받드는 도리’, ‘손님 대접하는 도리’, ‘투기하지 말라는 도리’, ‘말을 조심하는 도리’, ‘재물을 아껴쓰는 도리’, ‘일을 부지런히 하는 도리’, ‘친정부모나 시부모 및 남편의 병환이 낫을 때 모시는 도리’, ‘의복과 음식하는 도리’, ‘노복 부리는 도리’, ‘돈을 꾸며 받는 도리’, ‘물건을 팔고 사는 도리’, ‘무당에게 기도하지 않는 도리’, ‘종요로운 경계’ ‘옛사람의 착한 행실과 말’ 등이다.
 

의의와 평가

이 글은 송시열의 맏딸이 권유(權惟)와 혼인할 때 작성해서 준 글로, 권씨가에서 계속 전해져 왔다. 본문은 원래 한글로 작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글에 관심을 가진 가문에서 구해서 필사하고 돌려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출처: 다음백과]


잿골과 우암 송선생 이야기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부구2리에서 잿골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잿골과 우암 송선생 이야기」에서 잿골은 북면 부구2리 마을의 옛 이름이다. 잿골은 흥부역(興富驛)이 있던 교통의 중심지로서 사람과 문물의 왕래가 잦은 요지였으며, 부구2리의 흥부장은 ‘어물, 소금시장’으로 유명했다. 흥부장은 해산물과 소금의 유통을 담당한 특수상인 집단인 이른바 ‘바지게꾼[선질꾼, 일종의 부보상]’이 조직적으로 활동했던 곳이기도 하다.


[채록/수집상황]
1998년에 울진문화원에서 간행한 『울진의 설화』에 채록 내용이 실려 있다.


[내용]
우암 송시열 선생이 1671년 거제도로 유배를 당하여 가던 중 울진군 북면 부구리 ‘잿골’ 역소에서 관리들의 호위를 받으며 하룻밤을 잔 적이 있다. 그 때 북면 신화리 화동(花洞)마을에 살던 선비 만은공(晩隱公) 전선(田銑)이 우암 송선생을 찾아와 융숭히 접대하였다. 이에 선생은 갖고 있던 부채에 손수 시 한 수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시는 “푸른 바다의 깊이가 깊어도 만은공 전선의 정에 비하지 못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모티프 분석]
「잿골과 우암 송선생 이야기」의 기본 모티프는 ‘융숭한 대접’과 ‘시를 쓴 부채로 보답’이다. 거제도로 귀양을 가는 죄인에게 지방 선비인 전선이 대접을 잘 하자, 송시열은 감격하여 부채에 시 한 편을 지어 주었다고 하는 유명 선비와 관련된 민담이다. 우암 송시열은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최고의 성현으로 추앙받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