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울진 아구산, 안일왕산
경북 울진 아구산, 안일왕산
1. 산행지: 아구산(653m)~안일왕산(818.9m)
2. 위치: 경상북도 울진군 서면과 북면의 경계
9. 특징:
두천리[斗川里]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두천리
옛날 고을 원이 임지로 가는 도중 이곳에 머물게 되었다. 다음 날 타고 온 말이 보이지 않아 하루 종일 찾다가 다래덩굴 밑에서 말을 찾은 데서 마을 이름이 말래[馬來]가 되었다. 두천(斗川)이란 이름은 말래의 ‘말’을 말 두(斗)자로 표현하고 ‘래’를 내 천(川)자로 표현하여 두천이 되었다
[형성 및 변천]
본래 울진군 원북면에 속하였다가 1916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두천리라 하고 북면에 편입되었다. 두천리는 두천1리와 두천2리의 행정리로 이루어져 있다. 바깥말래[外斗川]라고도 하는 두천1리는 한양으로 가는 십이령 길목에 있어 한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꼭 거쳐 가야 하는 마을로, 김녕김씨와 청송심씨가 들어와 처음 마을을 이루었고 이어 해주정씨가 들어왔다. 두천2리는 안말래[內斗川]와 사기골[일명 사기점], 장평 등 세 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안말래는 600년경에 심씨(沈氏)가 개척한 마을이고, 사기골은 사기그릇을 만들던 곳이다. 장평은 주막이 있어 십이령을 넘는 길손들이 쉬어 가던 곳이다.
[자연환경]
두천1리 동쪽은 말래에서 내려가는 물이 하당리(下塘里)로 흐르고, 서쪽은 배목재[梨項嶺]를 중심으로 두천2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남쪽은 악구산(岳丘山)이 있으며, 북쪽은 남산재를 경계로 상당리(上塘里)와 닿아 있다. 두천2리 동쪽은 형제봉이 솟아 있고, 서쪽은 안일왕성(安逸王城), 남쪽은 악구산, 북쪽은 세덕곡산(細德谷山)이 있다. 안말래에서 내려오는 물이 바깥말래를 거쳐 울진 남대천으로 흘러든다.
[현황]
북면에서 상당리와 더불어 가장 오지 마을인 두천리는 2015년 12월 31일 현재 총 65세대에 128명(남자 66명, 여자 62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두천천 일대에 취락이 조성되어 하당리와 연결되고 있으며, 북면의 다른 산간 마을에 비해 울진읍 중심지 접근이 용이하다. 문화재로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0호인 울진 내성행상 불망비(蔚珍 乃城行商 不忘碑)가 있다
안일왕산
아구산(蛾口山, 일명 악구산)
경상북도 울진군 서면과 북면의 경계에 자리하는 해발 819미터의 산으로 지금까지 산꾼들에게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신비의 산이다. 오랫동안 산꾼들이 애용하는 지도는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발행한 축척 5만분의 1 지형도였다. 그러나 그 지도를 자세히 살펴도 안일왕산은 보이지 않고 그 위치조차 참으로 까다로운 곳에 자리한다. 지리원의 1대5만 축척지도 장성, 죽변, 소천, 울진 4장의 지도를 한꺼번에 펼쳐야 겨우 산세를 확인할 수 있는 산이 안일왕산이다. 울진군 소광리에는 참으로 많은 금강송이 자란다. 안일왕산과 샛재 일원에만도 200년 수령 이상이 4,000여 그루, 소광천 일대에는 무려 8만여 그루가 분포한다. 그 중에는 울진군이 자랑하는 500년생 소나무도 있지만, 내가 만난 안일왕산의 대왕소나무는 참으로 특이했다. 숲 해설가의 설명에 따르면 수령 700년으로 추측되는 이 소나무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탄복케 하는 명품 중의 명품이었다. 더더욱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노송들은 산기슭이나 평지에 위치하며 오랜 세월 주민들의 보호를 받아왔지만 이 소나무는 안일왕산 정상이 지척인 해발 780미터의 고도에 위치하며, 그 동안 아무런 보호도 받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하여 누구든지 대왕송을 만나기만 하면 저절로 외경심을 갖게 된다.
망국의 마지막 실직국 안일왕 경북 울진에 전설만 남아
안일왕산 전설
사료에 희미하게 나타나는 실직국의 모습을 완전 복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다만 고고학적 연구업적이 살을 보태고, 삼척, 강릉, 울진 일대의 지형지물을 살펴보면서 실직국의 윤곽을 그려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실직국의 강역은 북쪽으로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에서 경북 동해안인 영덕에 이르는 동해안 해상왕국이었다. 서쪽으로는 백두대간(白頭大幹)과 낙동정맥(洛東正脈)이 흐르고, 그 사이 바다 쪽으로 뻗친 지맥 사이로 소하천이 형성되고 있다. 실직국은 강원도 남부에서 경북 북부에 이르는 동해안에 좁고 길게 연맹체를 형성했다. 안데스 산맥(Andes Mts.)에 가로막혀 길쭉하게 국토를 형성하고 있는 남미의 칠레를 연상케 한다. 동해안 유적을 살펴보면 실직국은 해상왕국으로서 북의 옥저, 남의 진한, 변한을 연결하며 중계무역으로 번성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강릉 교황리 유적에서 철 생산과 관련 있는 유구가 출토되고, 동해 망상동과 송정동 유적에서 송풍 파편이 발견됐다. 이는 실직국이 금관국의 철기를 수입해 자체적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북쪽의 예국에 수출한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실직국의 수출품은 어물과 소금, 임산물 등이 아니었을까. 강릉 유적지에서는 중국 한대(漢代)의 오수전이 발견되는데, 동해안 해로가 오래전부터 운영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다. 고려조 이승휴가 남긴 기록에도 있듯이 삼척, 울진 등지에서는 맑은 날에 울릉도가 보이고, 울릉도에서도 육지가 보인다고 한다. 따라서 실직국과 우산국 사이에도 교역이 있었고, 실직인들은 삼척에서 울릉도까지의 해로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기록상으로 이사부가 실직주 군주가 되기 300년 전에 실직국은 이미 존재했다. 실직국은 동해를 장악한 고대 해상왕국이었고, 실직국인들은 해류와 해풍의 방행과 이용법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박 제조술은 물론 발달한 항해술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신라는 숱하게 왜의 침공을 받아 왔기 때문에 제해권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달았다. 때문에 지증왕이 가장 신뢰하는 왕족을 실직 군주로 보낸 것은 동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라는 뜻이었다. 실직국은 멸망했지만, 그 후예들이 보존해 온 선박 제조술, 항해술은 나중에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하는 데 충분히 활용됐을 것이 분명하다. 실직 왕국의 전설은 살아남은 백성들 사이에서 이어져,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동해안 일대에 남아 있다. 삼척문화원 웹사이트에 기록되어 있는 경북 울진군 서면 왕피리(王避里)의 실직국왕 전설을 소개해 보기로 한다. 지금부터 2천여 년 전 동해안에는 강릉 지역의 예국(濊國), 삼척 지역의 실직국(悉直國), 울진 지역의 파조국(波朝國) 또는 파단국(波但國)이라 불린 군장국가가 공존해 있었는데, 이들 세 나라를 통칭해 ‘창해삼국(滄海三國)’이라 불렀다. 철기시대를 맞아 다량의 청동제 및 철제 무기를 소유한 이들 세 나라는 영역 확장을 위한 전쟁을 하게 되고, 기원후 50년경이 되면 마침내 삼척의 실직국이 울진의 파조국을 침공해 합병하게 된다. 그로부터 10년 후 실직국은 강릉의 예국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안일왕(安逸王)은 울진으로 피난하여 산성을 쌓고 방비를 했다. 이 산성은 안일왕이 피난 와서 축조한 성城)라 하여 ‘안일왕산성(安逸王山城)’이라 부르는데 경북 울진군 서면 소광리에 가면 지금도 정상부에 산성의 형태가 잘 남아 있다. (중략) 실직국의 왕 가운데 유일하게 그 이름이 남아 있는 안일왕은 울진 지역에서만큼은 안일왕보다 ‘에밀왕’으로 불린다. 그곳의 70∼80대 노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어릴 적에 울음보를 터뜨리면 어른들이 “예(濊) 나온다, 그쳐라”, “예 쳐온다, 그쳐라” 하고 달랬다고 한다. 즉 강릉의 예국이 쳐들어오니까 울음을 그치라는 뜻이다. 안일왕산성 주변의 통고산(通高山)은 안일왕이 이 산을 넘으면서 하도 재가 높아 통곡했다 해서 ‘통고산’이라 한다. 삿갓봉의 복두괘현(僕頭掛縣, ‘박달재’라고도 함)은 안일왕산성이 함락되자 안일왕이 신하와 옷을 바꿔 입고 도망가다가 이곳에서 복두, 즉 임금이 쓰던 모자를 벗어 놓고 샘물을 마시던 중 적군의 추적이 가까워지자 미처 걸어 놓은 복두를 쓰지 못하고 도망간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울진군 서면 왕피리는 임금이 피신했던 곳, 병위동(또는 병우동)은 안일왕의 군사가 머물렀던 곳, 포전(飽田)은 왕이 피난 당시 군속과 같이 갈증을 풀고 포식한 곳, 임광터(또는 임왕기)는 임금이 앉아 쉬던 곳, 핏골은 왕이 적에게 붙잡힌 곳, 거리곡은 실직국의 군량미를 저장하는 창고가 있었던 곳이라 해서 그런 지명이 붙여졌다는 유래가 전해져 오고 있다. 2000년 전 실직국의 숨결이 경북 울진에서 설화와 지명의 형태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실직국의 중심지였던 삼척보다 울진 지역에 실직국 설화가 잘 남아 있는 것은 울진 지역의 지형적 고립성 때문으로 해석된다.
신라 파사왕 때 멸망한 실직국을 건설한 사람은 실직인, 부족을 ‘실직씨’라 불렀는데, 지금은 그 성씨가 남아 있지 않다. 잃어버린 왕국의 후손은 어찌 성씨를 쓸 수 있으랴. 일부에서는 울진 ‘봉평신라비’를 해석해 실직국 부흥운동이 벌어졌다고 주장하는데, 딱히 동의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출처: 오피언뉴스]
경북 울진군 세덕산 안일왕산 동묘산
1. 산행코스: 두천리→(두천교)→안말래→아구산→519봉→안일왕산(819.3m)→샛재→소광리(찬물래기)두천리[예상 시간: 7시간]
2. 산행경로: 세심마을 세덕산 783.8봉 747.5봉(소천424) 안일왕산 세덕산 576.2봉 바람터 금강송면정류소 동묘산 왕피천탐방안내소[산행거리 – 약13.28km, 산행시간 - 약 4시간 반]
※산행참고
1. 산행 길은 전반적으로 무난하였습니다만 중간중간 잡목이 산행 길을 붙잡습니다.
2. 산행시작은 세심마을 새로 뚤린 도로변에서 시작 합니다.
3. 세덕산 정상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세덕산에서 안일왕산을 왕복 합니다.
4. 안일왕산은 안일지맥(아구지맥)상 죽변22 삼각점이 있는 안일왕산도 있지만 지리원에서 검색해보니 소천424삼각점이 있는 747.5봉 동쪽 능선 끝봉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네이버 지도에도 이곳을 안일왕산으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5. 안일왕산 정상에 담양전공묘가 있고 옥산계곡으로 가는 능선길이 보입니다.
6. 동묘산 오르내림 길은 사면으로 오르내렸는데 급경사 너덜 잡목구간입니다 주능선길이용을 권장해드립니다. 동묘산 정상에 나무구조물과 의자 돌탑? 같은 것이 있고 네이버지도에는 북쪽 다음 봉을 동묘산으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7. 왕피천 생태탐방로가 있는 삼근1리 정류장에서 산행을 마칩니다. 삼근(斤)리는 통고산 천축산 세덕산의 세뿌리가 모인 곳이라는 의미로 삼근(根)리라 하였답니다. 행정구역 변경 시 삼근(根)리가 삼근(斤)리로 변경되었다고 합니다.
아구산(蛾口山, 일명 악구산)
울진읍 대흥리 본동을 거쳐 안미팥골과 검미팥골을 지나 1시간 20~30분쯤 걸어 올라가면 다다를 수 있는 험준한 지세의 악산으로 652.9미터 높이로써 주변에서는 가장 우뚝하다. 정상부근의 돌로 축조한 성벽을 따라 5분쯤 걸어 올라가면 드디어 산의 정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남북으로 길게 뻗어 내린 성벽이 성안을 아늑하게 감싸 안고 있는 안일왕산의 정상에는 네다섯 명이 둘러 앉아 쉴 수 있는 공간이 저절로 생겨있고, 2004년 건설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설치한 측량표가 바닥에 설치되어 있다. 눈을 들어 동북쪽을 바라보면 울진원자력발전소의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동쪽으로는 드넓은 동해바다와 죽변항구가 마치 한손에 잡힐 듯 다가든다. 남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구불구불한 긴 해안선을 따라 연안을 접한 낮은 산들이 남으로 달려가고, 저 멀리 아직까지 비행기가 뜨고 내리지 못하는 기성공항 활주로가 일자로 뻗어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예전에 신라시대의 제의와 관련된 산천 체계는 산천의 중요도에 따라서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로 나눠졌는데, 모두 다 국가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 소사에 속한 산천으로 명주(溟州-강원도의 동쪽 중앙에 있던 군, 현 강릉시 일원) 관할에 속했던 산천은 고성의 상악(霜岳-금강산)과, 수성군(간성)의 설악(雪岳), 우진야군(于珍也郡-울진)의 악발((岳髮-발악(髮岳))이 있었다고 전한다. 드넓은 명주군 관내에 소사에 속한 산천이 오직 세 곳뿐이었는데, 울진의 악발산이 금강산, 설악산과 더불어 통일신라시대 이후까지도 국가적으로 제사를 지내던 중요한 산이었다는 점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안일왕산 일대에는 ‘안일왕’과 관련되는 숱한 전설이 시대를 건너뛰어 전해 내려온다. 성의 북쪽에는 큰 굴이 있는데 20여명이 능히 숨어서 생활할 수 있다고도 하고, 굴 안에는 철로 만들어진 대형 가마솥 2개가 있는데 수십 년 전 절벽을 타고 석이(石耳)버섯을 채취하러 밧줄을 타고 내려갔던 주민들이 발견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다. 실직국의 왕(王) 가운데 유일하게 그 이름이 남아서 전해 내려오는 “안일왕”을 울진 지역에서는 “에밀왕”으로 불러 왔는데, 아직도 대다수의 노인들은 “안일왕성”이 아닌 “에밀산성”으로 부르고 있다. 또한 지역의 70~80대 노인들은 어린 아이 적에 울거나 하면 윗대 어른들이 “예 나온다 그쳐라, 예 쳐온다 그쳐라"고 말하며 울음을 달랜 것으로 기억한다. 강릉의 ‘예’ 국이 쳐내려오니까 울음을 그치라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인근 지역에 거주하는 노인들에 의하면 10~2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안일왕산성 안에서 화전민이나 약초꾼들이 집을 짓고 살았는데, 다른 성씨를 가진 사람들은 무서워서 몇 달을 살지 못하고 다들 떠나가는데 유독 김씨 성을 가진 사람들만은 아무 탈 없이 터전을 일구고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김씨 성이 아닌 다른 성씨의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려고 하면 밤새도록 말을 달리고 병장기를 부딪치며 병사들이 싸우고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서 무서움 때문에 버티기가 힘들었다고 전한다. 10~20년 전 마지막으로 안일왕산에서 살다가 울진읍내로 내려온 사람 역시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알려준다. 울진군지, 삼척시지, 삼국사기 등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 이곳 동해안에는 강릉지역의 예국(濊國), 삼척지역의 실직국(悉直國), 울진지역의 파조국(波朝國) 또는 파단국(波但國)이란 군장국가(君長國家)가 공존하고 있었는데, 이들 세 나라를 통칭하여 창해삼국(滄海三國)으로 불렀다고 한다. 창해삼국은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같이 국가의 기틀을 갖춘 나라가 아니었고, 작은 집단이 모여서 한 지역에서 일정한 세력을 형성한 군장국가로서, 그 당시에 한반도 내에는 이런 군장국가가 130여개나 있었다고 전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팔도총도'에 나타나는 `안일왕산'. 울진군 관내에서는 평해의 백암산과 함께 오직 두 곳만 실려 있다 어느 시기에 철기시대를 맞으면서 많은 양의 청동무기와 철제무기를 소유한 이들 창해삼국은 서로 간에 영역확장을 위한 전쟁을 하게 되고, 기원 후 50년경이 되면 마침내 삼척의 실직국이 울진의 파조국을 침략하여 합병하게 된다. 합병한지 10년 후 실직국은 강릉의 예국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고, 당시 실직국을 다스리던 안일왕(安逸王)은 합병한 영토인 울진으로 피난을 내려와서 산성을 쌓고 방비를 하였는데, 이것이 서면 소광리에 위치한 안일왕산성이다. 그러나 힘들여서 안일왕 산성을 쌓고 피신했던 안일왕도 끝내 예국의 추격군에 의해 후퇴를 하게 된다. 안일왕의 죽음과 관련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안일왕산 인근 지역인 서면에는 안일왕과 관련되는 지명들이 많이 남아 있다. 경상북도 지명유래사전에 따르면, 안일왕 산성에서 서쪽으로 바라다 보이는 통고산은 안일왕이 후퇴를 하는 도중에 이 산을 넘으면서 재가 하도 높아서 통곡했다 하여 통고산(通高山)이라 한다.
삿갓봉의 복두괘현(僕頭掛縣-일명 박달재)은 안일왕산성이 함락되자 안일왕이 신하와 옷을 바꿔 입고 도망가다가 이곳에서 복두(머리에 쓰는 모자)를 벗어놓고 샘물을 마시던 중, 적군의 추적이 가까워지자 미처 걸어놓은 복두를 쓰지 못하고 도망간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나는 `안일왕산'.
울진의 진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울진군 서면 왕피리(王避里)는 왕이 피신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고, 병위동(일명 병우동)은 안일왕의 군사가 머물렀던 곳, 포전(飽田)은 안일왕이 피난 당시 군속과 같이 갈증을 풀고 포식한 곳, 임광터(일명 임왕기)는 임금의 옥새를 보관하던 곳, 핏골은 왕이 적에게 붙잡힌 곳, 거리고(巨里庫, 일명 걸부지)는 실직국의 군량미를 저장하는 창고가 있었던 곳, 한천(寒川, 일명 한내)은 피신하던 안일왕이 내를 건널 때 마침 얼음이 녹을 때라서 물이 차다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전해온다. 또한 소광리 장군터(일명 장강이터)는 안일왕의 호위장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는 곳이고, 옥상이(玉山, 일명 옥생이, 옥쌍이)는 안일왕의 옥좌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보부천(寶富川)은 안일왕이 울진의 파조국을 병합하여 산성을 쌓고 머물렀다는 곳이며, 저진터(저근터)는 안일왕이 보부천에 주둔할 때 호위군의 후속부대가 주둔했다는 곳이다. 정작 실직국의 본거지였던 삼척 지역에는 안일왕과 관련된 설화가 빈약한데 반해, 울진지역은 특유의 지형적인 고립성 때문인지 2천여 년 전 영동 남부지역의 중심세력으로 넓은 영토를 소유한 군장국가였던 실직국의 역사적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해 오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울진의 진산(鎭山)으로 기록되어 있는 산, 정상 가까운 곳에서 울진에서 가장 우람하여 으뜸인 대왕소나무를 만나볼 수 있는 곳, 천연기념물인 산양의 배설물을 직접 볼 수 있고 정말 운이 좋다면 산양을 직접 만날 수도 있는 곳, 정상에 올라서서 사방 천지 어디를 둘러보더라도 흉물스럽고 거대한 송전철탑이 눈에 띄지 않는 곳, 2천여 년 전 울진과 삼척을 영토로 활동하던 실직국 안일왕의 치열했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곳. 안일왕산의 압권은 가을이다. 만산이 오색 단풍으로 물들어 있다
그곳이 바로 서면 소광리의 안일왕산이다.
봄이면 봄대로, 여름이면 여름대로, 가을이면 가을대로, 겨울이면 겨울대로, 온갖 종류의 수목과 더불어 대왕 소나무, 녹음, 단풍과 낙엽, 산양, 만산에 덮인 하얀 눈을 볼 수 있는 곳.
아, 안일왕산!
우리산줄기이야기
안일지맥 (安逸枝脈)
낙동정맥 삿갓봉(△1119.1m)에서 東으로 분기하여 안일왕산, 아구산을 거쳐 울진군 울진읍 비래동 논 한가운데 섬처럼 솟은 비래봉산(×20m)을 끝으로 동해 바다로 들어가는 지맥이다. 남으로는 금장지맥과 함께 왕피천을 가두고 북으로는 삼척 가곡천의 울타리가 된다. 지맥에서 이름을 가진 봉우리는 안일왕산(812m), 아구산(653m), 비래봉산(20m) 셋이 있고 금산(388.7m)은 약간 비켜 있다. 안일왕산은 원래 이름없는 봉으로 있다가 2012.10.29. 국토지리원 고시로 옛이름을 되찾았다. 그런 연유로 당초 신산경표 초판에서는 지맥에서 이름을 가진 최고봉인 아구산 이름을 따 아구지맥으로 했으나 안일왕산이 이름을 되찾음으로 해서 안일지맥으로 바꾸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