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 십이령 옛 길
울진 십이령 옛 길
십이령옛길 보부상 주막촌
울진군 두천리에서 봉화군으로 이어지는 고개로 일명 십이령재 또는 십이령티라고도 하는데 보부상들이 넘나들던 고개
십이령이란?
울진군 북면 두천리에서 봉화군 소천면까지 이어지는 열두 고개[바릿재, 평팥, 새재, 느삼밭재, 너불한재, 저진치, 한나무재, 넓재, 고치비재,맷재, 배나들재, 노루재 를 얼컫는다고 한다. 1950년대 중반까지 울진의 흥부장과 울진장,봉화의 내성장과 춘양장을 오가던 장사꾼들이 주로 이용했다고 한다. 2011년 4월 21일 경북 울진군의 오지 마을 소광 2리에 주막이 열렸다. 우리나라 최초로 시행되고 있는 '예약탐방가이드제'를 실현하고 있는 금강소나무숲길 제 1구간의 끝 마을이다.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 마을에서 직접 빚은 막걸리와 특산물인 손부두 등으로 잔치를 열었다.
울진내성행방불망비
울진군에서 봉화군 소천 지역까지에는 12고개[嶺]가 있어서 보통 십이령 또는 열두재로 칭해지고 있으며, 행상들은 3일이 걸려서 이 12고개를 넘어 소천 지역에 도달할 수 있었다. 울진 지역 어디에서 출발하든지 간에 바릿재에 오르기 직전에 있는 두천리에서 일단 머물 수밖에 없어서 두천리는 주막과 마방(馬房)으로 흥했다고 한다.
[건립경위]울진 내성행상불망비는 조선 말기 울진과 봉화를 오가며 어류·소금·해조류 등을 쪽지게에 지고 가서 곡식·의류·약품·잡화 등과 물물 교환하며 상행위를 하던 상인들이 그들의 상거래에 많은 도움을 준, 당시 봉화군 봉화읍 내성리에 살고 있던 봉화 사람 접장 정한조와 안동 사람 반수 권재만의 공을 잊지 못하여 그 은공을 기리고자 세운 불망비이다. 이러한 이유로 북면 두천리 지역의 주민들은 선질꾼비라고도 한다.
[위치]경북 울진군 북면 두천리 206-1번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십이령으로 넘어가는 하천 입구에 세워져 있다. 울진읍 읍내에서 지방도 917호선을 타고 북면 방향으로 가다가 하당리 삼거리에서 북면 면사무소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약 2.5㎞를 직진하면 도착한다.
[형태]권재만 비의 크기는 높이 94.5㎝, 폭 24.8㎝, 두께 2.1㎝이며, 무게는 29.4㎏이다. 정한조 비의 크기는 높이 93.3㎝, 폭 23.1㎝, 두께 2.2㎝이며, 무게는 26.4㎏이다. 울진 내성행상불망비는 비신(碑身)과 비수(碑首)를 하나로 주조하였으며, 비수의 문양과 비신의 글씨는 앞면에만 양각으로 주조하였다. 즉 비수에는 반원을 그리고 그 위로 점을 여러 개 돌아가며 표시를 하였는데, 이는 태양이 빛을 발하는 문양인 일휘문(日暉紋)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재질은 철로 이는 당시 울진군 북면 하당리에 철광산과 용광로가 있어 석비보다 제작이 쉬웠기 때문으로 추정하기도하나, 철은 다른 재질에 비해 강하고 영원하다는 믿음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돌보다 철로 만든 것으로 판단된다.
[금석문]비신 가운데에는 세로로 “내성행상접장정한조불망비(乃城行商接長鄭漢祚不忘碑)”와 “내성행상반수권재만불망비(乃城行商班首權在萬不忘碑)”라는 명문이 각각 양각되어 있다.
[현황]울진 내성행상불망비는 1995년 6월 30일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0호로 지정되었으며, 1999년에 지금의 보호각을 세우고 2006년에 보존처리를 하였다.
[의의와 평가]조선 말기 울진 지역 상품 유통 경로와 장시(場市)의 이해에 상당한 도움을 주는 역사적 자료로서 가치가 있으며, 보부상들의 역사적 상황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심천범. 강릉최씨 효자비각
북면 두천1리 말래마을에는 효자 심천범과 효부 강릉최씨 부부의 효자비가 있다. 말래 마을이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바릿재 입구 언덕 위에 있는 이 정려각은 부부의 효행을 함께 기리므로 ‘쌍효각’이라 부른다. 붉은색 바탕의 액자에는「孝子 贈童蒙敎官朝奉大夫沈天範. 孝婦贈令人江陵崔氏之閭」이라 적혀 있고, 비각 안에는 소박한 모양의 석비 1점이 있다. 효자 심천범 내외는 이곳 두천리 사람으로 중풍으로 투병 중인 홀아버지를 50여년간 한결같이 간병하였고, 1822년 임오년 돌림병에 걸린 시아버지를 갖은 정성으로 낫게 한 공적이 주위의 귀감이 되어 1890년 고종 27년에 정려를 명 받았다. 효자 심천범은 아버지가 중풍과 신경통으로 두 어깨를 쓰지 못하여 일어나지도 못하고 수저도 들지 못하였으나, 매 식사 때마다 부축하여 일으켜 수발하였고 매일 저녁 잠들기 전에는 자리를 뜨지 아니하고 50년을 하루같이 극진이 봉양하여 100수를 누리게 하였다. 또한 부인 최씨도 중풍으로 수족이 불편한 시아버지에게 세수는 물론 머리를 매일 벗겨 주는가 하면 1822년 임오년에 온나라가 돌림병에 걸려 많은 사람이 죽어갈 때, 시아버지도 병에 걸렸으나 지극한 기도와 정성으로 병이 완쾌되어 주변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어느 때는 병중의 시아버지가 입맛을 잃고 꿩고기가 먹고 싶다고 말하자, 국법으로 꿩을 잡지 못하게 한 늦은 봄이라 한숨을 쉬면서, 마당의 개에게「내가 너를 기르니 너도 내가 원하는 꿩을 한 마리 잡아오너라」하고 푸념삼아 말했는데 개가 알아듣고 꿩을 3마리나 잡아와 시아버지를 봉양함으로써 짐승까지도 효행에 놀랐다고 한다. 그후에도 여러 번 이와 같은 일이 있었고, 돌아가신 후에도 살아 생전처럼 평소에 좋아하시던 음식을 차려놓고 생시와 같이 상식하였다 한다. 이러한 沈天範 내외의 극진한 효행은 인근 고을에 까지 널리 퍼저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듣게 되었고, 1854년(철종5년) 2월 울진의 유림인 송붕조, 전학수, 남석룡 등 유생들의 건의로 당국에 알려졌다고 한다.[출처: 울진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