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지도

영덕 봉화산(대소산), 망월봉, 등급봉, 상대산

꼴통 도요새 2019. 3. 20. 14:29

영덕 봉화산(대소산), 망월봉, 등급봉, 상대산

 

1. 산행지: 봉화산(대소산.278.2m), 망월봉(225.5m), 등급봉(162m), 상대산(183.7m)

2. 위치: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8. 산행코스: 영덕대게로(영덕군 영해면 사진리 산2)블루로드 들머리봉화산 정상망월봉 정상구름다리목은이색기념관 갈림길등급봉 정상()루샘영덕연수원상대산 정상(관어대)대진해수욕장 주차장

9. 특징:

대소산

'대게의 고장' 경북 영덕에는 에메랄드 빛 청정 해안을 품은 대소산(286m)이 있다. 영덕군 축산면과 영해면을 잇는 해안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동해를 따라 능선이 이어진 아름다운 산이다. 숨을 깔딱거리며 올라가는 험산이 아니라 아기자기한 능선을 오르내리며 명상하듯 걸을 수 있는 산이다. 정상에 봉수대(경북 기념물 제37)가 있어 봉화산이라고도 불린다. 조선시대에는 영덕 축산포 방면의 상황을 서울 남산까지 전했다고 한다. 봉수대에 서면 동해가 한눈에 들어오고 축산항의 어촌마을과 방파제가 내려다보인다. 축산항으로 부는 서풍을 막아주는 역할도 했단다. 이 산을 따라가면 영해면의 상대산(183.7m)으로 이어진다. 상대산 정상에 오르면 동쪽으로 대진해수욕장과 고래불해수욕장이 속한 동해가 펼쳐진다. 고려 말의 학자인 목은 이색이 바다의 고기를 볼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로 상대산 서쪽 절벽을 관어대라 불렀다고 한다. 이색을 비롯해 조선 초 성리학자 김종직과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인인 원천석이 '관어대'라는 제목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주변볼거리

이색선생 유적지

산행지와 가까운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전통마을을 들러 볼 만하다. 괴시리 전통마을은 200년 된 고옥이 30여 동이나 즐비한 영양 남씨 집성촌으로 마을 전면에는 영해평야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마을을 아늑하게 품고 있는 산으로 올라가면 목은 이색 선생의 생가 터와 기념관이 있다. 이색 선생은 고려 말 성리학자로 충절이 높았던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등과 함께 고려 삼은이라 불린 인물이다. 20세에 아버지를 따라 원나라에서 유학했으며 삼은이 모여 원나라에서 들여온 성리학을 연구해 기초를 확립했다. 고려가 망하자 끝까지 지조를 지키고 후진을 육성했다. 목은이색기념관에는 목은 선생의 자료가 소장돼 있으며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기념관 옆에 생가가 있었지만 지금은 터만 남았고 생가와 기념관 사이에 서당으로 사용됐던 옆집이 남아 있다. 목은 선생은 이곳에서 태어나 일찍이 고향을 떠났으나 평생 고향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에서부터 목은 이색 산책로가 시작된다. 

신돌식장군 유적지

1. 신돌석 장군 생가
 조선 말기에 기울어가는 나라를 구하려고 일어선 의병장들은 많지만 신돌석 장군(1878~1908)처럼 약관의 나이에 평민으로서 의병대장이 되어 활약한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신돌석 장군은 을사조약 다음해인 1906년에 의병을 일으켜 영해, 영덕, 평해에서부터 삼척, 양양, 강릉, 원주, 안동, 영양 등 경북 북동부와 강원 도 일대까지 신출귀몰하며 왜군에 저항했던 의병장이다. 이 초가집은 '태백산 호랑이'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큰 활약을 벌인 장군의 구국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5년에 복원되었다. 학생들의 문화 유적 탐방 코스로 사랑받고 있다.

2. 신돌석 장군 유적지
 신돌석장군에 대한 각종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수집, 보전, 전시하여 장군의 넋을 기리고 항일정신을 되새겨보는 역사교육의 전당으로, 1999년 11월 18일 개관하게 되었다. 이 유적지에는 충의사, 동재, 서재, 외삼문, 내삼문, 기념관, 관리사무소, 주차장, 화장실 등의 주요시설이 있다.

3. 신돌석 장군 약력
 본관은 평산(平山), 자(字)는 순경(蕣卿)이고, 호(號)는 장산(壯山) 본명은 태호(泰鎬)이다. 이명(異名)은 돌석(乭石), 태홍(泰洪), 태을(泰乙), 대호(大浩)이며, 태백산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878년(고종 5년) 11월 3일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당시는 영해군 남면 복평리)에서 출생하여 퇴계(退係)의 방계인 육이당(六怡堂)이중립(李中立)에게 학문을 배웠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으로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10여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영해 의병진을 창군, 활약하다 1896년 고종황제의 명으로 해산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일제에 의해 강제체결되어,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1906년 3월 장군도 영릉의병진(暎陵義兵陳)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다시 창군하니 각처에서 모여든 동지가 300명이 넘었다 한다. 그 때 장군의 나이 29세였다. 장군은 최고 30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경상남북도, 강원도, 충청도에 걸친 넓은 지역에서 항쟁한 의병장이기도 했으나, 일월산, 백암산, 대둔산 등지에 요새를 두고 소수정예로 적을 섬멸하는 게릴라전에도 능했다.1907년 이인영(李麟榮) 13도창의총대장으로부터 경상남북도를 합친 교남창의대장으로 추대되어 서울 공략전에 참여했으나 평민이란 이유로 배제되었다. 1908년 11월 18일 엄동설한을 앞두고 굳게 믿었던 부하의 손에 무참히 살해되어 31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으며, 1971년 장군의 유해가 국립묘지유공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1995년 도곡리에 생가가 복원되었고 1999년 장군의 혼이 어린 자리에 장군의 항일 정신을 길이 후대에 남기고 빛내기 위해 성역화 공원과 기념관이 세워졌다.[출처/ 다음백과]

우리산줄기이야기

낙동국사용당단맥

낙동국동당지맥 575.3봉에서 동북방향으로 분기하여 영덕군 영해면과 축산면의 경계를 따라 492-꽃밭임도(170, 5)-223.9-龍堂山(182.3, 4.4/9.4)-가마실재(110)-영덕병원 7번국도 목골재(70, 4.1/13.5)-望月峰(210)-신너리임도(150)-밭내미도로(150, 4.5/17.9)-대진마을도로(50, 2.5/20.4)-上臺山(183.3) 지나 창수면 백청리 낙동정맥 쉰섬재 부근이 발원지인 송천천이 바닷물이 되는 영해면 대진리 대진해수욕장(0, 1.3/21.7)에서 끝이나는 약21.7km의 산줄기를 말한다.[출처/ 우리산줄기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