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영산 석빙고
겨울에 얼음을 채취, 저장하였다가 여름에 사용하기 때문에 얼음이 녹지 않게 하기 위하여 지하에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기록에 의하면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하는 일은 신라시대부터 있었으며, 이 일을 맡은 관직을 빙고전(氷庫典)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 축조된 빙고는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없으며, 고려시대의 유구(遺構)도 발견, 조사된 바 없다.
조선시대에는 건국 초기부터 장빙제도(藏氷制度)가 있어 말기인 고종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빙고(氷庫)라는 직제를 두어 5품관(五品官)인 제조(提調) 이하의 많은 관원을 두어 관리하였다. 현존하는 유구를 중심으로 볼 때 빙고는 대개 성 밖의, 강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것은 강에 얼어붙은 얼음을 채취하여 운반하기 쉬운 곳에 창고를 두었기 때문이다. 가령 동빙고(東氷庫)와 서빙고(西氷庫)는 서울의 한강 북쪽연안에 설치되었던 얼음창고이다. 그러나 이들은 석조가 아닌 목조로 된 빙고였기 때문에 내구성이 적어서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빙고의 축조방법은 대개 일정하며, 규모 또한 대동소이하다. 보통 지하에 깊게 굴을 파고 안쪽벽을 석재로 쌓아올리고, 내부의 밑바닥은 장방형으로 경사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배수구를 설치하여 빙고 안의 녹은 물을 내보내고 있다. 천장은 잘 다듬은 돌로 짜아올린 홍예(虹霓 : 무지개모양의 문)를 4, 5개씩 연결하여 궁륭형(穹窿形)을 이루었고, 그 사이마다 환기구멍을 마련하여 공기가 유통되게 하였다.
외부는 홍예천장 위로 흙을 덮고 잔디를 입혔는데, 경주석빙고의 경우 환기구멍에 벽체를 세우고 뚜껑을 덮어 빗물이나 직사광선이 들어갈 수 없게 하였다. 대체적으로 석빙고의 외부모습이 큼직한 무덤처럼 보이는 것은 봉토 위에 잔디를 입혔기 때문이다.
현재 석빙고에는 대부분 그 옆에 축조연기(築造緣記)를 새긴 석비(石碑)가 건립되어 있어 축조 연대 및 관계자를 알 수 있는데, 대개가 18세기초 영조대에 축조되었다.
대표적인 예로는 경주석빙고(慶州石氷庫, 보물 제66호)를 비롯하여 안동석빙고(安東石氷庫, 보물 제305호)·창녕석빙고(昌寧石氷庫, 보물 제310호)·청도석빙고(淸道石氷庫, 보물 제323호)·현풍석빙고(玄風石氷庫, 보물 제673호)·영산석빙고(靈山石氷庫, 보물 제1739호) 등이 있다.
창녕 영산 석빙고
사적 제169호. 지정면적 3,769㎡. 빙실(氷室) 길이 10m, 높이 3.35m. 영산 만년교쪽으로 흐르는 작은 하천의 남쪽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작은 하천의 상류에는 제방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었기에, 현재는 개울물이 대체로 말라 있다. 얼음방인 빙실의 바닥은 경사져 있는데, 얼음이 녹은 물은 경사를 따라 배수구를 통하여 개울로 흘러나간다. 이러한 구조는 경상도 지방에 건립된 석빙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형 이용 방식이다.
얼음방으로 들어가는 작은 입구는 동쪽으로 나 있다. 기둥돌 위에 이맛돌을 얹고 위아래에 문지도리[門樞] 홈을 판 모습이어서 문을 달았음을 알 수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디딤돌을 딛고서 얼음방 바닥으로 내려갈 수 있으며, 바닥에는 잔돌이 깔려 있지만 배수로의 흔적은 없다. 얼음방은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 3개를 틀어올린 다음, 홍예와 홍예 사이에 긴 돌을 걸쳐 천장을 구성한 모습이다. 천장 위에는 흙을 쌓아 덮었는데, 봉토 사이로 2곳의 환기 구멍이 설치되어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하권의 영산창고(靈山倉庫)조에는 영산현감 윤이일(尹彛逸)이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다. 다만 경상도 지방의 여느 석빙고보다 규모가 작으므로, 18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