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지도

영동 곤천산[坤天山]

꼴통 도요새 2017. 1. 11. 09:21

곤천산[坤天山]

1. 위치

곤천산(坤天山: 1,031m)은 충북 영동군 매곡면 강진리 부락 정남방 4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황학산(1,111m: 충북 영동군에서는 黃鶴山, 경북 김천시에서는 黃岳山이라 칭함) 서북방 1.5지점에 자리하고 있음

2. 유래

곤천산 지명의 유래에 대하여는 황계지, 황간읍지, 동국여지승람 등 각종 고서를 조사하여 보았으나 정확한 지명의 유래에 대하여는 확인 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곤천산은 건천계곡(乾川溪谷)에 위치하며, 곤천산 아래 건천계곡에 건천사(乾川寺)라는 사찰이 있었다는 각종 문헌 기록이 남아 있어 발음의 유사성을 확인할 수 있으나, 이것이 곤천(坤天)과 건천(乾川)이라는 지명의 관련성에 대하여는 명확한 답변이 어렵습니다.


3. 산행코스: 영동군 매곡면 강진리 부락에서 건천계곡을 따라 곤천산으로 산행하는 왕복 8코스가 있으며, 황학산 정상을 경유하여 곤천산으로 산행하는 코스가 있으니 황학산 산행코스는 각종 등산자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곤천산(목판표식=1032m)

*황악산(H=표지석=삼각점=1111.4m)

 

해평교--(54)--지능선에오름--(28)--*삼각점724m--(60)--*곤천산--(32)--능선(삼거리)--(*황악산=왕복52분소요)--(42)--*삼각점870m--(47)--물탱크--(16)--해평교(원위치)

 

*산행=실 산행시간(황악산=왕복(포함)6시간35분소요(휴식=64분포함)

*산행(*곤천산()산행할 경우실 산행시간=1704시간10분소요(휴식 없고)

*능선(삼거리)에서---북쪽능선산행은--*꼬리표 확인 결과---대부분=능선으로 잠시가다---계곡 길(이 길도 희미한 길)로 산행되는 것 같다 --*나는=능선(삼거리에서)---북쪽 능선 길 찾으려고 오르내림을 한참 하다가(42분만에---북쪽능선에 오르게 되고~~ 한참 산행한 뒤 알게 된(산악회=꼬리표가3개팀 만볼 수 있게 되었다) (*참고=여러 사람이 산행할 경우에는---북쪽 능선 찾는 것이 어려우므로=*황악산에서(날머리 정하는 것이~~)[11;07]해평교(도로=삼거리)--우측 좁은 포장 길 따라~~ 물레방아(이쁜 집)지나서~~ [11;13]삼거리()--오르막길가다~~ 잠시 후(군부대=철조망울타리)--울타리따라서(오르막) [11;44]철조망 울타리와(이별) [12;01]희미(삼거리)=지능선에 올라--() --(*지금부터=곤천산까지갈림길 없이곧은 오르막 [12;29]*삼각점=724m--(17분휴식) [12;46]출발 [13;46]*곤천산 [14;10]안부(*영축사 방향=계곡길 탈출로 보이지 않고~~)[14;18]능선(삼거리)--(*나는 이곳에서=황악산 갔다 오기로~~) [14;43]주능선(삼거리)=대간길과 마주함--(우측=H삼거리(직지사갈림길=2.9 곤천산=1.8 바람재=2.3) [14;45]*황악산다시 뒤돌아~~ [15;10]능선=삼거리(원위치)---(*북쪽 능선 찾으려고---42분간 오르내림을 반복한 끝에~~) [15;52]북쪽능선=산행뚜렷한 능선 길~~ [16;08](*PET맥주병)--잠시후=능선 길에=감벌나무가지 널려져 있고~~(5분 휴식) [16;13]출발 [16;39]*삼각점=870m한참 후=하산 길이 여러 갈래로~[17;26]물탱크(세멘도로)--길따라~삼거리(직진) [17;42]해평교(원위치)도로에서1km 들어선 지점해평교(도로삼거리)-*우측(다목적창고=널븐주차장시설이~~) 좁은 포장길따라~(예쁜=물레방아집지나서~~)나는 이곳 삼거리에서우측으로산행---한참 후=(군부대 철조망 울타리 보이는 곳으로~울타리 따라(오르막~~)해평교에서--37분만에--부대울타리와이별--숲길산행이시작되고~부대철조망울타리와이별 하고난 후에=15분만에---희미(지능선에올라~~이제부터는 길게쭉 뻗은갈림길 없이곤천산까지~~산행시작한지=82분만에 삼각점에 도착잠시 휴식한뒤다시출발~삼각점에서가끔씩 나타나는 암능을 지나면서~ 60분만에(정상에도착~)곤천산에서출발하여~안부2군데을 지나면서영축사(방향)계곡길로 탈출하는 족적길은볼수가업고~곤천산에서32분만에=능선(삼거리)꼬리표가제법만이붙터잇는곳을볼수가잇는데~~일기장에서적힌대로모두가짤븐가지능선으로산행하다(길도희미한곳으로~계곡으로 하산한 것같다*내가42분간을오르내림을반복하면서---나중에=북쪽(뚜렷한 능선 길을 찾고서야~~느낀 점)*나는욕심내어황악산갓다오기로(왕복=52분소요---능선(삼거리에서)다시뒤돌아능선삼거리로~~오르내림을반복하며우측 높은 능선에 올라서니--비교적(뚜렷한--북쪽능선길이~~꼬리표확인한결과=3?만올바른북쪽능선으로하산한것을~~북쪽능선산행하면서PET맥주병지나면서--한참후=감벌나무가지널부러져잇는곳도지나고~~능선=삼거리에서---42분만에(*삼각점에도착~한참 후=하산길이(희미하게여러갈래길이~~)삼각점에서--47분만에=물탱크(세멘길에도착~~)--길따라서~오늘산행=6시간35분으로산행마감하고~(황악산=왕복52분포함---능선(삼거리에서42분알바포함)-곤천산만산행할경우는약4시간10분으로마감하지만~북쪽능선길찾는것이~~

▲산행코스
임산 상촌중학교(10:42 좌측) - 경희대 연습림관리소(10:48 좌측) - 삼각점(377.4m 11:22) - 바위 너덜지대(11:48)-
무명봉1(12:24) - 무명봉2(12:47) - 무명봉3(13:14) - 무명봉4(13:49 곤천산1032m) - 무명봉5(13:52) -무명봉6(14:01)-
황악산(14:10 1111m) - 휴식(14:22) - h장(14:24) - 여시골(15:00) - 어촌 저수지(15:35) - 어촌리 팽나무 보호수(16:05)-
천덕사거리(16:25,직진) - 사야마을(16:37) - 마을 끝자락 우측시멘트도로(16:45) - 궤방령 등산로 합수(17:28) - 무명봉
(17:43) - 가성산(17:51,710m) - 장군봉(18:47) - h장(18:51) - 눌의산(19:02 삼각점 743.3m) - h장(19:06) - h장(19:08)-
은편마을(20:00) - 추풍령 시내버스 터미널(20:12)     [김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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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영동군 오지 안내 http://tour.yd21.go.kr/intro/intro_07.html ]

# 영동군 매곡면 용촌마을 소나무 숲[매곡면 홈피]

우리 마을은 서기(西紀) 1400년(年)경 인동장씨(仁同張氏)와 단양이씨(丹陽李氏)가 심원천(深源川)과 천덕천(千德川)이 맞닿는 젖들 끝 용두봉(龍頭峯) 밑에 정착(定着)하여 용계촌(龍溪村)으로 불리어 졌다고 한다. 

그후 밀양박씨(密陽朴氏)와 영일정씨(迎日鄭氏) 안동권씨(安東權氏) 울산오씨(蔚山吳氏) 전주이씨(全州李氏) 등이 이주(移住)하여 마을을 형성(形成)하였다. 6.25 사변후(事變後) 난민(難民) 정착촌(定着村)으로 마을이 번창(繁昌)하게 되었으며 각(各) 성씨(姓氏)가 모여 80여(餘) 가구(家口)를 이루었다. 

서기(西紀) 1968년(年) 행정구역개편(行政區域改編)으로 어촌리(漁村里)에서 용촌리(龍村里)로 분리(分離)되었다. 동(東)으로는 옛날에 방(榜)을 걸었다는 괘방령(掛榜嶺)이 있으며 군사적(軍事的) 요충지(要衝地)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인 1592년(年) 10월초(月初) 현(現) 김릉군(金陵郡) 지례(知禮) 부상고개 등지에서 왜적(倭賊)을 물리쳐 큰 공(功)을 세운 황간의병장(黃澗義兵將) 박이용공(朴以龍公)의 공적비(功績碑)가 세워져 있으며 서(西)로는 곤천산(坤川山) 깊은 골에는 영축사가 있으며 남(南)으로는 소백산맥(小白山脈)의 주령(主嶺)이 지나는 곳으로 황악산이 있다. 

정상(頂上)은 천백십일미터 고지(高地)로 중터에는 임진왜란시(壬辰倭亂時) 정병(精兵) 양성(養成)을 위해 성(城)을 쌓아 천여명(千餘名)이 피난(避難)을 하여 덕(德)을 입었다는 천인대(千人臺)가 있어 천덕산(千德山)이라고도 불리어진다. 북(北)으로는 천덕국민학교(千德國民學校)가 있어 많은 인재(人才)를 배출(輩出)하고 동남(東南)으로는 심원산곡(深源山谷)에 49만톤을 저수(貯水)할 수 있는 어촌저수지(漁村貯水池)가 설치(設置)되어 경지정리(耕地整理) 완료(完了)로 영농(營農)의 기계화로 편리하여졌다. 

마을 입구(入口)에는 천덕(千德)과 심원산곡(深源山谷)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88만톤의 저수량(貯水量)을 갖고 있는 강진 저수지(貯水池)로 합류(合流)되어 지역(地域)의 풍요로운 젖줄을 이루며 많은 물에만 서식하는 빙어(氷魚)가 많아 산란철이면 수많은 강태공이 즐겨 찾는 곳이다. 

동서(東西)로 마을을 관통(貫通)하는 잘 포장(鋪裝)된 도로(道路)는 인적(人的) 물적(物的) 수송을 원활하게 하고 있으나 옛 선비들이 말방울 소리를 울리면서 한양으로 가던 큰 길이 강진 저수지(貯水池) 물 속에 잠긴 채 우리의 발길을 迂廻시키는 아쉬움을 남긴다. 

우리 마을은 매화락지(梅花樂地)인 매화(梅花)들 끝에 자리잡고 있으며 상부상조(相扶相助)로 화합(和合)하고 위로는 어른 공경(恭敬)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미풍양속(美風良俗)의 정신(精神)을 살려 마을 번영(繁榮)을 영원(永遠)히 기리고자 이 비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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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san2000]

택리지의 팔도총론(八道總論) 경상도 편을 보면 태백산 왼쪽에서 나온 하나의 큰 지맥은 소백(小白),작성(鵲城),
주흘(主屹),희양(曦陽), 청화(靑華), 속리(俗離), 황악(黃岳), 덕유(德裕), 지리(智異) 등
산이 된 다음  남해(南海)
가에서 그쳤는데,  두 지역 사이의 기름진 들판이  천리이다라고  씌어있다.

이와 같이 황악산은 소백산맥의 허리 부분이며, 경상도와 충청도를 가르는 분수령을 이루는 산이다.
이중환(李重煥)은 복거총론(卜居總論)의 山水편에서도 이 지역에 언급하고 있다. '태백산에서 령(嶺)의 등성이가
좌우로 갈라져서  왼편 지맥은 동해가를 따라 내려갔고 오른쪽 지맥
으로 소백산에서 남쪽을 내려 간 것은 태백산
과 비교할 바가 못된다.  이상은  비록 만첩산중이나 산
등성이가 이어졌다 끊어졌다 하고, 자주 끊어져서 큰 령
(嶺)이 넷이고 작은 령(嶺)이 일곱이나 된다.'
는 애기는 황악산을 포함한 소백산맥의 특징을 잘 말해준다.

소백산맥은 1000m급 이상의 산이 여럿 이어져있으나 그 산들의 이음새가 조밀하지 못하고 느슨하여 山흐름이
자주 끊어져 많은 고개를 이루고 있다. 그 대표적인 령(嶺)이 열한 개 인데, 택리지는
그 령(嶺)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소백산 아래쪽에 죽령(竹嶺)이 큰 령이고, 그 아래쪽에 천주, 화원의 적은 령이 있다. 주흘산 아래의 조령(鳥嶺)이
큰 령이고, 령 아래쪽에 양산(陽山), 율치(栗峙)가 작은 령이다. 속리산 아래에 있는 화
령(火嶺)과 추풍령(秋風嶺)과
황악산 남쪽에 있는 무풍령(舞豊嶺)이 작은 령이고, 덕유산 남쪽에 있
는 육십령(六十嶺), 팔랑치(八良峙)가 큰 령이
며, 여기를 지나서 지리산이 되었다. 모두 남북으로 통
하는 길이며, 작은 령이라 하는 것은 평지에 지나간 산맥이다.

그중에서 속리산과 덕유산은 갈림새와
주름살이 더구나 많다.'는  택리지의 내용처럼 황악산은 소백산맥의 열한 개
고개 중 작은 령에 속하
는 추풍령과 무풍령 사이에 솟아난 해발 1111m의 산이다.

구름도 쉬어가고 바람도 자고 간다는 추풍령은  충청도와 영남지방을 잇는 고갯마루로  
그 바람만큼이나 많은 사연을 지니고 있다.


    끝없이 가는 길
    들국화 피는 길
    山이라 언덕마다 갈꽃 펄펄 날리는 길
 
    오늘은 가을바람 안고
    秋風嶺을 넘는다.

    大小白 내린 줄기 四大嶺 七小嶺이
    北에는 새재 속리
    南에는 지리 운봉
    나 혼자 휘파람을 불며
    추풍령을 넘는다.

    鳳臺山(봉대산) 長橋山(장교산)은 茂朱(무주)서 내리는 물
    黃岳山(황악산) 물을 만나 黃澗(황간)을 감아 돌고
    石川을 받아 안고서 山羊巖(산양암)으로 빠진다.
 
    靑山을 지나가며 생각나는 이 있다.
    信巴大師(신파대사)
    乘崖先生(승애선생)
    儒佛(우불) 兄弟(형제) 그려 보며
    하 좋은 黃靑 山水에 해 지는 줄 모른다.
   
    黃澗(황간)이 몇굽이냐
    靑山도 지나섰다.
    해 다 저문 날을
    또 어디로 가는 길가
    俗離山(속리산) 三淸洞(삼청동)으로
    물소리 들으러 간다.


1954년 11월 추풍령을 홀로 넘으며 鷺山(노산)의 詩精(시정)이다.
한반도의 등줄을 이룬 太白은 小白의 가지로 남원의 중원에 과감하게 포석했다. 그 小白은 忠淸(충청)과 慶尙
(경상)을 겹으로 끊었으며, 열한 개의 고개로  숨통을 터 놓았으며,  그 한가운데 남한의 정복판에 황악산은  
우뚝하니 솟아 있다.

이 山은 북서와 남동으로 이어지는 분수령으로 자연지리적인 경계를 주어,이는 인문지리적인 경계가되기도
했다. 그 북서의 충청지방의 산천은 평평하고 예쁘며, 서울 남쪽에 가까운 위치여서 사대부들이 모여 사는곳이
되었다.  그리고  여러 대(代)로 서울에서 살았던 이들이  이 지방에 전답과 주택을 마련하여서 생활의 근본이
되는 곳으로 만들지 않은 곳이 없고,  또 서울과 가까와서 풍속에 심한 차이가 없으므로 터를 고르면 가장 살만
하다고 선인들은 애기했다.

남동의 경상도 지방은 지리가 가장 아름다우며, 이 지방 북쪽에는 太白山이 있는데, 감여가(堪與家:음양오행설
에 근거한  풍수설에 의하여 절터의 좋고 나쁨을 가리는 사람을 말함)는  하늘에  치솟은 水星(수성)형국이라
한다.

황악산은 옛부터 학(鶴)이 많이 찿아와 일명 황학산(黃鶴山)으로도 불린다.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나 경상도의 김천(金泉)쪽에서 접근이 용이하고, 또 동쪽 산기슭에 있는 거찰 직지사의 영향으로 김천의
황악산이라는 이미지가 비교적 강하게 심겨져 있다.

이 산을 개괄적으로 보면 피라밋형으로 세 개의 큰 능선과 사면을 가지고 있다. 그 세 능은 북서,북동,정남방향
으로 발달되어 있다. 북서방향의 지능은 주봉(主峰)에서 10리(4Km) 더 나아가서 곤천산(坤天山)을 이룬 후,
충청도 영동군 상촌면으로 들어가 평지로 누워버린다.


북동능은 운수봉, 여시골산, 괘방령, 추풍령으로 이어져 멀리 太白을 향하게 된다. 남능이 가장 뚜렸한 산세를
이루며,산의 흐름이 가일층 급해진다. 바람재, 우두령(牛頭嶺)에서 일단 산세를 낮춘 다음삼도봉(三道峰), 석기
봉(石奇峰), 민주지산으로 뻗어 나아간다.


북동능과 남동능의 분수령을 따라 충북과 경북이 나누어지며, 민주지산에서는 충북과 전북이 갈라진다.  이
남능의 흐름은 덕유산,  가야산,  매화산, 그리고 멀리 지리산으로 이어진다. 북서능과 북동능 사이의 사면,
즉 황악산의 북사면은 완경사를 이루며 이 산쪽은 충북 영동군 매곡면에 속한다.


북서능과 남능 사이의 西사면은 급경사를 보이며 재빨리 영동군 상촌면을 이룬다. 정상에서 불과 3km 남짓
서쪽아래에 지동마라는 마을이 있고, 그 아래로 세막골, 가경동, 점마가 있고, 이러한 마을을이룬 계곡은
궁촌리(弓村里)로 이어진다.

북동능과 남능 사이를 이룬 황악산의 동사면은 능여계곡을 중심으로  계곡과 능선이 부채살  펼친 듯 방사선
상의 山주름을 이루고 있다. 경사도 비교적 급한편이며, 운수봉, 신선봉, 비로봉, 형제봉, 망월봉이 부체꼴
조갑지 모양으로 직지사가 있는  능여계곡을 향해  계곡과 능선을 한 곳으로 흘러내리고있다. 황악산의 모든
명소와 고적은 이 동사면의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접근도 역시 가장 용이하다.

황악산 관광및 등산의 기점이 되며, 황악산의 정기가 모인 곳이다. 신선봉, 형제봉,  망월봉에서 흘러내린
작은 골들이 모여 내원계곡을 이루었고, 백운봉, 운수봉에서 내린 골들은 운수게곡을 이루었다. 이 운수계곡
과 내원게곡이 합쳐져 능여계곡을 이뤄 김천으로 빠진다.이 능여(能如)계곡의 초입에 직지사가 있다.
이 절은 신라불법(新羅佛法)의 초전자(初傳者)인 아도(阿道)가 창건했다 한다.
그 후 고려 태조 19년(서기 936년)에 능여대사가 중건했다고...

직지(稙指)라는 사명(寺名)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稙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조사어록)祖師語錄에 근거한
듯하며 아도(阿道)화상이 절을 창건할 때  손가락 끝으로 절터를 지적하였다 하여 얻은 이름이라고도 전해
진다.

    어둡고 어지러워
    앞 길이 漠漠한데
    어디로 가오리까
    눌 따라 가오리까
    우리 님 손가락 끝만
    바라보고 갑니다.

노산은 능여의 직지사의(直指沙義)를 깨쳐 풀었다.
능여의 손가락 끝에 핀 불교의 도량은 250동(棟)의 대사원을 이룩했으나 인진란 때 소실되고, 일주문,사천
왕문, 비로전 3동만 남았었다. 이후 원조 35년(1602년)부터 70년간에 걸쳐 중건되었으며, 오록원(吳錄園)
스님이 1966년부터 건물을 복원 중수하여 11동을 신축하고 10동을 이건(移建), 10동을 보건하는 대역사를
1982년에 마무리지어 직지사는  면모를 새로이 했다.  이 직지사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8기의 보물이 있다. 

 

     금동육각사리함 .......국보   208호
     대웅전 삼존불 탱화 ..보물 제670호
     대웅전앞 3층석탑 ....보물 제606호
     비로전앞 3층석탑 ....보물 제607호
     석조약사여래좌상 ....보물 제319호
     한천사 출토 금동자물쇠....보물 제1141호
     청풍로 앞 삼층석탑...보물 제1186호
     직지사 대웅전......... 경북 유형문화재 215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