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개국공신(高麗開國功臣) 장절공(壯節公) 신숭겸장군
개설
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신능산(申能山). 평산(平山) 신씨(申氏)의 시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라도 곡성현(谷城縣) 출신으로 태조(太祖)가 평산에서 사성(賜姓)하였다고 하고, 『고려사』열전(列傳)에는 광해주(光海州: 지금의 강원도 춘천) 사람이라 하였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춘천도호부(春川都護府) 인물조(人物條)에 그의 이름이 실려 있으며, 또한 그의 묘가 춘천에 있는 것 등으로 보아, 본래 곡성 출신으로 뒤에 춘천에 옮겨와서 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생애 및 활동사항
몸집이 장대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나 궁예(弓裔) 말년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복지겸(卜智謙)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해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에 봉해졌다.
태조 즉위 후 7, 8년 동안 소강상태였던 후백제와의 긴장관계는 견훤(甄萱)이 신라를 공격함으로써 악화되었다. 927년견훤이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를 습격하고, 신라를 공격해 경애왕(景哀王)을 죽이고 갖은 만행과 약탈을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는 크게 분개해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조제(弔祭)하는 동시에 친히 정기(精騎) 5천을 거느리고 대구의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그러나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태조가 위급하게 되었을 때, 대장(大將)이 되어 원보(元甫)김락(金樂)과 더불어 힘써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간신히 위기를 벗어난 태조는 신숭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해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였다. 또한 아우 신능길(申能吉)과 아들 신보(申甫)를 모두 원윤(元尹)으로 삼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해 그들의 복을 빌게 하였다. 994년(성종 13) 4월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어 태사 개국장절공(太師開國壯節公)으로 태묘(太廟)의 태조 사당에 배향(配享)되었다. 신숭겸의 행적을 기록한 『평산신씨장절공유사(平山申氏壯節公遺事』에는 1120년 예종이 신숭겸과 김락을 추도하며 지었다는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향가가 전한다.
신숭겸장군은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시조이며 호는 장절공(壯節公)으로써 고려시대 개국공신이다.
처음에 이름은 능산(能山)으로 야사기록에 의하면 서기 877년(신라) 이곳 욕내군(곡성군 목사동면 구룡리- 현, 용산재)에서 출생하였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몸은 장대하고 천성이 용맹스러웠으며 활쏘는 재주와 무예가 뛰어나 장사다운 자질을 갖추었다. 태봉(泰封)의 기장(騎將)으로 있을때인 서기 918년 6월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복지겸(卜智謙)등과 의논하여 궁예(弓裔)를 몰아내고 태조 왕건을 받들어 고려를 개국한 개국공신이다. 태조10년(서기927년) 가을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태조는 신라를 돕기 위해 대구 팔공산(당시에는 공산)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수가 많은 후백제군에게 포위를 당해 위험한 상황에 이르렀으며,이때 태조와 비슷한 용모를 갖춘 신숭겸장군이 왕의 복장을 하고 대신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후 태조는 공의 시신을 찾아내어 통곡하며, 광해주 비방동(현, 춘천시 서면 방동리)에 예장한 다음 직접 제례를 지내고 그 자리에 순절단(殉節壇)을 모시고 대구지방에 지묘사(智妙寺)라는 절을 지어 공의 명복을 빌게 하였고, 봉분셋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1120년(예종15)에 신숭겸과 김락장군을 추모하는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향가를 지어 찬양케 하였다. 현재 곡성의 덕양서원과 용산재, 대구의 표충사,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 평산의 태백산성사(太白山城祠), 동양서원 등에 배향되고 있다.
유적지소개
용산재(목사동면 구룡리 - 지방기념물 제56호)
신숭겸장군의 태생지로 용산재에는 구룡문과 용산재, 동서재, 고작사, 비, 용산단과 장군상이 있다. 2003년에 완공 계획으로 추진중인 용산재 성역화사업은 경내지 확장과 홍살문, 동·서재, 교직사, 내·외삼문을 건립할 계획으로 사업이 완료되면 군인들의 학습장으로 활용됨은 물론이며 신숭겸장군과 관련된 유적지의 메카로 부상될 전망이다.
신유봉(申遊峰)
죽곡면에 있는 해발 665M의 산으로 신숭겸장군이 무예를 익혔던 봉우리이다. 타고 다니던 말의 능력을 시험키위해 반대편 봉우리를 향해 활을 쏜 다음 말을 달려 봉우리에 도착해 보니 화살이 없어 화살이 이미 이곳을 지나간 것으로 판단하여 타고 다니던 말의 목을 배려할 때 화살이 떨어져서 말을 구하였다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화장산(華藏山)철갑옷 바위
화장산은 죽곡면에 있는 해발 525M의 산으로 신숭겸장군이 이곳에서 무예를 익혔으며 당시 입었던 갑옷을 숨겨두었다는 바위(鐵甲岩)가 있는데 어느날 나무꾼 총각이 이옷을 발견하여 호기심에 입어 보려 하자 바위에 몸이 달라 붙어 3일만에 떨어졌다하며, 일제시대에 왜경들이「전설이란 허무한 것이다」하여 망치로 바위를 부수니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고 풍우가 몰아치니 혼비백산하여 돌아갔다하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화장산 장군천(華藏山 將軍泉)
화장산 중턱에 있는 우물로써 신숭겸장군이 산에서 무예를 닦다가 목이 마르면 마시던 샘이다. 금으로 만든 복지깨(물그릇)이 항상 물위에 떠 있었다고 하는데 이상한 것은 어떤 사람이 이 금복지깨로 물을 마시다가 금복지개가 입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고 3일만에 떨어졌다고 전하기도 한다.
용소,용탄,용암,용마(龍沼,龍灘,龍岩,龍馬)
보성강(대황강- 大荒江)가운데 여울과 소(沼)와 바위가 있으며 이 소에서 신숭겸장군이 목욕하였다는 곳이라하여 용소(龍沼)라고 이름하고 그여울 역시 용탄(龍灘)이라 하며 여울곁에 있는 큰바위를 용암(龍岩)이라고 하였다. 여기 바위가 물속에 뻗어 큰바위를 이루고 그 바위밑에 큰 굴이 있어 용마(龍馬)가 출입한 것을 신장군이 잡아 탔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 바위에 용마(龍馬)발자국이 있고 말구시(말밥통)이 있으며 신장군이 목욕할 때 등을 문질렀다는 반들 반들한 바위가 있다.
덕양서원(德陽書院) - 오곡면 덕산리 : 지방기념물 제56호
선조 22년(1589년)에 본군 현감 신옥(申沃)이 본도 관찰사, 도내외 후손과 협의하여 창건하였으며 학문을 닦고 지방의 풍속을 장려하여, 선현의 충절을 일깨우는 등 교화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시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이후 여러차례 중수하였고 숙종(肅宗)21년 (1695년)윤세기(尹世紀)가 조정에 상소하여 사액서원으로 되었다. 고종 8년(1871)때 서원 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었으나 1937년 전라도 후손에 의해 강당, 연서재(燕序齋), 덕양사, 신덕재, 전사청, 외삼문, 내삼문을 중건하였으며 1981년 목사동면에 소재한 용산재와 함께 전라남도 지방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었다.
용자(龍字)이름
신숭겸장군의 활동지인 목사동면(木寺洞面)과 보성강변(일명 대황강)등에 용자(龍字)의 지명이 많음. 용소,용탄,용암(龍沼,龍灘,龍岩)과 지명상 구룡리(九龍里),용사리 (龍司里),용정리(龍井里)등이 신유봉(申遊峰),선주산(仙住山)이며 화장산(華藏山)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