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및 사투리

하동 궁항마을 유래

꼴통 도요새 2018. 4. 25. 14:58
반응형

하동 궁항마을 유래

궁항리(弓項里)는 활목이라는 곳으로 오대산(五臺山) 아래 유명한 옛 오대사(五臺寺) 절터가 있으며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로 철광맥이 있어 쇠를 구운 흔적도 남아 있다.
(1)궁항
 궁항리에는 궁항과 오율의 두 행정 마을이 있다. 궁항은 지형이 활목의 형태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안몰마을 앞에 활촉산이라는 지명이 있어 이를 뒷받침 해 주고 있다. 또한 궁황을 활로 연상하여 상이리의 장군설 즉 장군대좌(將軍坮座)와 연관시켜서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버스편은 궁항 오율(궁항리) 갈성(위태리) 회신(회신리)를 거쳐 횡천을 경유하는 도로가 있고 소로길을 통해 양이터재를 넘으면 청암 상이리와 나본에 이르고 응달에서 넘으면 상이리 구정기 마을에 이르고 빙이터를 지나 질매재 열두모퉁이를 내려가면 묵계리 장재마을에 이른다. 같은 마을로 새터, 안몰, 빙이터, 양이터 등의 여러 작은마을들이 있다.
(2)새터(新基)
신기(新基)라고도 하는 마을이다.
내촌분교장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로 나누어 위치한 양달(양지땀)과 응당(음지땀)의 두 마을을 합하여 새터라고 하는데 보통 새터라고 하면 양달을 이르기도 한다.
 ※내촌분교장 : 위태국민학교에 속하는 분교장인데 지난 1969년 9월 12일에 설립되었으며 1991년  2월 재학생수는 3명이었다. 내촌분교장은 1991년 3.1.폐교되었다.
(3)뒷골(後谷)
후곡은 궁항리의 깊은 골짜기인데 이 계곡의 마을을 보통 뒷골이라고 부르며 뒤편에 오대산이 있다.(뒷골은 주산 바로 밑이다.)
(4)안몰(內村)
궁항리 안쪽에 있는 마을로 쎄끝봉(쇠끝봉) 아래에 있으며 오래 전까지는 궁항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
이 마을을 거쳐 소로로 벗내재를 넘으면 산청군 시천면 반천리에 닿는다.(벗내재는 청암쪽에서는 벗내재라고 부르고 산청쪽에서는 활목재 혹은 홀목재라고 부른다.) 안몰은 내촌분교에서 약 1Km의 거리에 있으며 전주와 궁항리를 내왕하는 버스의 종점지이기도 하다.
안몰(내촌)에서 점터(店)로 올라가는 길가에 자연 경관이 아름다운 3단 폭포가 있어 지난 4월 27일(1992년) 본 향토지 자료심의회 심의위원들이 면출장소 2층 회의실에서 원고를 심의하는 과정에 이 폭포의 이름을 지었는데 궁항폭포, 주산폭포로 하자는 말도 있었으나 결국 오봉폭포로 하였다.
이 폭포의 위치가 오봉산(五峯山) 오봉의 마지막 지점이다. 오봉산은 묵계리의 장재기 뒤에 위치한 산이다. 안몰에는 안동 권씨의 재실 원모재가 있다.
(5)벗내재(활목재)
(6)양이터(梁李터)
궁항리 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주민들에 의하면 임진란 때 양씨(梁氏)와 이씨(李氏)가 이 곳에 피란하여 살았다고 한다.
 상이리(上梨里) 나본(螺本) 뒤의 웃선거리에도 양씨와 이씨들이 피란하여 살았다고 하는데 나본의 주민들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라고 한다.
 양이터에서 양이치(梁李峙) 즉 양이터재를 넘으면 도둑골이고 이 도둑골에서 시목마당재로 넘어가는 산길이 있다.
 양이터에서는 양씨가 먼저 들어왔고 이씨가 뒤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런데, 양이터 너덜에 산갈치(?)가 있었다고 전한다.(전 청암면장 김상용씨)
(7)빙이터
 마을 이름이기도 하고 계곡의 이름이기고 한데 예부터 풍수지리설(풍수설)이 전한다. 풍수설(風水設)에 의하면 빙이터, 양이터, 갈티(위태리)의 세 곳에 3정승 6판서가 잘 자리가 있다 하여 지관(地官)들이 그 명당자리를 백방으로 탐색했으나 찾지 못하고 아직 그 자리가 바어 있다고 전한다.
그런데 잔하는 말에 의하면 빙이터의 명당 자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 근거한다고 한다. 옛날, 어느 스님이 마을을 지나 질매재를 오르는데 어떤 사람이 명당자리를 일러달라고 한사코 천함에 그 스님이 말하기를 ‘빙이터, 양이터, 갈티의 세 곳이 만나는 지점에서 되지기 논베미만한 빈터가 있는데 여기서 보일 듯 말 듯 한 그 곳이 바로 명당자리다.’라고 하였다.
그 후부터 이 지역 어느 곳에 명당 자리가 있다는 말리 전한다고 한다. 또 빙이터라는 지명은 좁은 골짜기 가운데 다소간 넓은 공터이기에 혹은 겨울철에 골짜기의 물이 얼어 늘 빙판이었다는 점에 유래한다는 말이 있다.
지금 이 곳 빙이터에는 양봉단지가 조성되어 통종꿀 300여 통을 집단 사양하고 있다.
(8)길마재(질매재)
보통 질매재라고 부르는데 묵계리(默溪里)의 장재(長在)와 궁항리와 경계지점이다.(빙이터에서 질매재를 거쳐 「열두모통이」를 내려가면 바로 장재 마을에 이른다.
※길마 : 짐을 실으려고 소의 등에 얹는 안장이다. ‘길마 무거워 소 드러누울까’하는 속담이 있다.
(9)질매
빙이터 위에 있던 동네인데 지금은 단지 1호만 거주한다.
(10)점골(점터)
철광맥이 있어 옛날 쇠를 구었다고 하여 지금도 그 자취가 남아 있다. 궁항리 일대에 불교가 융성했을 때 마을도 함께 번성을 누렸을 것으로 생각되는증거이다.
점터는 쇠끝봉 아래에 있는데 안몰에서 벗내재쪽으로 향하다가 왼쪽으로 들어서서 내를 건너 올라간 지점이다.
또 빙이터에서 산청군 시천면쪽으로 올라가도 점터(점골)에 이른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11)쇠끝봉
새터에서 점터쪽으로 바라보이는 산이다.
철광맥이 있어 옛날 산 아래의 점터에서는 쇠를 구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쇠끝」이란 잔 쇠붙이 즉 물건을 만들고 남은 쇠부스러기나 동강을 말한다.
(12)깃대봉
쇠끝봉 맞은편에 있는 산봉우리가 깃대봉인데 일제 때 지적 측량시 깃대를 꽂았다고해서 깃대봉이라고 한다.
(13)떼까이골
궁항리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서 산의 생김새가 토끼와 흡사하다고 해서 이 곳에선 데까이골로 불린다.
(14)주산(主山, 五臺山)
옥종면(궁항리)과 산청군(시천면)의 경계 지점에 솟는 해발 831m의 산으로 오대산(吳臺山)이라고도 하는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청암산(靑岩山)으로 표시되어 있다고 한다.
산 아래에 옛 오대사(五臺寺) 절터가 있으며 이 절터에서 보면 다섯 봉우리가 대(坮)와 같이 벌려 있는데 그 중에서 주된 산이라 하여 주산(主山)으로 부르는 것 같다.(오대주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주산 아래의 궁항리에서 발견된 마제석부(磨製石斧:돌을 갈아서 만든 도끼)가 경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김정호(?~1864.고종1년): 황해도 출신으로 호는 고산자(古山子), 정밀산 지도 작성에 뜻을 품고 전국 각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30여년 간의 노력 끝에 순조말년에 청구도라는 지도를 제작했으나 다시 전국을 답사하여 1861년(철종 12년)에 대동여지도를 완성하였다.
대동여지도는 손수그려 판각(板刻) 했으며 이를 홍선 대원군에게 바쳤는데 그 정밀함에 놀란 고루한 정부에 의해 나라의 기밀을 누설한다는 죄목으로 각판(각판)은 불태워지고 투옥되어 옥사했다는 것이 통설이나 이러한 학설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도 있다.
(15)오율(五栗)
몇 개의 작은 마을들이 모여 하나의 행정 마을을 이루고 있는 촌명(村名)이다. 오율(五栗)은 궁항과 위태리의 갈성사이에 있으며 괴십정이삼거리에서 청암면 위태출장소와 위태국민학교를 거처 궁항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끼고 산재한 여러 작은 촌락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오대산 즉 주산에 옛 도대사 절터의 유적이 있는 곳이다. 또 닥나무가 많아서 지금도 일부마을에서는 한지(韓紙)가 생산되고 있다. 오율을 이루고 있는 작은 촌락(지명)들을 위태국민학교에서 옛 오대사 절터에 이르는 도중의 차례로 적으면 다음과 같다. 「위태초등학교, 밤실, 여차골, 불당골, 시양골, 오대, 오대사, 절터」
(16)밤실
율곡(율곡)이라고도 하는데 옛날 재래종의 돌밤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17)불당골(佛堂谷), 여차골, 시양골
불당골은 옛날 불당(암자)이 있었던 마을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단지 한 세대만이 거주한다. 동네에 큰 정자나무와 바위들로 어우러진 경치가 좋은 동민의 휴식처가 된다. 여차골의 지명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으나 아마 불교에서 유래한 듯하다.
(18)오대(五臺)
유명한 옛 오대사(五臺寺 또는 水精社라고 하였다)의 절터가 있는 오대산 중턱 해발 500m에 자리한 마을로서 행정상 오대반(五臺班)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지금 4가구가 살고 있다
절터에는 오대사 즉 수정사(寺)와 수정사(社)가 차례로 건립되어 각각 흥망성쇠하였고 지금은 새로 수정사(寺) 건립의 노력이 경주되고 있다.
(19)마방소(馬방沼)
수정사 입구 조금 위의 궁항천에 있는데 옛날 말을 타고 지나다가 말이 빠진 소라고 해서 마방소라 부른다고 한다.(가마를 메고 가는 길에 말이 빠져 죽었다고 한다.)
(20)지금의 수정사(水精寺, 옛 오대사 절터)
열두 아름이나 되었다는 이 거대한 은행나무가 절 앞의 골을 온통 덮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는 사목의 고사터에는 은행목이 어느덧 기둥 크기로 자라 있었고 이는 필시 이 테에 곧 대찰(大刹)이 설 조짐이라고 공양녀(倥養主)가 전하고 있다. 지금(1989년) 이 수정사에는 산신각 하나만 완공되었고 그 밖의 부속건물은 모두 임시 가건물로 되어 있다.
 


고려시대 대각국사는 이 첩첩산중의 아득한 골짜기를 수행의 터전으로 지목하였고, 이 말을 좇아 수정사라는 수행단체가 결성되었다는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있는 곳이라, 그 흔적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깊은 지리산의 역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가마고개 설화’는 당파를 달리하는 두 명문 사대가 집안의 가마가 좁은 고갯길에서 맞닥뜨린 데서 시작된다. 두 가마에는 혼례를 막 치른 신부들이 타고 있었다. 하지만 가문 대대로 원수였던 두 집안은 먼저 길을 비켜주는 쪽이 무릎을 꿇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한 치의 양보 없이 대치한다.

이 소식을 들은 두 집안의 문파 사람들은 아예 고갯길로 찾아와 끝까지 버티라고 응원을 보낸다. 몇 달간 첨예하게 대치된 상태에서 지쳐버린 두 가문은 결국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로 암묵적 합의에 이르고, 신부에게 가문을 위한 희생을 강요한다. 두 집안은 신부들을 절벽 밑으로 떨어뜨린 뒤 빈 가마를 들고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얼마 뒤 거대한 열녀비가 세워진다.

반응형

'유래및 사투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원도 동해시  (0) 2018.05.25
지리산의 지명 유래  (0) 2018.04.25
김천 방언 모음  (0) 2017.08.17
지방 사투리  (0) 2017.07.28
예천(醴泉)  (0) 2017.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