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 서대 닭이 단맥에 놓여 있는 닭이봉, 철마산
1. 산행지: 닭이봉 510m, 철마산 469.5m
2. 위치: 충남 금산군 군북면 3. 일시: 2015년 12월 13일(일)
4. 누구랑: 나 홀로 5. 산행날씨: 맑고 짙은 박무 6. 소요시간: 3시간 7. 난이도: 중급 8. 들머리/ 날머리: 금산 인삼랜드휴게소(상행선)뒤 주차장(원점회귀)
9. 산행코스: 금산인삼랜드 (상)휴게소뒤 주차장 ->계곡->능선->암봉->닭이봉 정상 ->성터봉->절터골 갈림길->일월이재->철마산 정상 ->대암사면 전망대->부탕골->금산인삼랜드(상) 고속도로 옆길->주차장
철마산(鐵馬山): 충남 금산군 군북면 천을리에 있는 닭이봉과 연계가 가능한 산이다.닭이봉(510m)과 철마산(469m)은 인삼랜드 휴게소의 동쪽에 자리잡은 산으로 이 휴게소(상행)에서 원점 회귀 산행을 할 수 있다.
장령지맥 (長靈枝脈):
금남 식장지맥의 금성산에서 식장지맥은 만인산을 거쳐 식장산으로 향하고 또 하나의 산줄기가 갈라져 닭이봉(501m), 국사봉(668m), 대성산(705m), 매봉, 장령산(655m), 도덕봉(407m), 마성산(409m)을 거쳐 금강변 장계교에서 맥을 다하는 산줄기다. 이 산줄기의 동쪽에는 기사천, 봉황천, 호탄천, 등이 금강으로 흐르고, 이 산줄기의 서쪽에는 성당천, 금천천, 서화천 등이 금강으로 흘러간다.
금남 서대 닭이 단맥:
금남서대지맥이 흐르다 중부고속도로 삽재 지나 금산군 금성면, 추부면, 군북면의 삼면(450)봉에서 금남서대지맥은 북쪽으로 흘러가고 한줄기를 동남쪽으로 분기하여 금성면과 군북면의 경계를 따라 닭이봉(510, 1.2)에서 경계를 벗어나 군북면 내를 동서로 나누며 대체적으로 남진하며 일월이재(380)-철마산(△469.5, 2.3/3.5)-군북면과 제원면의 경계를 만나 9번군도 이리재(320, 1.2/4.7)-△347봉(2.3/7)-등고선상280m 바리실고개-5번군도수당리고개(200, 0.7/7.7)-두루봉(△211.7, 2.3/10)-제원초교-제원면사무소 601번지방도로 삼거리(1/11)를 지나 조정천이 봉황천을 만나는 곳(0.7/11.7)에서 끝나는 약11.7km의 산줄기를 말한다. (출처: 우리산줄기이야기)
금산군의 전설
금산땅 군북하면 험준한 산악에 가린 고을의 대명사다. 거기다가 군북에서 철마산하면 지금 으로부터 몇 년 전만 해도 혼자서 재를 넘기가 쉽지 않은 고개로 지목되었었다. 그러니까 군북땅 외부리에서 천을리(天乙里)로 넘는 철마산에 있는 고개를 일흔이고개라고 불렀었고 여기엔 큰 지승과 도적들이 출몰한다 해서 사람들이 떼지어 고개를 넘어야만 했었다.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 일이다. 조정에서 버림을 받아 아버지가 능지처참이 되자 그 아 들들은 아버지를 따라 죽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아침에 대문을 열고 나간 아버지가 조정에서 곧장 형장에 끌려가 이슬로 사라질 때 아버지 는 거기까지 따라온 스님에게 단 한마디 유언을 남겼었다. 스님! 내 아들들에게 나와 같은 죽음을 강요 시킬 수는 없소. 어째서 내가 역적이란 말이 오. 내 아들들에게 명대로 살 수 있도록 스님이 뒤를 보살펴 주시오. 조정에서 참의 벼슬에 있었던 그 대감의 목에 형리의 칼이 씌워질 때 그때 벌써 스님은 그 대감댁에 들려 그의 아들 형제를 데리고 그 집 대문을 뛰어나왔을 때였다. 그들이 집을 뛰어나와 마을을 벗어날 때 포리들이 그 아들들을 잡으려고 집을 덥쳤었다. 그러나 포리들의 눈에는 사약을 먹고 죽은 참의 아내가 자결한 모습만 보았을 뿐 그의 아들 들은 집에 없었다. 스님따라 도망을 나와서 한양 가까운 절간 불당 뒤에 숨었다가 며칠이 지난 후 그 절간을 빠져나온 그들 형제는 처음 금산땅 서대산 굴 속에 몸을 피했고, 다음은 여기 철마산 깊은 산중에 피해서 처음에는 뗏집을 지었고 다음은 숯가마를 만들었고, 그들 이 자라나서 의적으로 변해서 여기를 주름 잡았었다. 경상도에서 한양가는 길은 꼭 제원역정을 지났었다. 그래서 조정에 아첨하는 벼슬살이들이 그들로 인해서 제원근처에서 곤역을 치러야 했고, 돈이 어두워 관가와 결탁하여 돈을 모으 는 장사꾼들은 여기에 글려와서 목이 날아가곤 했다. 조정에서 제원, 금산, 영동, 화덕 근처에서 활개를 치는 그들을 잡으려고 포리들과는 반비 례 해서 전국에 퍼져 나갔다. 그래서 조정에서 설움 받는 사람들은 여기로 모여 들었고, 그 들의 숫자는 그럭저럭 500이 넘게 되었다. 철마산에는 진달꽃이 으뜸이었다. 한때는 규수였던 아낙네들도 몸을 피해와서 여기에 정착 을 했다. 그들은 백명이 넘지 않게 떼를 지어 고랑이나 양지바른 곳에 살면서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서러움 받은데 대한 반발뿐만 아니라 의협심을 일으키는 그들이었다. 철마산하면 큰 짐승이 많은 산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여기 저기 고랑을 점거하면서 짐승들도 달아났는지 그림자도 없었다. 처음 여기에 정착한 형제의 아버지가 나라 임금이 바뀌고 짐승들이 새롭게 등장하자 죄가 풀리어 크게 죄를 면하는 지령이 떨어졌다. 그들의 아버지가 억울한 죄명에서 벗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그들 형제는 그래도 꼼짝을 하지 않았다. 그날 밤이었다. 철마산 여 기저기 고랑에서 슬픈 통곡소리가 한창이나 하듯 들려왔다. 어디서 처음 울음이 복받쳤는지 자기네들의 신세를 한탄하는 울음소리였다. 그들 형제도 그 울음에 섞여서 그날 저녁은 실 컷 울었다. 멀리 제원역정이 보일 수 있도록 집집마다 호롱을 밝혔을 때 제원역정에서 볼 때 마치 어느 절간의 초파일 같았다 하니 그들의 울분을 짐작할만했다. 그들은 차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여기 철마산에서 내려가는 사람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이것은 나라의 정사가 잘 풀리는 까닭에서였다. 그들이 차츰 이곳에서 물러가자 이번에는 진짜 도덕패들이 이곳을 점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근처 고을 사람들이 여기 철마산을 넘을 때는 70여명이 떼를 지어 도적을 피하며 지났다 한다. 군북의 일흔이고개는 한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네들의 한을 달봤던 한 많은 고개였다. 지금 이곳의 고개 이름을 일흔이고개라 부르는 것도 그 한 많은 사람들이 일흔 명 남짓 떼어 여기저기 골짜기에 분산되어 살았기에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출처: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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