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고라니(승리봉, 봉학산)

꼴통 도요새 2016. 6. 1.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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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라니

승리봉에서

강원도 영월군 남면 토교리

20151129(일)



봉학산(수리봉), 가섭산

충북 음성군 음성읍 용산리, 충주시 신니면 송암리

201497()

특징은 견치(犬齒송곳니)가 송곳 모양으로 특별히 길게 자라서 끝이 구부러져 있으며, 입 밖으로 나와 있는 점이다. 이것으로 나무뿌리를 캐어먹는다. 사향노루의 견치보다 좀 굵고 짧으며, 암컷의 견치는 수컷보다 좀 작다. , 암수가 다같이 뿔이 없는 것도 이 종류의 특징이다. 체모는 거칠고 굵으며, 목과 허리의 털이 길고 등쪽의 색채는 담갈적색이다. 털의 밑부분은 회백색, 다음은 흑갈색·적갈색의 순이다. 체하면(體下面배의 유두가 있는 부분)은 띠처럼 보이는 백색이며, 목은 등쪽보다 담색이고, 어깨·다리·꼬리는 밤갈색이다. 어린 새끼들은 몸에 세로로 줄을 지어 흰 점이 있으며, 몸 후반부에 더욱 많다. 등쪽의 털은 어미보다도 부드럽고 밤색이다. 몸통길이 110120, 꼬리길이 48, 뒷다리 2627, 귀의 길이 910이다. 유두가 4개 있으므로 고대형 노루임을 입증해 준다. 고라니는 주로 금강산 일대와 오대산·설악산·태백산을 거쳐 경주와 포항에 이르는 태백산맥에 많이 서식하고 있다. 높은 산에 연결된 산기슭에 서식하므로, 들에 가깝고 나무가 적당히 무성한 남향이나 또는 평지 버들밭, 그리고 억새가 무성한 황무지, 또는 산기슭 가까운 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종류이다. 그러므로 고라니를 잡기 위해서 몰이를 할 때는 목을 산의 능선이나 산허리에 잡아야 한다. 고라니의 성격은 보통 노루와 달라서 크게 놀라지 않으며, 토끼와 같이 귀소성이 있기 때문에 처음 있던 곳을 멀리 떠나지 않고 되돌아오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고라니의 피는 예로부터 사슴피와 마찬가지로 매우 귀중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특히, 보노루의 뼈를 10시간 열탕으로 끓여 즙액을 마시면 신경통에 큰 효과가 있다고도 한다. 우리 나라의 분포지역은 목포·안주·하동·단양·광릉 등지였으나, 요즈음은 전국적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다.(출처: 다음백과)


안타까운 현실

 백두대간으로 표기되어야 할 문구가

일본인 고토분지로가 만든 태백산맥으로 표기 되어 있


태백산맥은 없다.

우리나라의 산줄기 백두대간

조선 문종 때인 1451년에 완성된 고려사에는 9C 말 신라의 승려이자 풍수지리가인 도선의 저서 옥룡기와 관련한 글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우리나라가 백두에서 시작하여 지리에서 마쳤으니 그 형세가 물을 뿌리로 하고 나무를 줄기로 한 땅인지라...”라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이는 우리 선조들이 백두대간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최초의 기록으로 우리나라의 산줄기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끝을 맺는다는 관념의 반영이기도 하다. 그 후, 백두대간은 이익의 성호사설이나 신경준이 편찬했다고 알려진 ‘산경표’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를 동서로 가르며 우리나라 모든 산과 산줄기들의 근간이 되고 모든 강들의 시원(始原)이 되는 백두대간. 우리 선조들이 기대어 살았고 우리 민족의 애환이 녹아 있는 산줄기들의 아버지 격인 백두대간 

산맥(山脈)이라는 개념의 등장

제국주의 열강들이 호시탐탐 조선땅을 노리던 조선 말기, 일제는 1876년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조선땅의 지질조사를 끈질기게 요구한다. 1897년 화폐제도를 금본위제도로 바꾸고 조선의 금을 캐가기 위하여 광분하던 일제는 1900년 겨울 고토분지로(小騰文次郞)라는 일본 지질학자를 조선으로 파견한다. 금을 비롯한 조선의 지하자원 수탈을 목적으로 들어와 교통 수단도 변변치 않던 시절 고토는 고작 조랑말 4마리와 6명의 대원 등 빈약한 인적∙물적자원으로 은밀하게 지질조사를 하게 된다. 1902년 겨울에도 재입국하여 같은 방식으로 조사를 실시한 고토는 총 266일이 걸린 두 차례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조선산악론(An Orography Sketch of Korea) 및 지질구조도라는 논문을 동경제국대학 논문집에 발표하게 되는데 이때가 1903년이다. 즉 고토는 조선땅 동서 1,000, 남북 3,000리에 대한 지리 및 지질 검토를 단 266일만에 마무리 하였고(1903) 그 후 전도와 산악론, 지리지 등이 연속적으로 발간되는 데 단 2년이라는 시간 밖에 소요되지 않았으며(1905) 후술하는 바와 같이 대한제국 학생용 교과서에 오르는 데에도 단 5년 밖에 소요되지 않았던 것(1908)이다. 고토는 이 논문에 있는 지질구조도에 우리나라의 전통 산줄기 개념인 백두대간을 위시하여 1정간 13정맥 등 15개의 산줄기를 36개로 분해하여 각 산맥에 임의로 이름을 부여하면서, 이 중 우리나라 산줄기의 근간을 이루는 백두대간을 마천령산맥’, ‘함경산맥’, ‘태백산맥’, ‘소백산맥 4개의 산맥으로 토막을 내었다.

고토분지로의  백두산을 없애자.”

특기할 만한 것은 일찍이 육당이 天山 聖岳으로 신앙의 대상(가령 國師堂)이며, 역사의 출발점(가령 神市)이었고, 문화의 일체 였으며 동방대중 생명의 原籍이었다고 극찬해 마지않았던 우리 민족의 사상적 지주인 백두산은 위 지도에 표기조차 되지 않았음은 물론 다른 산들과는 달리 산맥 이름에도 백두라는 단어를 올리지도 못하고 한낱 고개에 불과한 마천령에게까지 그 이름을 빼앗긴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여기에 더하여 고토는 백두산을 철천지 원수로 여겼는지 자신의 지질구조도에서 황해도는 바둑판같이 전라남도, 경상남도는 부채살처럼 지질구조선을 산맥이라는 이름으로 그어놓은 반면 백두산 부근은 허허벌판으로 놔뒀으며 마천령산맥의 지질구조선은 아예 백두산에 와 닿지도 않게 그렸다. 백두산에 대해서 이상하리만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던 일본은 백두산의 최고봉인 將軍峰을 兵使峰으로 격하시켜 부르다가 1909년에는 간도협약으로 백두산을 중국에 넘겨 버리더니 그 이후에는 다시 大正峰이라고 자신들의 왕 이름을 따서 부르는 등 만행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한편 고토가 논문을 발표한 이듬해인 1904년 정치지리학자인 야쓰쇼에이(矢津昌永)는 바둑판 같았던 고토의 산맥도를 한국지리라는 책을 통하여 어느 정도 정리를 하였으나, 여전히 소백산맥은 부채살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1905년 대한제국이 통감부 체제로 들어가면서 1906실업실찬지리에 이어 1908고등소학대한지지라는 지리 교과서를 편찬할 때 비로소 오늘날의 지도와 유사한 산맥도가 실리게 되지만 이렇게 36개의 산맥이 5년만에 14개의 산맥으로 변천하게 된 과정에 대한 설명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상황이 이렇게 급박하게 전개될 때 1906년 정연호는 최신고등대한지지라는 교재에 우리의 산줄기를 있는 그대로 싣기는 하였지만 통감부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었으며, 1910년 육당 최남선에 의해 우리의 고전을 보존하기 위하여 설립된 조선광문회에서 1913년 편찬한 산경표에 실린 우리 산줄기 이름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지질구조선 = 산맥

이로써 산과 강을 기준으로 하여 그려진 실제 지형과 일치하는 자연스러운 지리개념인 백두대간 등 우리의 산줄기는 없어지게 되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땅속의 지질구조선을 근거로 하여 중간에 강에 의하여 끊기기도 하며 실제 지형과 일치하지도 않는 인위적이고 가공된 지질학적 선()인 산맥이 우리 지도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는 일제의 교묘한 음모가 지리학에 앞서 지질학을 들여보냄으로써 자원 침탈의선두에 서게 되었고 결국 이 입양아인 지질구조선인 산맥(태백산맥 등)이 嫡子인 우리 산줄기(백두대간 등)를 몰아낸 꼴이 되었으며, 지질학이 우리 전통 지리학을 밀어내면서 지질학이 지리학의 뼈대로 자리잡게 되는 결과를 빚게 되었고 마침내 우리나라 국토인식의 왜곡, 문화전통의 왜곡, 역사의 왜곡 등 총체적 민족자존심의 왜곡 내지는 상실이 시작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백두대간 등 우리나라의 전통 산줄기 개념은  잊혀지게 되었고, 우리는 고토의 산맥체계가 산맥방향을 잘못 잡고 산맥의 성인(成因)이 과학성이 결여되었음에도 이를 무비판적으로 학교 교육을 통하여 인문지리와는 무관한 지질학적 개념인 산맥을 전수 받았으며 우리나라의 지리 학자들 역시 산경표의 존재도 모르는 채 아무런 문제 의식 없이 그저 고토가 교육한 내용대로 땅속의 지질구조선을 산맥이라는 이름으로 교과서에 올리고 그것들을 가르쳤던 것이다.

산경표(山經表)의 재등장

그러던 것이 1980년 이우형이라는 지도쟁이에 의해 산경표가 우연히 발견된 이래 우리의 산줄기는 주로 지리학자 이외의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았으며 특히 노웅희, 조석필, 박성태 같은 이들은 책자를 통해 우리 산줄기 되살리기의 불씨를 지폈고 전국 지리교사들의 모임을 중심으로 우리 산줄기 이름 되찾기운동도 전개 되었으며 2004년에는 국토연구원 김영표 부원장 등 연구원들에 의하여 GSI기법을 사용한 새산맥도가 발표되기도 하는 한편 백두대간보호에관한법률이 공포되어 2005년부터 시행됨으로써 어느덧 백두대간은 공식용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국토연구원에서는 고토의 조랑말 대신 인공위성을 사용했고, 거기에 컴퓨터로 계산된 각종 수치와 정보를 덧보탰으며 한반도를 가로 세로 각각 30m 짜리 정사각형으로 나눈 다음에 이 정사각형의 한 가운데의 높이를 쟀다. 이렇게 실측된 수치에 위성 영상을 겹쳐 넣고, 지질학적인 분포도를 또 겹쳐 넣었고 여기에 기존에 알려져 있는 해발 200m이상 산봉우리와 고개 5103개의 좌표를 기록했다. 고토가 조랑말을 타고 다니면서 288일 동안 해안이나 강가 혹은 고개의 절개지 등을 다니면서 주운 돌로 기록한 논문보다 훨씬 정교하고 과학적이지 않은가? 이보다 앞서 북한은 1996. 1. “우리나라의 산맥 체계에 일제잔재가 많아 남아 있어서…”라고 하면서 산맥체계와 이름을 재정비하는 작업에 착수하여 백두대간을 백두대산줄기라는 이름으로 복원하기도 하였다.

 산맥의 문제점

그러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지질구조선을 산맥이라고 하며 제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우리나라 지리학자들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고 이들의 도움으로 태백산맥은 여전히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높고 연속성이 강한 산줄기들은 지질구조선을 반영하지만 그 밖의 많은 산줄기들은 빗물과 하천에 의해 오랫동안 침식되어 지질구조선이 실제 지형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아무리 주장을 해도, 랴오뚱방향이나 중국방향 모두 습곡산맥인데 굳이 이들을 구분하여야 할 필요성이 있느냐고 물어보아도, 또 중국방향인 마식령산맥과 랴오뚱방향인 멸악산맥의 차이점이 아무 것도 없지 않느냐고 물어도, 함경산맥이 멸악산맥같이 랴오뚱방향이라면 생성 시기와 원인이 같아야 하는데 오히려 함경산맥은 한국방향이라고 한 태백산맥과 같이 높고 동해로 치우쳐 있어 한국방향이라고 봐야 하지 않느냐고 얘기해도 쇠귀에 경읽기식이다. 오히려 1908년에 지금의 지도와 거의 같은 형태가 완성되어 있음에도 학자들은고토의 산맥도를 자신들이 문제점을 수정, 보완하여 지금의 지도를 만들었다고 강변하거나 앞으로도 지리학자들이나 지리교육전문가와 토론을 통하여 수정할 것이 있으면 수정하겠다는 무책임한 얘기만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면서 일반인들이나 환경운동가들을 비전문가로 몰면서 산맥의 생성원인들에 깊이 관심을 가지고 맡은 일에나 힘쓰라고 충고하는데 이러는 사이 산맥은 지리교과서에서 주인 행세를 하고는 있지만 학자들이 아닌 일반인들이나 환경운동가 그리고 기업들 사이에서는 태백산맥이라는 단어는 사라졌고 이미 백두대간 종주’, 백두대간 협곡열차’, ‘백두대간 광천수라는 말들이 보여주듯이 일반인들의 생활에서는 백두대간이 자리를 잡았음은 물론 백두대간 종주라는 슬로건으로 벌써 30,000명이 넘은 사람이 백두대간을 종주하였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수 백 명의 산꾼들이 우리 산줄기들을 걷고 있으며 앞으로도 수 많은 사람들이 답사가 계속될 백두대간. 독일의 지리학자 훔볼트(humboldt)는 안데스 산지를 2만번 정도 오르내리면서 안데스 산지를 연구하였고, 페루 해류에 대해 연구를 하여 그 업적을 인정받아 페루해류를 훔볼트 해류라고도 하지 않은가. 우리나라의 지리학자들은 과연 백두대간을 걸어보기나 하였는가. 아니 그 백두대간이 그렇게 싫다면 태백산맥이나 차령산맥 혹은 노령산맥이라도 걸어보기나 했는가. 걸어 보았으면 그 산맥의 실체를 직접 확인해 보았는가. 지리 과목이라는 게 책상머리에 가만히 앉아서 연구하는 과목은 아니지 않는가.

 지질구조선(地質構造線)의 다른 이름 山脈

산맥의 종주국이라 할 일본마저도 포기한 개념인 지질구조선을 근간으로 한 산맥 개념. 왜 지구과학 혹은 대학에서나 배워야 할 지질학 개념인 산맥을 굳이 생성 원인 운운하며 지질구조선을 들먹이면서 중고등학교는 물론 초등학교에서까지 지리나 사회시간에 배워야만 하는 걸까. 산의 연속인 산()이 하나의 혈관()으로 이어져 있는 참 의미의 山脈이 아니고 강에 의하여  번이고 단절되었어도 여전히 산맥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하는 산맥.

 일제의 잔재인 태백산맥

아직도 태백산맥이 백두대간의 자리를 꿰차고 눌러 앉아 있는 이유는 혹시 고토가 가르쳐 준 우리나라가 토끼 모양이거나 노인이 중국을 향해 절을 하고 있는 형상(사대주의와 지정학적 운명론)이라는 말에서 비롯된 태백산맥이 우리나라의 등뼈인 척량산맥(脊梁山脈)”이라는 말과 태백산맥이 우리나라를 동서로 가르고 있다.”는 허무맹랑한 일제의 가르침을 아직도 신봉하고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나라의 산맥이라는 개념은 에베레스트나 록키 혹은 안데스 같은 산맥의 개념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 그런 산체(山體)와 같은 산맥을 우리나라의 작은 산줄기와 비교하면서 가르치는 것은 무언가 은폐하고 싶어하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안데스산맥 같은 것을 고토의 식으로 남북방향이니 동서 방향이니 하는 식으로 산맥을 긋는다면 과연 안데스는 몇 천 개의 아니 몇 만 개의 산맥이 될 지도 모를 것이며 그 산맥들을 설명하는데 책 한 권 가지고도 가능하기나 할까. 다른 영역에서는 일제의 잔재들을 많이 청산하였지만 아직도 태백산맥 등 산맥들이 백두대간 등 우리 산줄기들을 대신하여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이유는 고토의 이론이 옳아서가 아니라 바른 대안을 정립해 보겠다는 우리의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의지가 부족해서는 아닐까.

결론

우리가 산맥을 배우는 목적은 지질구조나 조산운동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산맥이 우리 생활에 어떻게 관련되어 있고 구체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기 위한 방편으로 배우는 것이다. 또한 산맥의 주향(走向), 그 시작과 끝, 그 산맥에 있는 산들을 궁금해 하고 그것들이 우리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을 대변해 주지 못하여 땅맥 혹은 지맥으로 불러야 온당할 우리나라의 산맥. 우리가 일제의 지배만 받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통일이 되었더라면 분명히 청산되었을 산맥. 이에 발맞추어 정부에서는 실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효과적인 국토계획을 짜게 하기 위해, 환경단체나 일부 기관들은 강 줄기 체계화로 물 오염을 막기 위해 전통적인 산줄기 체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수 많은 산꾼들이 산경도를 가지고 등산을 하고 있으며 산림청에서도 백두대간 개념을 국민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다. 건설교통부 역시 국토종합계획에서 백두대간 1400kn를 민족생태공원으로 지정 남북한 정부 및 지방정부가 공동으로 관리하게 되어 있기도 하다. 일본이 아직도 제국주의의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도 모자라 군국주의 부활을 외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이 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우리의 아이들에게는 고토가 남기고 간 산맥과 산맥 이름 대신 올바르고 제대로 된 우리의 산줄기들을 쉽게 가르쳐 줌으로써 민족적인 자긍심을 되살리고 백두대간과 거기서 분기한 각 산줄기 그리고 거기서 발원한 강들에 기대어 살아왔던 우리 선조들의 역사나 지리, 문화 등을 재조명하고 우리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되새겨야 할 시점이 아닐까.(모셔 온 글: 현오 권태화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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