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천호산, 두리봉, 천마산
1. 산행지: 국사봉(國士峰, 333m), 깃대봉(394.1m), 함박봉(404.4m), 천마산(栢紫山, 287m), 천호산(天護山, 371.6m),두리봉(278.2m)
2. 위치: 충남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8. 산행코스: 개태사→천호봉→천호산→논산 연산농공단지 갈림길⟶하늘문교회⟶함박봉⟶깃대봉⟶국사봉⟶한민대학교
9. 특징:
천호산
충남 논산시의 연산면 동쪽에 위치하는 산이다(고도:366m). 서쪽산록에 개태사가 소재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연산)에 "황산(黃山)은 일명 천호산(天護山)이라고도 하는데 현 동쪽 5리 거리에 있다. 신라의 김유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소정방과 더불어 백제를 공격하니 백제의 장군 계백이 황산 벌판에서 신라의 군사를 방어할 적에, 3개의 병영을 설치하고 네 번 싸워 모두 이겼으나 끝내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국여지지』(연산)에 "원래 황산이라 불렀던 것을 고려 태조가 천호산으로 개칭하였다."라고 되어 있다.『여지도서』(연산)에 '천호산'이라는 지명으로 나타나며, "산 안에 개태사(開泰寺)가 있다. 고려 태조의 초상화를 모신 건물이 있었다. 절은 지금 허물어져 없어지고 다만 옛터만 남아 있다. 고려 태조가 백제에 승리하고 친히 원문(願文)을 짓고 썼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부처님께서 지켜주심에 보답하고 산신령님께서 도와주심을 갚으려고 특별히 담당 관리에 명령하여 불당을 창건하고는, 이에 산의 이름을 천호(天護)라 하고 절의 이름을 개태(開泰)라 합니다.'라고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같은 자료에 "천호산에 고운사(孤雲寺)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라고 되어 있고, 또한, "천호산 안에 있던 고운사가 대둔산으로 옮겨 신고운사(新孤雲寺)가 되었다. 그 웅장하고 화려하며 넉넉하고 성대한 모습은 충청도에서 으뜸이었다."라고 되어 있다.[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천호산
고속도로를 향하여 1번 국도로 가다 보면 옆모습이 중후하게 뻗은 산자락을 옆으로 하고 달리게 되는데 그것이 개태사가 진산으로 삼고 있는 천호산이다. 길에서 바로 옆으로 개태사로 들어가는 좁은 길로 들어설 수 있으니 개태사는 여느 절과는 달리 비교적 평지에 자리하고 있다
바로 계백의 결사대가 신라군을 맞아 대적했던 곳이며 신라 하대까지 황산벌이었으나 지금은 연산면 천호리인 이곳에 자리잡은 개태사는 그 창건에 남다른 배경이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신검을 쫓아 황산 숯고개를 넘어 마성에 진을 치고 신검의 항복을 받아 낸 것은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한 역사적인 일이었으니 이를 기념하여 바로 그해인 936년에 지은 절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삼국통일은 하늘이 도와주심이라 하여 황산의 이름조차 천호산이라고 고쳤다. 『고려사절요』에는 “개태사를 지을 때 사치스러운 것이 극도에 이르고······12개월에 개태사가 완성되니 낙성법회를 베풀고 왕이 친히 소를 지었다”고 되어 있어 고려의 호국대찰로서의 면모가 유감없이 드러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생민(生民)들이 백가지 근심을 만나니, 많은 고통을 이겨 낼 수 없었습니다”로 시작하는 발원문에서 왕건은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기를 ‘큰 간악한 무리를 섬멸 평정하여 생민을 도탄에서 건져, 농사와 길쌈을 제 고장에서 임의로 할 수 있게 하겠나이다’ 하였더니······병신년 가을 9월에 숭선성 가에서 (후)백제의 군사와 대진하여, 한번 부르짖으니 흉광의 무리가 와해되었고, 두번째 북을 울리니 역당이 얼음 녹듯 소멸되어 개선의 노래가 하늘에 떠 있고 환호의 소리는 땅을 뒤흔들었습니다······부처님의 붙들어 주심에 보답하고, 산신령님의 도와주심을 갚으려고, 특별히 맡은 관사에 명하여 불당을 창건하고는, 이에 산의 이름을 천호(天護)라 하고 절의 이름을 개태(開泰)라고 하였나이다”라고 하였다. 왕건은 후세에게 명심하라고 내린 「훈요십조」에서 “차령 이남 공주강(금강) 밖은 지세 인심이 다 간교배역하니 저 아랫녘 사람들이 국정에 참여하여 정병을 잡으면 혹 국가를 변란케 하며 혹 통합의 옛 원한을 펴리니 비록 그 양민이라도 벼슬을 주거나 쓰지 말라”고 하였다. 차령 이남 공주강 밖은 곧 공주 아래쪽의 논산 이하 전라북도를 이름이니 이는 후백제 지역이 다시 일어날까 두려워한 왕건이 아예 그 싹을 잘라야 한다고 당부한 말로 ‘지역 감정’을 부추긴 원초적인 명제라고 할 만하다. 왕건은 그토록 후백제 세력을 두려워하여 경계하였고, 후백제를 격파한 것을 길이길이 기억시키려고 개태사를 세운 것이다. 이 절에는 왕건의 영정이 설치되어 기일마다 제사를 지내며 그의 옷 한 벌과 옥대를 보관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번창하던 절이 고려 말에 이르러서는 세 차례에 걸친 왜적의 침입으로 무너졌고 조선 시대에도 불교 진흥책을 썼던 세조 때까지는 그런대로 면모를 유지한 것으로 보이나 그 뒤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그리하여 석불은 도랑에 묻히고, 가마솥은 홍수에 떠내려가 절의 자취도 없어져 500년 동안 면목없이 되었다가 1930년에 들어서야 한 여승의 힘으로 다시 절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옛 영화는 자취가 없고 천호산 아랫자락을 베개 삼아 기대 있는 이 절에는 개태사 창건 때의 것으로는 대웅전에 모셔진 석조삼존불 입상과 함께 큰 무쇠솥이 있으며 다른 당우나 요사채는 모두 그 뒤의 것들이다. 대웅전 앞의 오층석탑은 고려 때의 것으로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274호이다. 원래 절터는 지금 절집이 있는 곳에서 동북쪽에 있는데 그곳 건물자리에 주춧돌, 석불대좌와 함께 석조가 있으며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275호로 지정되었다. 마당에서 정면으로 축대 하나 위쪽에 있는 단군전이나 그 옆의 팔각당은 민간신앙과 어느 정도 습합한 면모를 보여 주는 듯도 하다. 특히 팔각당 안에는 시렁 위에 층층이 방석을 쌓고 동자부처를 모셔 앉힌 모습이 매우 넉넉하여 절로 웃음 짓게 한다.
개태사
고려 태조 왕건이 일리천 전투에서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삼한을 통일한 것을 기념(+덤으로 전몰 장병들을 위문)하기 위해 지은 절이다. 태조 19년(936년)부터 짓기 시작해 4년 만인 23년(940년) 완성되었으며, 개태(開泰)라는 절 이름은 '전란의 시대를 끝내고 평화의 시대(泰)를 열었다(開)'는 뜻이다. 절이 완성된 뒤 절 뒤쪽의 산은 천호산(天護山)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완성된 해 12월에 낙성을 기념하는 법회가 있었는데, 이 법회에서 태조 왕건 자신이 직접 발원문을 지어올렸다고 한다. 이 발원문은 <동인지문사륙>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개태사가 위치한 곳은 천혜의 관문이라 지정학적으로도 중요한 지점이었다. 물론 20세기에도 굽이굽이 돌아서 들어가야만 했던 천혜의 관문이다. 태조 왕건 자신이 발원문을 지은 만큼 고려 왕조가 존재하던 내내 왕실의 존숭을 받았고, 태조 왕건의 어진이 절에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고려 후기의 문인 이규보가 1199년 당시 동경(경주)과 명주(강릉) 일대에서 일어난 농민봉기를 진압하기에 앞서 개태사를 찾고 태조의 어진 앞에서 반란을 진압할 수 있기를 기원하는 글을 올렸으며, 공민왕 때에도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야 될지 말지를 개태사에 대신을 보내서 점을 치도록 했다고 한다. 지금은 개태사 차원에서 자체적으로 영정을 그려 봉안하고 있는데 이는 왕건(고려) 항목 참조. 개태사가 몰락하게 된 원인은 우선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을 들 수 있다. 우왕 2년(1376년) 부여로 해서 침범한 왜구가 공주에서 고려군을 패배시키고 개태사까지 밀고 올라왔고, 당시 양광도원수였던 박인계가 개태사 앞에서 벌어진 왜구와의 싸움에서 그만 낙마해 죽기도 했다. 이때 개태사도 왜구에게 함락되어 절이 박살이 났다. 우왕 9년(1383년)과 14년(1388년)에도 왜구가 개태사에 주둔했었다.
현재 논산시에서는 논산 8경의 하나로 개태사를 지정해 관광 코스로 이용하고 있다.
우리산줄기이야기
금남정맥(錦南正脈)
금강의 남쪽 울타리. 금남호남정맥의 끝인 주화산(珠華山 560m)에서 북으로 금강과 나란히 올라가며 계룡산에 이르고 다시 서쪽으로 틀어 부여의 부소산 아래 백마강 조룡대에서 마감한다. 금강의 남쪽과 서쪽으로 만항강, 동진강의 분수령이 되어 자연히 군산을 중심으로 한 평야지방과 내륙지방을 양분하고 있다.금남정맥을 이루는 주요 산은 주화산을 시작으로 연석산(925m), 운장산(1,125.9m), 인대산(666m), 대둔산(877.7m), 월성봉(650m), 바랑산(555m), 천마산(287m), 계룡산(845m), 부소산(106m) 등 도상거리 128km의 산줄기이다.
◆ 유래:
▶황룡재(벌곡)
충청남도 논산시의 연산면 연산리 및 신암리로부터 벌곡면 한삼천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고개 남쪽으로 함박봉이 있고 북쪽으로 대목재가 위치한다. 현재 20번 국도가 통과하고 정상부 부근에는 삼천리 교육원이 위치한다. 황룡재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옛날 광산김씨 한 사람이 연산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노승 한 분이 찾아와서 '당신의 어머니는 모 월 모 시에 돌아가시게 될 것입니다.'하고는 어디로인가 가 버렸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모 월 모 시에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그날따라 그 스님이 나타나서 대문 밖에서 염불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들은 묘 자리를 잡아줄 것을 청하자 스님은 '범바위골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단 내가 황룡재를 넘어 가거든 땅을 파시오'하고는 바삐 떠나갔다. 그러나 인부들은 장례를 서둘러야 한다고 땅을 파기 시작하니 왕벌이 나와 스님이 간곳으로 날아가 그를 쏘았고, 스님은 황룡재를 넘기 전에 죽고 말았다. 그 후 문중에서 스님의 넋을 기리기 위해 미륵불을 세웠는데 이것이 오늘날 송불암 미륵불이다."라고 전한다.
▶대목재(大木嶺/280m)
충청남도 논산시의 연산면 연산리로부터 벌곡면 한삼천리 대목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남쪽으로 황룡재와 함박봉이 있고 북쪽으로 천호봉이 위치한다. 대목 마을의 이름으로부터 지명이 유래한다. 대목령(大木嶺)이라고도 부른다. 대목 마을은 한삼천리의 서북쪽 산 속에 있는 마을로 옛날부터 큰 나무가 많이 있어서 목재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큰 나무가 많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대목골 또는 대목동이라 불렸다고 한다.
▶천호산(天護山/311m)
충청남도 논산시의 연산면 동쪽에 위치하는 산이다. 서쪽산록에 개태사가 소재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연산)에 "황산(黃山)은 일명 천호산(天護山)이라고도 하는데 현 동쪽 5리 거리에 있다. 신라의 김유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소정방과 더불어 백제를 공격하니 백제의 장군 계백이 황산 벌판에서 신라의 군사를 방어할 적에, 3개의 병영을 설치하고 네 번 싸워 모두 이겼으나 끝내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국여지지』(연산)에 "원래 황산이라 불렀던 것을 고려 태조가 천호산으로 개칭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여지도서』(연산)에 '천호산'이라는 지명으로 나타나며, "산 안에 개태사(開泰寺)가 있다. 고려 태조의 초상화를 모신 건물이 있었다. 절은 지금 허물어져 없어지고 다만 옛터만 남아 있다. 고려 태조가 백제에 승리하고 친히 원문(願文)을 짓고 썼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부처님께서 지켜주심에 보답하고 산신령님께서 도와주심을 갚으려고 특별히 담당 관리에 명령하여 불당을 창건하고는, 이에 산의 이름을 천호(天護)라 하고 절의 이름을 개태(開泰)라 합니다.'라고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같은 자료에 "천호산에 고운사(孤雲寺)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라고 되어 있고, 또한, "천호산 안에 있던 고운사가 대둔산으로 옮겨 신고운사(新孤雲寺)가 되었다. 그 웅장하고 화려하며 넉넉하고 성대한 모습은 충청도에서 으뜸이었다."라고 되어 있다.
▶천마산(계룡/287m)
충남 계룡시 금암동에 있다. 동쪽으로는 계룡시 금암동 신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고 서남쪽으로는 백제 계백장군의 충혼이 어린 황산벌이 멀리 바라다 보인다. 또한 서편 기슭으로는 왕건이 하늘의 도움으로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세웠다는 개태사가 자리하고 있다. 천마산 정상에는 천마정이라는 정자가 있었으나 보수 공사 중에 내부목재의 부패가 심하게 진행된 것이 발견되어 철거하고 신축하려고 하고 있으나 정자의 자리가 사유지로 밝혀지고 지주가 허락을 하지 않아 재건축이 중지 된 상태이다.
▶양정고개(羊丁峙/1번국도/100m)
대동여지도의 羊丁峙다. 정씨(丁氏) 둘(羊)이 왕관을 놓고 싸울 고개라 해서 양정고개(羊丁)가 되었단다. 1번국도와 호남선 철길이 지나는 교통상 길목이다.
▶향적산(香積山/574m)향적산은 금북정맥에서 약 150m정도 벗어나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향적산을 경계로 서쪽은 논산시 상월면, 남쪽은 연산면, 동쪽은 계룡시 엄사면 경계를 이룬다. 향적산 산 이름은 ‘향이 쌓인 산’이라는 뜻이다. 계룡산과 맥락을 같이하는 이 산은 옛날부터 영산(靈山)으로 알려져 많은 종교인과 기복을 빌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수도를 위해 이 산으로 입산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이 피운 향의 향기가 쌓여 있다는 뜻에서 산 이름이 생겼다는 설이 전해진다.
▶ 멘재(현령/300m)
충남 논산시 상월면 대명리 와 계룡시 남선면 부남리 경계에 있는 고개로 향적산(574m)에 매달린 것 같이 보인다고 하여 맨재 또는 현령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계룡산의 남쪽 산릉인 천황봉(845.1m)~함지봉(386.5m)에 이르는 능선에 속하는 고개이다. 이 산줄기는 주로 화강섬록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능선 부분은 산성암맥류인 그라노파이어로 구성되어 있으며, 멘재도 이에 속한다. 멘재의 북쪽은 노적봉과 천황봉에 이어지며, 남쪽은 향적산(574m)과 국사봉(國事峰, 대명리 소재)에 이어지고 있다. 논산시 시가지로부터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상월면과 계룡시 신도안면의 행정 경계를 이루고 있다. 고개의 서쪽은 상월면 상도리와 대명리가 있고, 사면 말단부의 단구 및 구릉성 지형에서 주로 밭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고개를 지나는 특별한 도로는 없다.
충청남도 계룡시의 신도안면 부남리와 논산시 상월면 상도리 사이의 고개이다. 이 일대는 군사 보호 구역으로 지정되어 부분적으로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계룡산국립공원의 남쪽 끝 부분에 해당한다. 멘재 남쪽으로는 향적산이 있고, 동쪽으로는 노적봉이 소재한다. 서쪽의 상도리 방향으로 금강대학교가 조망되고 동쪽으로는 계룡대가 위치한다.
황령재-대목재-천호봉-천마산-양정고개-향적산삼거리-멘재-금강대학교 14km/ 6시간
천호동굴
천호산에는 길이 800여m에 달하는 종유동굴이 있는데, 1965년 이 지역의 황성호(黃聖浩) 목사가 지금까지 신비에 싸여 있던 동굴 내부를 답사하여 많은 종유석(鐘乳石)과 석순(石筍), 석주(石柱) 등이 있는 황홀하고 아름다운 동굴임을 밝혀내고 천호동굴(天壺洞窟)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 동굴은 현재 천연기념물 제 188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천호산의 산봉에서 태성리 계곡쪽으로는 둘레가 약 4km에 달하는 석성이 남아있는데, 이곳에서 철모(鐵牟) 등의 유물이 몇 점 발견된 바 있다.
'전라북도 지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익산 수봉산, 천호산 (0) | 2017.02.16 |
---|---|
무주 봉화산 (0) | 2017.02.15 |
진안 고산, 감투봉, 대덕산, 건넘산 (0) | 2017.01.19 |
고창 고산 (0) | 2016.12.27 |
남원 십자산-응봉-풍악산 (0) | 2016.1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