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및 전설

부여 부소산성(扶餘扶蘇山城), 낙화암(落花巖), 고란사(高蘭寺)

꼴통 도요새 2017. 5. 29. 16:40

부여 부소산성(扶餘扶蘇山城),

낙화암(落花巖), 고란사(高蘭寺)

 

부여부소산성(扶餘扶蘇山城)

위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내용

둘레 2,200m, 사적 제5. 지정면적 983900.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을

축조하고 다시 그 주위에 포곡식(包谷式) 산성을 축조한 복합식 산성으로, 성내에는 사비루(泗沘樓영일루(迎日樓반월루(半月樓고란사(皐蘭寺낙화암(落花巖)과 사방의 문지(門址), 그리고 군창지(軍倉址) 등이 있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비성(泗沘城)’·‘소부리성(所夫里城)’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산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으로 불리고 있다. 이 산성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泗沘)를 수호하기 위하여 538(성왕 16) 수도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나, 이보다 먼저 500(동성왕 22)경 이미 산봉우리에 테뫼형 산성이 축조되었다가 천도할 시기를 전후하여 개축되었고, 605(무왕 6)경에 현재의 규모로 확장,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축성의 구체적 방법을 보면 성벽 안쪽의 흙을 파서 호()를 만든 한편, 그 파낸 흙을 내벽에 보축(補築)하였다. 성의 바깥 벽면은 기반토(基盤土)를 마치 판축(板築)하듯이 황색사질토와 적색점질토를 겹겹이 다져놓았고, 그 위에 돌을 35단으로 쌓고 흙을 덮었다. 이런 방식으로 축조된 산성의 입지는 경사면이어서 원래의 경사도보다도 더욱 가파른 경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이 산성의 아래 너비는 7m 가량이며 높이는 대략 45m에 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군창지와 영일루가 있는 부근의 표고는 전면 70m, 후면 90m의 등고선을 따라 둘레 1,500m의 성벽을 거의 토축으로 축조하였다. 1981년의 사비성 복원 때 토성의 단면을 자른 결과 대개 아래로부터 A·B·C·D4층을 확인하였다. 맨 아래층인 A층은 붉은색의 진흙으로 판축하여 하부를 축조하였는데 층의 높이는 1.9m이며, 토루 바깥면에는 토루를 보호하기 위하여 쌓은 4단의 석축이 남아 있다. B층은 황갈색토층으로 북반부는 A층 위에 퇴적되었고, 남반부는 A층과 같이 아래서부터 쌓아올렸는데, 이는 A층을 고쳐쌓기 위해 B층이 축조되었음을 알려주며, 생토층으로부터 B층까지의 높이는 3.2m이다. 이곳에서는 연질의 백제시대 기와조각이 출토되었다. C층은 황갈색사질토로 판축기법을 사용하여 두께 36로 축조되었는데, B층의 바깥쪽 경사면을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수축된 것으로 보인다. 석재는 6합식(合式) 5단으로 쌓여 있는데 높이는 103로 이 층에서도 B층과 같이 백제시대의 기와조각이 출토되었다. 맨 위층인 D층은 조선시대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부소산성이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수축·개축을 거치며 사용된 이용편년을 증명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전체성벽의 높이는 내면의 높이가 7.6m, 외면 높이가 3.4m, 너비는 8.6m이다. 한편,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표고 106m의 사비루 부근의 산봉우리 중심으로 약 700m의 테뫼형 산성이 있는데 50×50, 70×60의 백제시대 초석이 많이 흩어져 있다. 이 산성은 위의 두 산성이 연결되어 백제시대의 독특한 복합식 산성양식을 하고 있다. 성안에는 동··남문지가 있으며, 북쪽의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북문과 수구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동문지로 추정되는 곳에서는 대형철제 자물쇠가 발견되어 문지였음을 입증해주고 있으며, 남문지에는 아직도 문주(門柱)를 받쳤던 초석 2개가 동서로 나란히 있다. 1978년 금강상수도사업 공사로 인하여 성벽의 단면이 드러났는데 성벽 내부는 잡석으로 적심석(積心石)을 넣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목책지(木柵址)와 수혈상(竪穴狀)의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이 산성은 성안에 군창지와 건물지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단 유사시에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려 한 것으로 보이나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왕과 귀족들이 즐기는 비원으로서의 구실을 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한편, 사비천도 이후 백제 멸망시까지 국도의 중심산성으로서, 인근의 청산성(靑山城청마산성(靑馬山城) 등의 보조산성으로 왕도의 방어를 강화한 성곽발달사의 새로운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고란사(高蘭寺)

위치: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부소산(扶蘇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창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백제 때 왕들이 노닐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였다는 설과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라는 설이 전하며,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을 고려시대에 백제의 후예들이 삼천궁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중창하여 고란사(高蘭寺)라 하였다. 그 뒤 벼랑에 희귀한 고란초가 자생하기 때문에 고란사라 불리게 되었다. 1028(현종 19)에 중창하였고, 1629(인조 7)1797(정조 21) 각각 중수하였으며, 1900년은산면에 있던 숭각사(崇角寺)를 옮겨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931년에 지은 것을 1959년 보수, 단장한 정면 7, 측면 5칸의 법당과 종각인 영종각 뿐이다. 절의 뒤뜰 커다란 바위틈에는 고란초가 촘촘히 돋아나 있고, 왕이 마셨다는 고란수의 고란샘터가 있고, 주위에는 낙화암·조룡대(釣龍臺사비성(泗沘城) 등이 있다. 절 일원이 충남 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어 있다.

 

낙화암(落花巖)

위치: 충청 부여군 부여읍 백마강변의 부소산

바위 위에는 백화정(百花亭)이라는 조그마한 정자가 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백제고기(百濟古記)에 의하면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어 아래로는 강물에 임하는데, 모든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죽을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고 하고, 서로 이끌고 이곳에 와서 강에 빠져 죽었으므로 이 바위를 타사암(墮死巖)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낙화암의 본래 명칭은 타사암이었는데, 뒷날에 와서 궁녀, 즉 여자를 꽃에 비유하고 이를 미화하여 붙인 이름이 분명하다. 이 바위와 관련되어 전해오는 전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용담(勇談)이 많은 영주(英主)였는데, 여러 차례 신라의 여러 고을을 쳐서 천하에 그 성세(聲勢)를 높인 뒤로는 정사는 돌보지 않고 날마다 궁성 남쪽의 망해정(望海亭)에서 궁녀들을 데리고 가무주연(歌舞酒宴)의 향락을 일삼았다. 좌평 성충(成忠)은 이를 근심하고 극력 간()하였으나, 왕은 이 말이 귀에 거슬려 그를 옥에 가두어버렸다. 그러자 그는 마음이 아파서 죽고 말았다. 이러할 때 일찍이 백제의 침략을 받아온 신라는 무열왕 및 김유신(金庾信) 등의 영주와 명신(名臣)이 나타나서 나라의 힘을 크게 길러 복수를 하고자 당나라 군사와 힘을 합하여 백제를 치게 되었다. 이에 백제의 용장 계백(階伯)4천의 적은 군사로써 황산(黃山)벌에서 신라 군사와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나당연합군의 수많은 군사가 일시에 수륙 양면에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해오자 왕은 그제야 성충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음을 후회하였다. 왕은 하는 수 없이 해질 때를 기다려 왕자 효()를 데리고 웅진성(熊津城)으로 달아나서 싸웠으나 성문은 부서져 열리고 말았다. 수많은 궁녀들이 슬피 울면서 흉악한 적군에게 굴욕을 당하는 것보다 깨끗하게 죽는 것이 옳다 하여 대왕포(大王浦) 물가 높은 바위 위에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사비수 깊은 물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이러한 일로 인하여 이 바위를 낙화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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