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현 崔益鉉
반외세의 선봉에 선 유학자
모덕사
충청남도 청양군 목면 송암리에 있는 조선 말기의 사당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52호. 조선 말의 유림 최익현(崔益鉉)을 배향하고 있다. 송암리 장구(長久)마을에 최익현이 와서 살았는데,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906년 청양군내 유림들이 발의, 1913년에 공덕사(恭德祠)라는 명칭으로 건립되었다.
광복 후 사우를 중수하고 고종의 밀지(密旨) 내용 중 ‘慕卿宿德(그대의 큰 덕을 사모함.)’에서 ‘慕’자와 ‘德’자를 따서 모덕사라 하였으며, 1982년과 1985년에 유물전시관·장서각(藏書閣) 등을 건립하고 고택(古宅) 등도 보수하였다. 1982년부터 모덕사관리사무소를 두어 관리하고 있다.
최익현
통상은 곧 침략이다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19세기 말 외세가 이 땅에 밀려올 때에 가장 줄기차게 저항운동을 벌인 대표적인 유림이었다. 그리고 끝내 그 과정에서 유폐된 땅인 대마도에서 죽었기 때문에 민족운동의 선봉으로 꼽혀왔다.
최익현은 경기도 포천 출신으로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런 가정적 배경 속에서 그의 아버지는 총명한 아들의 출세를 위해 이사를 다니며 아들의 교육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최익현이 양평에서 많은 제자를 기르고 있던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 들어간 것은 열네 살 때였다.
어린 그는 아버지의 돌봄에 힘입어 화서에게서 성리학의 깊은 이치를 열심히 익혔다. 그리하여 김평묵(金平默), 유중교(柳重敎)의 뒤를 따라 고제(高弟)의 반열에 끼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아버지의 희망을 충족시켜 주었다.
부산에서 최익현의 운구행렬이 시작되었을 때 수많은 유림과 민중들이 뒤를 따르면서 그의 애국심과 의기심을 본받으려 했다. 그는 민족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누구보다도 열정을 바쳤다.
화서의 문인 대부분은 세도정치라는 파행적 지배구조에 반감을 보여 벼슬길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와 달리 과거공부에도 열중하여 1855년 문과에 급제했다. 그 뒤 그는 벼슬아치로서 순탄한 길을 걸어 사헌부 장령을 지냈고 정3품의 반열에까지 들었다. 그러나 그는 언관(言官)의 자리에 있으면서 흥선대원군이 벌인 경복궁의 중건과 이에 따른 당백전(當百錢)의 남발에 대해 격렬하게 실정을 지적한 상소를 올린 탓으로 한직으로 밀려났다. 이때부터 그는 흥선대원군의 눈 밖에 났으나 조야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그 뒤 양주 직곡에 은거해 있었는데, 이미 친정을 단행한 고종은 그에게 동부승지와 공조참판 등의 벼슬을 내리며 조정에 나오게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상소를 올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등의 비정을 공격했다. 이 무렵 그는 민씨들과 연결하여 흥선대원군을 실각시키는 데에 앞장섰다. 그러나 고종은 그에게 형식상으로 제주에 유배시키는 조치를 내렸을 뿐이었다.
그는 개항 직전에 풀려났다. 그리고 곧 개항이 단행되자 다시 상소운동을 벌였다. 그는 척화의 입장에서 결단코 화의를 끊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때 화서의 문인들인 김평묵, 홍재학(洪在鶴) 등이 이른바 척사위정운동을 크게 벌이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서양세력과 일본이 외교통상을 요구하는 것을 철저하게 막아야 한다는 운동을 편 것이다.
이때 최익현도 이단을 배격하고 정학을 높여야 한다는 논지를 계속 폈고 또 전통적 화이관(華夷觀)에 입각하여 소중화(우리나라를 뜻함)를 잘 보전해야 한다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통상을 거부해야 할 현실적 조건으로, 첫째 우리의 물건은 한정이 있고 저들의 요구는 끝이 없을 것이요, 이를 만족시켜 주지 못하면 침략과 약탈을 일삼을 것이라는 점, 둘째 저들의 물건은 사치스럽고 기이한 노리개로 한없이 생산되는데 이것이 나라에 들어오면 백성들의 마음을 좀먹고 풍속을 해친다는 것, 셋째 왜는 양적(洋賊)과 같으니 그들과 함께 사학(邪學)인 천주교가 들어와 인류는 금수가 된다는 것 따위였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통상이 곧 침략과 연결되는 것이요, 또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과 인수론(人獸論)이 제기된 것이다. 곧 일본과 서양을 동일선상에 놓고 본 것이요, 종래 중화와 오랑캐로 구분되는 화이관이 인간과 짐승의 갈림으로 변화한다는 세계관으로 바뀌어진 것이다.
군신의 의리는 끝났다
그는 이제부터 척사위정 세력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이 상소로 인해 그는 다시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그 뒤 약 20년 동안 민씨정권에 대립되는 언행을 삼가며 오직 학문에만 열중했다.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맞서 일본 · 미국 · 중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조선책략》의 내용을 두고 논란을 벌일 적에도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또 우리의 전통적 관복을 간편하게 고쳐야 한다는 복제개혁의 논의에 대해 선비들이 반대에 나설 때에도 입을 다물었으며, 1894년에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그 책임을 민씨에 묻는 여론이 들끓어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일부에서는 최익현과 민씨 사이에 어떤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있다고들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민씨 문벌정치가 물러가고 개화정부에 의해 새로운 정책이 제시되자 최익현은 다시 이에 맞서 과감히 일어섰다. 1895년에 복제개정(服制改定)이 단행되자 여기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이 상소에서 일본에 망명한 박영효(朴泳孝) 일당에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만국공법(국제법)과 조약의 준수를 촉구했다. 이전에는 이를 근본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때에 와서 국제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변화를 보여준 것이다. 이제 전통적 화이론이나 인수론은 새로운 시대 상황에 맞게 변화 · 적응이 필요했던 것이리라.
이때부터 그는 다시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붓을 멈추지 않고 글을 올려 항의하거나 중단을 요구했다. 특히 1904년과 1905년 일진회 등이 조직되고 을사조약이 추진될 적에 그의 활동은 참으로 눈부셨다. 그리고 단발령이 시행될 때에는 그의 격렬성이 더욱 드러났다. 그는 상투를 자르는 짓은 정신을 좀먹는 지름길이라 주장하여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 외쳤다. 고종이 그의 건의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자, “아아, 40년 군신의 의리는 여기서 끝났습니다”고 외쳤다. 평상시 같으면 죽음을 내릴 정도의 언사였다.
을사조약의 체결 때에도 그는 마지막 저항운동을 벌였다. 그는 이를 헛된 조약이라 규정하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에게 이웃 나라가 있어도 스스로 외교하지 못하고 타국을 시켜 외교하니 이것은 나라가 없는 것이요, 우리에게 토지와 국민이 있어도 스스로 주장하지 못하고 타국을 시켜 대신 감독하게 하니 이것은 군주가 없는 것이다. 나라가 없고 군주가 없으니 우리 3천리 국민은 모두 노예이며 신첩(臣妾)일 뿐이다. 남의 노예가 되고 남의 신첩이 된다면 살아도 죽는 것만 못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조약을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런 현실인식은 점차 뚜렷해져 철도, 광산, 어장, 삼포, 해관세, 통신기관 등 이권을 빼앗기는 경제적 인식에까지 이르렀고, 이에 따라 일제의 침략을 분명하게 국권침탈로 파악하게 되었다.
의병 봉기로 맞서다
그래서 여기에 대응하는 방법으로 버리고 가는 것, 죽음을 맞이하는 것, 의거하여 적을 토벌하는 것 등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자신은 그중에 의거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강한 대일항쟁 의지를 천명했다.
이에 첫 번째로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와 담판하여 조약 문서를 찢어버리고 이어 만국공법에 따라 주권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국제사회에 고발하여 이를 제지케 해야 한다고도 했다. 물론 이런 방법이 전혀 먹혀들 리가 없었다. 그는 다음 단계로 무력항쟁에 나섰다.
최익현은 먼저 김학진(金鶴鎭), 이도재(李道宰), 곽종석(郭鍾錫), 전우(田愚) 등 각 지역 명망가들에게 편지를 보내 의병봉기를 제의했다. 그러나 별 반응이 없었다. 최익현은 의병을 모집하려 전라도 태인에 자리 잡고서 같은 화서계열인 충청도의 유인석(柳麟錫)에게 호응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북쪽에서는 유인석, 남쪽에서는 최익현이 봉기하기로 약속했다.
결국 최익현은 호남유생 임병찬(林炳瓚) 등과 손을 잡고 장성 유생 기우만(奇宇萬)의 협조를 얻어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모집했다. 그의 지휘를 받은 의병부대가 순창에 이르렀을 때에 진위대(鎭衛隊)의 공격을 받아 그는 체포되었다. 이렇게 싸움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만 것은 그들의 동원능력도 문제였거니와 순전히 의기 하나로 뭉쳐져 전투능력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최익현은 대의에 충실한 지사였고, 또 춘추대의 또는 존명사상의 대일통론(大一統論)에 입각한 명분론자였다. 비록 의병항쟁에는 실패했으나 그의 체포 소식은 커다란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최익현은 대마도에 구금되는 몸이 되었다.
의병봉기의 본보기가 되다
처음 그는 대마도에서 일제가 주는 음식을 거절하다가 그 쌀이 조선에서 가져온 것임을 알고 절식을 중단했다. 그러나 풍토병에 걸려 끝내 죽고 말았다. 그의 이런 죽음은 극적이어서 많은 사람 입에 “굶어 죽었다”는 소문을 낳게 했다. 그리고 민중들은 항일의지를 담아 그를 의사, 열사로 추앙했다. 그의 운구행렬이 부산에서 시작되었을 때 수많은 유림과 민중들이 뒤를 따라 오면서 애국심과 의기심이 충동되었다.
그에 대해 필자는 이런 평가를 내린 적이 있다.
봉건체제의 변혁을 통한 정치적 자주, 경제적 자립을 획득하는 반봉건의 과제에 대해서는 보수반동이었고,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지키고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반제의 과제에 대해서는 인식을 갖고 있었으나 반제투쟁의 동력과 필연성을 구체화시키지 못한 중세적 한계를 지닌 대응론이었다.
- 《조선후기 정치사상과 사회변동》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통유림으로서 국권이 상실되었을 때 자기 몫을 다했던 것이요, 그 영향은 여러모로 크게 일어났다. 그리하여 후기 의병봉기에 그는 하나의 모델이 되었으며 또 박은식(朴殷植) 같은 민족사학자에 의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큰 소재를 제공해 주었다.
물론 최익현은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현실대응 논리를 폈는데, 마지막 단계에서 앞에 든 세 가지 출처관을 제시하고 의병항쟁의 대열에 나선 것은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던진 것이다.
민족모순의 해결을 위해 그는 결국 목숨을 바쳤으며, 이로 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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