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거리소개

안성맞춤랜드

꼴통 도요새 2024. 1. 10. 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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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맞춤랜드

주소: 경기도 안성시 시청길 25(봉산동)대표전화 031) 677-1330

안성맞춤랜드

2012년 개장한 시민공원입니다. 남사당공연장, 천문과학관, 공예문화센터, 안성맞춤캠핑장, 사계절썰매장등의 시설을 운영 중이며 잔디광장, 야생화단지, 수변공원, 분수광장 등을 조성, 예술과 과학, 자연이 만나는 복합 문화예술 공간인 동시에 시민들의 편안한 휴식처입니다.

안성맞춤의 유래가 된 안성 유기

다른 장과 달리 안성장에는 중간 상인이었던 객주들이 많았는데, 예를 들면 과일장수는 그 종류에 따라 배만 다루는 배(梨)도가, 밤만 다루는 밤(栗)도가, 감만 다루는 시(柹)도가로 나뉘었고, 옷감장수는 염포가, 면포가, 견포가로 나뉘었다.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이 지은 『허생전』의 주인공인 허생이 장사를 해서 성공했던 곳도 바로 안성장이다.

그때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글 읽기만을 좋아하고 아내가 바느질품을 팔아 겨우 입에 풀칠하는 셈이던 남산골의 허생이 서울 장안에서 제일 이름난 부자인 변씨를 찾아갔다. “내 집이 가난해서 무엇을 조금 시험해볼 일이 있어 그대에게 만금을 빌리러 왔소하자, 변씨는 그러시오하고는 곧 만금을 내주었다. (······) 허생은 만금을 얻어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언뜻 생각하기를 저 안성은 기()와 호()의 어우름이요, 삼남(三南)의 어구렷다하고는, 곧 이에 머물러 살았다. 그리하여 대추, , , 감자, 석류, , 유자 등의 고실을 모두 배() 값으로 사서 저장하였다.

허생이 고실을 도고(都庫)하자, 온 나라가 잔치나 제사를 치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지 얼마 아니 되어서 앞서 허생에게 배 값을 받은 장사치들이 도리어 열 배를 치렀다. 허생은 어허, 겨우 만금으로 온 나라의 경제를 기울였으니, 이 나라의 얕고 깊음을 짐작할 수 있구나하고는 곧 칼, 호미, , 명주솜 등을 사가지고 제주도에 들어가서 말총을 모두 거두면서 몇 해만 있으면 온 나라 사람들이 머리를 싸지 못할 거야라고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망건 값이 과연 열 배나 올랐다. 그처럼 번성했던 안성장이 경부선 열차가 통하면서 물산이 분산되어 그 기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안성은 교통의 요지 또는 물산의 집합체로서 큰 구실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안성맞춤이라는 말로서 온 나라 사람들에게 널리 통용되고 있는 안성유기의 고장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 안성에서 교육 운동을 하는 등 안성 지역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는 김태영은 『안성기략(安城記略)』에서 “안성은 고래로 유기가 명산이다. 안성유기는 견고하고 정교하게 제조하여 전국에서 환영을 받아왔으니 이로 인하여 물품이 견고하든지 사기가 확실하든지 혹 홀치지물(忽致之物)이 불의지수(不意之需)에 가합(可合)하든지 하면 안성맞춤이라 하여 전국에 통용되나니”라고 하여 안성맞춤이라는 말이 안성유기에서 비롯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의 말처럼 조선시대에 서울 양반들이나 돈 많은 부자들은 반상기나 제기를 주문해서 썼는데 유독 안성유기의 생김새가 아담해서 나라 안팎의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든 맞추어 만든 것 같이 잘 맞는다는 뜻으로 쓰이는 ‘안성맞춤’이라는 말이나 “안성유기나 반복자 연엽주발은 시집가는 새아씨 발에 마침이라”라는 노래에까지 오르내렸던 안성유기가 공물 품목에 들게 되면서 이곳 사람들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한양에서 “안성유기 열 벌만 만들어 올려라” 하면 이것을 탐낸 이곳 관리들이 스무 벌, 서른 벌을 만들어서 나머지는 제가 가지는 통에 살길이 막막해진 안성 사람들은 꾀를 내어 현감이나 군수가 새로 부임하면 오자마자 영세불망비부터 세워줬다고 한다. 그러한 사연을 지닌 영세불망비가 안성공원에 44기쯤 모여 있어 나라에서 단일로는 제일 많다고 한다. 안성공원에는 소설 『안성장날』을 지은 이봉구의 문학비도 있고,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오명항토적송공비(吳命恒討賊頌功碑)가 암행어사로 이름을 날렸던 박문수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한쪽에는 석남사 주변에서 출토되었다는 보기에도 흉한 불상도 서 있다. 1914년 안성시에 편입된 죽산현은 “땅은 메마르고 가난하여 생계수단이 막막하다”라고 실려 있는데, “죽산현의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칠현산(七賢山)은 속리산에서부터 비롯한 한남금북정맥이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을 나누는 산이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 서문에서 “이름난 명산과 그 산에서 뻗어 내린 지산(支山)은 산을 이루는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는 홀로 우뚝 솟은 것도 있고, 나란히 솟은 것도 있고, 줄줄이 겹쳐져 솟아 있는 것도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처럼 칠현산은 수많은 명산에서 이어져 내려와 두 개의 정맥으로 나뉘는 이 지역의 명산이다. 이 산의 이름이 칠현산이 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바로 인접한 칠장산 칠장사에 혜소국사라는 고승이 있었다. 혜소국사가 아미산 중턱에 조그마한 암자를 짓고 불도를 닦던 중 암자 근처에 우물을 파고 표주박을 띄워놓았다. 당시 칠장사 아래에는 일곱 명의 도적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도적들은 혜소국사의 암자에 있는 우물터에서 현란한 빛줄기가 뻗쳐 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들이 우물로 다가가 보니 표주박처럼 생긴 황금 덩어리들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이 아닌가. 견물생심이라고, 도적들은 금빛이 감도는 표주박을 각자 하나씩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집에 와서 꺼내놓자 조금 전만 해도 금빛이 찬란했던 표주박이 그냥 표주박으로 변하고 말았다. 실망에 빠진 도적들은 표주박을 다시 가지고 가서 우물에 띄웠다. 그랬더니 표주박은 황금빛으로 변하였다. 그래서 또다시 표주박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 꺼내보면 또 그냥 표주박이었다. 이러기를 몇 차례 반복한 후에야 도적들은 무엇인가 설명할 수 없는 신령한 기운이 있는 것을 깨닫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오늘 일어난 일은 아무래도 부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신 모양이네. 저 암자에서 도를 닦고 있는 스님께 사실대로 말하고 용서를 구하세.” 늦게나마 잘못을 뉘우치고 혜소국사에게 찾아가 사실대로 이야기하자 혜소국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헛된 욕심을 품지 않는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보물로 보이는 법입니다.” 이 말을 들은 도적들은 수도승이 되었고, 마침내 도를 닦아서 도통하게 되었다. 그 뒤부터 이 산을 칠현산으로 부르게 되었고, 이곳의 암자 이름을 일곱 명의 힘센 장사가 중이 되었다 하여 칠장사라고 하였다. 안성은 온 나라 물산의 집결지였을 뿐 아니라 안성유기의 고장이기도 하다. 김태영은 『안성기략』에서 “안성은 고래로 유기가 명산이다. 안성유기는 견고하고 정교하게 제조하여 전국에서 환영을 받아왔으니”라고 하여 안성맞춤이라는 말이 안성유기에서 비롯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의 말처럼 조선 시대에 서울 양반들이나 돈 많은 부자들은 반상기나 제기를 주문해서 썼는데 유독 안성유기의 생김새가 아담해서 나라 안팎의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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