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및 전설

신숙주[ 申叔舟 ]

꼴통 도요새 2024. 3. 4.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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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 申叔舟 ]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영의정을 지냈으며 4차례 공신의 반열에 올랐던 인물.

위치: 경기 의정부시 보한재길 69

 

출생-사망: 1417~1475

본관: 고령

자: 범옹

호: 보한재, 희현당

시호: 문충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 또는 보한재(保閑齋)이다.

1417년 출생하였고 아버지는 공조 참판 신장(申檣)이며, 어머니는 지성주사(知成州事) 정유(鄭有)의 딸이다.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1438년(세종 20) 생원과 진사를 뽑는 시험에 모두 합격하였고, 이듬해 시행된 친시문과(親試文科)에서 을과로 급제하여 전농시(典農寺) 직장直長)을 시작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447년 중시문과(重試文科)에서 다시 을과로 급제하는 등 일찍부터 그 재능을 인정받아 집현전 부수찬(副修撰), 응교(應敎), 장령(掌令), 집의(執義), 우부승지(右副承旨), 좌부승지(左副承旨), 직제학(直提學)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하는데 기여하였다.세종대왕이 사망하고 문종이 보위에 올랐지만 건강이 나빠 일찍 사망하고 어린 단종이 왕위를 이어받아 왕권이 취약해졌다. 신숙주는 정치적으로 수양대군 편에 있었고 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킨 직후 곧바로 도승지에 임명되었고, 세조가 등극했을 때는 대제학에 오르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단종복위를 위해 거사를 일으켰던 성삼문등 집현전 동료들을 척결하는데 역할하였고, 금성대군과 단종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여 변절자로 불렸다. 이후 병조판서, 예조판서, 우찬성, 대사성 등을 거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내 삼정승의 요직을 모두 역임하는 등 조선 초기 핵심 정치지도자로서 활약하였다.그는 서장관의 직책으로 일본은 물론 명나라를 수차례 다녀오는 등 뛰어난 외교술도 가지고 있었다. 세종 때는 훈민정음 창제를 위한 자료 수집과 언어학을 배우기 위해 명나라 한림학사인 황찬(黃瓚)을 만나러 13차례나 다녀왔고, 문종 때는 정사(正使)로 가는 수양대군을 모시고 서장관으로 함께 다녀왔다. 이후에도 세조의 왕위 등극을 알리기 위한 주문사(奏聞使)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뿐만 아니라 명나라에서 오는 사신을 접대하는 접반사(接伴使)의 역할도 담당하는 등 국내외의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세종 때 명나라 사신 예겸(倪謙)이 조선에 왔을 때 많은 조선의 대신들이 그의 모습을 보고 학문이 짧다고 무시하였으나, 막상 한강을 유람하면서 시문을 주고 받을 때는 그를 당할 자가 없어 급히 궁궐에 있던 신숙주가 가서 그를 상대하여 서로 형제의 의를 맺었다는 기록도 전한다. 조선 초기 정치적 격동기에 벼슬생활을 하면서 많은 공신에 추대되기도 하였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켰을 때 정난공신(靖難功臣), 세조가 즉위한 후 좌익공신(佐翼功臣), 남이(南怡)의 옥사를 처리한 후 익대공신(翊戴功臣), 성종이 즉위한 후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오르는 등 정치적 사건의 핵심에 늘 함께하였다. 이로 인해 당시 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으로 대표되는 정치논리 상황에서 변절자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외교와 국방 등 두루 능력을 발휘하였다.  1460년(세조 6)에는 동북방면에서 야인(野人)의 침입이 잦아지자 좌의정의 신분으로 있다가 강원·함길도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전쟁에 출정하였다. 이 전쟁에서 뛰어난 전술을 구사하여 야인의 소굴을 소탕하고 돌아오는 등 병법에도 조예가 깊었다.그는 학문적 소양이 깊어 다양한 책을 편찬하는데도 업적을 남겼다.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의 편찬은 물론 《동국통감》의 편찬을 총괄하였고, 《국조오례의》도 개찬하였다. 그리고 일본을 다녀 온 후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일본의 풍물과 정치세력, 외교시 필요한 사항 등을 상세하게 밝혀 놓은 《해동제국기》를 저술하여 향후 일본과의 교린외교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이 외에도 송설채에 조예가 깊어 〈몽유도원도〉의 찬문에 그의 글씨가 남아 있고, 그의 해서체는 명나라 사신으로 왔던 예겸의 시집인 〈화명사예겸시고(和明使倪謙詩稿)〉에 남아있다. 또한 저서로는 《보한재집(保閑齋集)》이 있으며, 한강 하류인 마포에 담담정(淡淡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문인들과 교유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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