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대도호부 관아(江陵大都護府 官衙) & 강릉 중앙시장
1. 위치: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용강동에 위치
2. 탐방일시: 2025년 2월11일(토)
※ 왕제산, 칠봉산 산행 후 잠시 시간이 있어
강릉대도호부와 부근에 위치한 강릉 중앙시장을 찾았다.
3. 날씨: 맑고 강한 찬바람
4. 누구랑: 나 홀로
5. 특징:
강릉대도호부 관아(江陵大都護府 官衙)
강릉 대도호부 관아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던 건물터이다.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고려 태조 19년(936)에 세워져 83칸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객사문(국보)만 남아 있다. 객사문은 고려시대 건축물 가운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몇 안 되는 건물 가운데 하나로, 공민왕이 쓴 ‘임영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1993년에 강릉 시청 건물을 지을 계획으로 실시한 발굴 조사한 결과,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관아 성격의 건물터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는 자리임을 알게 되었다. 또한 조선시대 「임영지」의 기록을 통해 이 유적의 중요성과 옛 강릉부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거의 모두 헐렸고 지금은 강릉 객사문과 칠사당만이 제자리에 남아 있다. 이 외에도 관아 건물의 일부가 남아 있는데, 강릉시 남산에 위치한 오성정, 금산의 월화정, 경포의 방해정 등이 관아 건물들의 일부를 옮겨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 정자들은 조선시대에 강릉도호부 관아의 건물들 중 일부를 헐었을 때 그 자재들을 가져와 새로 세웠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에 임영관을 헐고 강릉보통학교를 세웠다. 1975년 9월에 강릉보통학교 자리에 강릉경찰서가 들어섰다가, 강릉경찰서가 포남동 신청사로 이전함에 따라 공터로 남아 있었다. 이 공터에 강릉시청사를 신축하기 위해 땅을 파던 중에 관아 유구가 발굴되면서 공사가 중단되고 발굴조사가 행해졌다. 1993년 발굴조사 이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강릉중앙시장
강릉 지역은 과거 예의 땅이었고, 고구려가 지배할 때에는 하서랑, 하슬라라고 불렀다. 신라 때 명주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는데, 지금의 이름인 강릉으로 불린 것은 고려 충렬왕(1308) 때였다. 강릉 중앙시장은 지역 이름에서 유래했다.
강릉은 예부터 영동 지역을 대표하는 도시였다. 남대천을 비롯한 여러 강들이 비옥한 평야를 일구어놓고, 기온이 온난한 데다 강수량이 적절하고 바다와 면하고 있어 예부터 농산물과 수산물, 임산물 등 물산이 풍부했다. 또한 백두대간 너머의 영서 지역과 오래전부터 교역을 해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시장이 발달했다.
조선시대에는 강릉 지역에 3개의 장이 섰는데 일제강점기에 들면서 교통의 변화와 상권의 확대, 인구의 증가 등 여러 요인에 의해 많은 시장이 생겨났다. 상권의 중심이었던 강릉 읍내장은 조선시대에 성의 안과 바깥에서 번갈아 장이 섰지만 1907년 통합을 하고 1914년 장옥을 세우고 번영을 위한 기초를 닦았다. 또한 일제강점기 후반에 수해와 화재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재난을 극복하고 시장의 규모를 키웠다. 오늘날 강릉 중앙시장은 1956년 일제강점기 때 제2시장이라고 불리던 이름을 바꾸고 크게 번영하기 시작했다. 1979년에 과거의 장옥을 철거하고, 새롭게 신축해 사설시장으로 변모한 이후 지금까지 강릉 상권을 이끄는 중심 시장 역할을 하고 있다. 강릉 중앙시장 옆에는 수산물을 주로 파는 성남시장과 새벽에 문을 여는 강릉 번개시장이 함께 개설되어 있다.[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강릉 중앙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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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동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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