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및 전설

월출산

꼴통 도요새 2012. 11. 16.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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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의 전설

 

영암 월출산 :

월출산에는 움직이는 바위라는 뜻의 동석(動石) 3개가 있었는데, 중국 사람이 이 바위들을 산 아래로 떨어뜨리자 그 가운데 하나가 스스로 올라왔다고 한다. 그 바위가 바로 영암인데, 이 동석 때문에 큰 인물이 많이 난다고 하여 고을 이름도 영암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주지봉 :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에 있는 산.

북쪽 기슭의 성기동은 백제 근구수왕 때의 학자로 일본에 유교문화를 전파한 왕인과 통일신라의 승려 도선국사의 출생지로 이들에 관한 유적과 전설이 전한다.

전승 설화 : 정천대 유래, 양달사와 장독골샘 전설, 용바위 유래, 왕인과 성기동설화

도선국사 (군서면 구림)

 

신라 시대 말엽이었습니다.
우람한 월출산 기슭에 자리잡은 성기동 마을 처녀가 북풍이 매섭게 불어 오는데도 불구하고 빨래감을 이고 성기동 통샘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날씨가 이렇게 춥다냐?"
혼자 소리로 중얼거리던 처녀는 빨래감을 통샘부근에 내려 놓았습니다.
월출산에서 흘러 내리는 맑은 물줄기가 유난히 손이 시럽게 보였습니다.
처녀는 한참동안 흘러 내리는 시냇물을 바라보다가 빨래감을 맑은 물에 적신 후 방망이질을 해대기 시작했습니다.
빨래가 거의 끝날 무렵 처녀는 손이 시리워 두손을 겨드랑이에다 대고 손을 녹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파란 오이 하나가 떠내려와 처녀의 발밑 물 위에 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추운 겨울에 웬 오이가 떠내려 왔을까?"
처녀는 혼자 중얼거리면서 방망이를 주워 들고는 오이를 떠나 밀며, 마지막 남은 빨래를 하기 시작 했습니다.
오이는 처녀가 떠다 밀자 시냇물을 따라 흘러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빨래를 다 마쳤을 때였습니다. 조금전에 빨래 방망이로 떠 밀어내었던 그 오이가 다시 흐르는 물줄기를 거술러 처녀가 있는 곳에 와서 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한 일도 다 있네. 내가 방금 떠 밀어 내었는데 오이가 거슬러서 다시 오다니..."
처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파란 오이를 물에서 건져 내었습니다.
그리고는 한 입 배어 물었습니다. 빨래를 한 뒤라서인지 오이맛이 무척 맛있었습니다.
처녀는 오이 하나를 다 씹어 먹고는 빨래감을 이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후 몇 개월이 지난 때 였습니다. 처녀의 배가 똥똥하게 불러졌습니다.
"너, 배가 왜 그러냐?"
"모르겠어요."
깜짝 놀라 묻는 어머니의 물음에 처녀는 고개를 떨구며 대답했습니다.
"예삿일이 아니구나. 너 혹 부정을 저지른 것 아니냐?"
"아니어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어요."
어머니는 처녀를 다그쳤습니다.
"바른대로 말해라, 동네 사람 부끄워서 어디 밖에라도 나갈 수 있어야지."
"어머니, 죄송해요."
마을 사람들은 이미 처녀가 사내를 보았다고 수근거렸습니다. 나쁜 소문은 빨리 퍼진다고 하듯이 별의별 억축이 나돌았습니다.
처녀의 부모는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처녀에게 바깥 출입을 하지 못하게 하고는 매일같이 처녀를 다그쳤습니다.
"그 사내가 누구냐?"
"정말이지 사내를 본적은 없어요."
"그게 정말이냐?"
"네."
"그렇다면 다른 이상한 일은 없었느냐?"
처녀는 울먹이다가 몇 달 전 빨래터에서 이상한 오이가 떠 내려와 그걸 먹었던 일을 기억해냈습니다.
"몇 달전 통샘에서 빨래하다가 오이가 떠 내려오길래 먹었어요."
"무슨 오이가 겨울철에 냇가에 떠 내려 왔다냐?"
"그걸 누가 믿겠니?"
"정말이어요."
딸의 진지한 대답이 있었지만 처녀의 부모는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 후 몇 달이 지나자 처녀는 우람하게 잘 생긴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거 원, 부끄러워서 살 수가 있어야지. 당장 공동묘지에다 버려라."

처녀는 아버지의 호령에 갓난아이를 부둥켜안고 공동묘지가 있었던 국사봉의 갈대밭에다 버렸습니다.
"아가야, 용서해라."
처녀는 울먹이며 아가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처녀는 그날부터 방에 틀어 박혀 울먹이며 아기 생각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아기를 버린지 삼일째 되는 날, 처녀는 버린 아기를 보려고 국사봉 숲 속을 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웬 일인지 아기를 놓아두었던 곳에 수 십마리의 비둘기들이 아기를 감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처녀가 아기 곁에 이르자 비둘기들이 하늘로 날아오르며 아기 주위를 빙빙 돌았습니다.
아기 주위에는 무수한 비둘기 깃털이 아기를 포근하게 감싸주고 있었습니다.
몇몇 비둘기는 아기의 입에 먹이를 물어다 먹이고 있었습니다.
아기는 처녀를 보자 방긋 웃었습니다.
"아가야!"
처녀는 와락 아기를 껴 안았습니다.
한참동안 아기를 껴안고 기뻐하더니 처녀는 아기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시 아기를 껴안고 오는 딸을 본 부모는 깜짝 놀랬습니다.
"아직도 살아 있더냐?"
"네."
처녀는 비둘기들이 아기를 품고 먹여 살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본대로 부모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이상한 일도 다 있구나."
처녀의 부모는 보통 아기가 아님을 깨닫고 그 아이를 집에서 키우도록 처녀에게 허락해 주었습니다.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났고 자라면서 보통 아이와는 달리 매우 총명하였습니다.
글 공부도 뛰어나고 또 활쏘기, 말타기 등 무술에도 뛰어난 재주를 보여 주위 사람을 무척 놀라게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주위 사람들의 시새움이 더욱 컷는지 몰랐습니다.
"애비없는 자식"
이렇게 놀리는 또래 아이들이 많고 또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웁자 하는 수 없이 절로 보내기로 했습니다.
당시 월산 뒤쪽에 초수동이라는 곳에 월암사라는 절이 있었습니다. 이때가 그의 나이 열 두 살 무렵이었습니다.
이때부터 도선은 불가에 입문하여 도를 닦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중국에서는 풍수지리에 밝고, 도가 경지에 이른 일행이라는 스님이 계셨습니다.
일행 스님은 천기를 보더니, 사람을 시켜 우리나라 월출산밑에 사는 기인, 도선을 데리고 오게 하였습니다. 도선으로 하여금 제자를 삼아 중국에 이롭게 할려는 계산에서 였습니다.
도선은 일행 스님 밑에서 풍수지리를 배우고, 도를 깨달은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물론 일행 스님의 심중을 이미 깨달았음은 물론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일행 스님보다 훨씬 놓은 경지의 도를 깨달아 도술을 부릴수 있게까지 되었습니다.
"스님, 일은 잘 되었는지요?"
중국의 황실 신하가 일행에게 물었습니다.
"네, 아마 도선은 제 나라에 돌아가 우리를 이롭게 할 것입니다."
다 일행 스님 덕분이지요."

"그런데, 지금도 계속해서 도선의 나라에서는 인물들이 많이 나와 우리나라를 위협해 올 것인데 그게 걱정이오."
중국의 높은 신하는 깜짝 놀라며 일행에게 통사정을 하였습니다.
"어찌 하면 좋겠소? 스님."
"글쎄용."
"스님께서 좋은 방도를 일러 주시구려."
일행 스님은 신가에게 우리나라를 제압할 방법을 일러 주었습니다.
"도선의 나라에 신령스런 산들이 많으니 도술을 부려 산세를 죽여야 하오. 아마 도선도 제나라 산세를 죽이고 있겠지만......"
"도선이 제 나라 산세의 맥을 끊고 있으니 문제될 것이 없지 않습니까?"
신하가 반문하자 일행 스님은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도선이 언젠가는 깨달아 오히려 우리의 일을 방해할 것이니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그럼 어떡 하면 좋겠습니까?"
"그러닌까 좋은 방도를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일행은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을 가다듬은 뒤, 신하에게 귓속말로 속삭였습니다.
"사람을 보내 도선의 나라 곳곳에 있는 산의 맥을 짤라야 합니다."
중국 황실에서는 사람을 우리나라에 보내어 우리 나라 높은 산, 즉 인물이 나올만한 산의 맥을 끊게 했습니다.
우리 나라의 어떤 곳에서는 산의 맥을 끊기자 붉은 피가 흘러 내리는 곳도 있었습니다.
도선은 이런 사실을 알고 백두산 상봉에다 중국 땅을 향해 철방아를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철방아를 밟아 방아를 찧었습니다. 그러자 중국에 큰 인물들이 죽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철방아를 한번씩 찧을 때마다 한 사람씩 중국의 큰 인물들이 죽어가자 중국 황제는 일행을 불렀습니다.
"요즘은 내 귀한 신하가 죽어가니 웬 일이오?"
"그건 바로 도선이의 짓입니다."
"그렇다면 당장 도선이를 불러 오게 하시오."
"소승이 부르면 오지 않을 겁니다. 이미 도선이 제 뜻을 알아차려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찌 하면 좋겠소?"
"황제의 명으로 불러 들이는 게 좋을 듯 합니다."일행이 황제께 말씀드리자 황제는 사신을 보내 도선을 잡아들이게 했습니다.
도선은 이미 그것을 알아차리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도선은 여러 절을 짓고 풍수지리에 밝아 여러 가지 좋은 일들을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도선은 고향을 떠나면서 구림에 있는 흰덕바위에다 자기의 적삼을 벗어 놓으며 말했습니다.
"제가 살아있으면 이 바위가 하얗게 변할 것이고 이 바위가 검으면 제가 죽은 줄 아시오."
비장한 각오로 한마디의 말을 남기고 도선은 고향을 떠났습니다.
지금도 이 바위가 구림에 남아있고 도선국사를 버렸다는 공동묘지가 지금에는 마을로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도선국사에 대한 죽음은 뚜렷히 밝혀진 바가 없고 여러 가지 전설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 오고 있습니다.

왕인과 성기동 (군서면 구림리)

 

왕인은 일본 아스카 문화와 나라 문화의 성립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백제 사람이다.
도일의 연대가 명확치 않으나 서기 285∼405년 사이임은 분명하다.
그는 일본에 천자와 논어를 전하고 야공, 직공등 기술을 가르쳤으며 황실에서 왕자들의 사부노릇을 하는 등 일본인들의 존경을 모아 오늘날도 일본인들은 대판부 천북군 고석정의 고려신사에 그를 모시고 있으며 히라가다에 묘소가 있다.
왕인박사가 어느곳에 닿았는지 그의 선대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전혀 알려진 바 없고 다만 『일본서기』 및 『고사기』에 짤막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문헌에는 거의 없고 한말 한치윤이 쓴 해동역사에 다소의 기록이 있으나 이것마저 일본 문헌을 이용한 데 불과하다.
왕인의 유허지라고 정화를 서두르는 곳을 성기동 또는 성기동 성지골 등으로 불리는 곳이다.
구림 본마을에서 7백m 거리의 산허리다. 이곳 냇가에는 『조암』이라 각한 돌구유가 있고 『고최씨원금조가장』이라 각한 바위도 있고 기와 파편이 많이 깔려있다.
이곳서 남으로 500m 거리의 계곡은 옛부터 '산태골'이라 하고 남쪽으로 3백m 거리의 산둥성이를 '왕부자터'라 하며 성지골과 구림사이 등성이를 '돌정고개' 또는 '불무청'이라 한다.
또 이 골짜기 뒷산을 주지봉 또는 문필봉이라하고 이산 중턱이요, 성지골서 1km거리를월대암이라 부르는데 이바위 밑에 책굴과 석인상이 있다. 이곳 굴은 폭 2.5m, 길이 7m, 높이 5m 가량으로 베틀굴이라고도 하고 굴 앞 60m 거리의 바위를 '지침바위'라 한다.
책굴앞 석인상은 2.5m 가량인데 일부에서는 석불이라 하고 일부에서는 유가의 선비상이라고도 하며 이 석인상 곁에 옛날 문수암이 있었던 터에 20여년전까지도 조선시대에 지은 문산재라는 공부방이 있었다.
전설로는 왕인이 성지골에서 낳아 이곳 책굴에서 공부하고 공부방을 만들어 후진을 가르쳤으며 지침바위에서 닥나무 껍질을 벗겨 종이를 만들었다고 전해온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중심으로, 이곳 사람들은 백제직지태자가 환국하면서 왕인박사를 일본황태자의 스승으로 천거했기 때문에 정든 고향을 버리고 몇 명의 종자와 함께 천자책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간척공사로 지금은 육지가 되었지만 옛날에는 중요한 포구였던 상대포(일명 배첩골)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는 것이다.
이 상대포는 구림서 서북쪽 3.5km지점이다. 왕인은 성지골을 떠나면서 마을이 보이는 돌정고개에 이르러 마을을 돌아보고 정든 고향과 작별했기 때문에 '돌정고개'라는 지명이 생겼다 한다.
왕인이 떠났다는 상대포와 도선이 떠났다는 탈천포는 각각 4km의 거리다.
전설을 근거로 이곳 성기동은 76년 도지정문화재가 되고 87년 왕인묘(王仁廟)를 설립, 이 일대를 정화했다.

구정봉과 신령암 (영암읍 군서면)

월출산은 해발 808.7M의 영암(靈岩)군과 강진(康津)군계(郡界)에 있는 소금강(小金剛)이다.
백제(百濟)때 월내산(月來山) 이라 했다고 하나 신라통일(新羅統一) 이후 월출(月出) 또는 월생산(月生山)이 됐다.(사실은 '달내뫼'의 한자표기다)
이 이름은 구림(鳩林)에서 보면 달이 마치 이 산에서 생겨나 떠오르듯 보이기 때문이었다 한다.
전남평야(全南平野)를 가로질러 천산만봉(天山萬峰)을 이룬 이 산의 최고봉은 천황봉(天皇峰)이고 그 아래 서북쪽 738고지(高地)를 이룬 구정봉(九井峰)이 있다.
이 구정봉은 30M이상의 암반으로 이뤄졌다.
그 넓이는 장정 50여명이 앉을 수 있다.
직경 2∼3M 안팎의 웅덩이가 패여 물이 항상 괴어 있다. 이 웅덩이를 일러 정(井)이라 하고 이 정상의 암반을 신령암(神靈岩) 이라고도 하며 삼동석(三動石) 이라고도 한다.
이 우물은 옛날 동차진이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 벼락을 맞아 죽을 때 생긴 것이라 전해온다.
동차진은 구림(鳩林)에 유배되어 내려와 살던 어느 장군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동차진은 낳을 때 겨드랑이에 깃털을 달고 왔으며 백일이 되자 이빨이 났다. 세 살이 되자 멧돌을 번쩍들어 올렸다.
일곱 살 나던 해 어른들처럼 나뭇짐을 다고 다녀 '구림에서 장사났다'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평범한 자식으로 기르고 싶었는데 어느날 그의 집에 들른 노인의 말에 생각을 달리 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사람이란 자고로 때를 만나야 하고 사람을 만나 기량을 닦지 못하면 비운에 빠지게 되는 것이오"라며 아들을 자기에게 맡기라 이르는 것이었다.
사람을 만나 가르침을 받지 못하면 자식이 비뚤어진다는 말에 놀란 노모(老母)는 동차진을 노인에게 맡겼다.
동차진은 괴 노인을 따라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 10년 도술을 익혔다.
10년의 세월이 흘러 동차진은 그의 노모를 찾아 집에 왔다. 동차진의 어머니는 자식의 능력을 실험하기 위해 자식에게 내기를 걸었다.
"차진아, 그 동안 쌓은 네 능력을 보고 싶구나, 내가 밥을 지을 동안 너는 저 산봉우리에 올라 석성(石城)을 쌓아라"
이 시합에서 노모가 이기자 차진이 억울해 하며 돌을 내던지고 깨뜨렸다.
이를 본 동차진의 어머니는 아들을 타일렀다.
"듣거라, 항시 자만과 만용이 사람을 망치는 법이란다"
이 무렵 북쪽 오랑캐들이 국경을 넘어 침공해 왔다.
이를 전해들은 노모는 아들의 도술을 쓸곳이 생겼다고 기뻐 나가 싸우도록 일렀다.
"그까짓 오랑캐쯤은 내가 직접 나가지 않고도 섬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어머니께 이르고 구정봉(九井峰)에 올라간 동차진은 한동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노략질하던 오랑캐들의 머리 위에 돌멩이가 수없이 쏟아져 몰살 시켜 버렀다.
이때 하늘에서 뇌성이 울리며 옥황상제의 노기 서린 외침이 울려왔다.
"네 이놈 동차진아! 네가 익힌 도술은 바르고 정정당하게 쓰라는 것이었지 오만 방자하게 쓰라는 것이 아니다.
네놈의 하는 행실을 보아하니 인간을 규도 하는데 도술을 쓰기보다 네 공명심이나 만용을 부리는데서 화를 부를 것인즉 살려 둘 수 없다."
벼락이 내려 아홉번에 때려 죽여버렸다.
이처럼 비운에 죽고만 동차진은 사람들이 이 봉(峰)에 올라올 때마다 세 번을 움직여 다시는 자신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응징하였으며 그 때문에 신령암(神靈岩) 삼동암(三動岩)이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이는 삼동석이 구정봉을 이르는 것이 아니고 월출산(月出山)에는 열 사람이 움직이나 한 사람이 움직이나 그 흔들림이 똑같은 동석(動石) 세 개가 있어 이를 이르는 것이라 한다.
그 바위를 확실히 지적하지 못하지만 영암(靈巖)이란 지명(地名)도 이 삼동석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도갑사 대웅전 (군서면 도갑리)

 

 

 도갑사는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에 있다 이 절 입구의 해탈문은 국보 제50호이고 불탄 대웅전은 도지정문화재 42호였으며, 미륵암에 있는 석조여래좌상은 보물 제89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국보로 지정된 해탈문은 1473년에 지은 건물이고 대웅전은 1776년(어떤이는 1651년)에 세운 것이라 한다.
오늘날 남은 해탈문은 도갑사 중창 때 묘각왕사가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묘각은 낭주최씨 최수미로 선종판사를 지냈고 세조로부터 총애를 받았었다.
당시 도갑사는 암자를 12개나 거느리고 총가람이 9백66간에 달했다 하며 승려 또한 7백30여명에 달해 도내 제일을 자랑했다고 전해온다.
그러나 오늘날은 해탈문과 대웅전 요사채등만 남아 있는 사찰에 불과하다.
이처럼 절이 폐한 것은(3백여년전)이 절에 전설로 내려오던 기인이 나타나고 부터라 전해온다.
이 절은 창건이후 철모를 쓴 자가 나타나면 절이 망한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어느날 대중이 절 밖에서 간강을 달이고 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여러 중들은 갑작스런 비라 몸을 피했는데 어디서 왔는지 철모를 쓴 7척 거인이 나타나 솥 위에 가랭이를 벌리고 서서 간장 솥을 보호해 주었다.
그 모양이 하도 괴이하게 생겨서 공양주와 여러 승려들을 깔깔 웃었다. 그러나 노승들은 이 일이 심상치 않은 일이라고 걱정들을 하였다.
이날밤 원이 모를 불이 거찰을 태우고 겨우 해탈문과 천왕문만 남았었다. 그후 천왕문도 도괴되고 말았다.
생각되어지는 것은 철모를 썼다는 것으로 미루어 임란때 군인을 이르며 이무렵 병활를 입었으리라 추측된다.
이때 소실된 대웅전의 서까래에 억힌 전설이 있다. 당시 비교적 사용되지 않던 부연식 서까래를 이 대웅전에 사용했는데 부연식서까래란 하나로 내자르던 서까래를 둘로 연결한 방식이다.
도갑사에서 대가람을 세울 때 국내에서 이름있는 명목수들을 동원했다.
대웅전의 서까래는 그 중에서도 명목이라는 팔순노인이 말았다. 이 노인은 몇 달동안 서까래 5백여개를 자르는데만 전념했다.
상량식을 며칠 앞두고 자르기를 마친 노인은 그만 얼굴색이 파래지며 여러개의 석가래를 허둥지둥 도면과 맞춰보는 것이었다.
"이럴수가! 아차차, 큰일이로고"
모조리 짧게 잘랐다. 상량을 며칠 앞두고 걱정거리도 보통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노인은 감당 할 수 없어 몸져눕고 말았으나 광명으로 이루어진 중창사업은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몸져 누웠으나 누운 것이 아니요 눈을 감았으나 잠을 자는 것이 아니었다. 자나깨나 서까래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다시 만들자니 나무도 문제지만 시일 또한 어림없었던 일이었다.
이러한 시아버지의 모습을 보다못한 며느리가 간곡히 그 연유를 물었다.
궁지에 빠진 노인은 며느리에게 하소연하듯 자신의 실수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 까닭을 알고도 자기가 도울 성질의 것이 아님을 안 며느리도 암담하기만 할 뿐이었다.
밖에 나와 처마를 쳐다보던 며느리는 초라한 자기집 초가 서까래 몇 개가 부러져 기울자 처마를 다시 서까래 토막을 이어 받친 곳을 발견하고 시아버지의 걱정이 해결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라 시아버지께 달려가 여쭈었다.
"아버님, 짧은 서까래를 그만큼 이어 붙이면 어떻겠습니까? 아직 상량은 2,3일 남았으니까 그동안 이어 놓으면 되지 않겠는지요."
듣고 있던 노인은 며느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앉으며,
"옳다 네 말이 맞다. 그걸 부연식이라 하느니 그것을 깨닫지 못했었구나"
노인은 상량일에 맞춰 작업을 끝내고 대웅전을 예정대로 완성되었다.
이처럼 며느리의 기지로 인해 다른 건물과 다른 형식으로 완성된 대웅전을 보고 왕이 크게 기뻐하였으며 이때부터 부연식을 부연식으로 표기했다.
그러나 현 도갑사의 대웅전은 1776년에 재건한 것이라하며 당시의 대웅전은 그 모습이 이러한 전설로만 남아 있다.

덕진다리 (덕진면 덕진리)

 

 때는 신라시대이었습니다.
영암읍에서 십리 쯤 떨어진 강변에 객주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덕진이라는 여인이 일찍이 혼자되어 이 곳에서 길가는 나그네들에서 숙식을 제공하기도 하고, 갈증 나는 목을 축여 주기도 하였습니다.
덕진과 영암 사이에는 영암천이 가로놓여 있는데, 영암천은 비만 오면 물이 불어 사람이 건너 달닐 수가 없었습니다.
월출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영암을 감싸고 돌아 흐르기 때문에 갈 길이 없었습니다.
며칠씩 기다리기도 하였습니다. 물이 많은데도 가끔 고집을 부리고 건너다가 변을 당하는 수도 있었습니다.
바쁘다고 초조해 하는 사람을 볼 때 마다 그녀는 자기 일처럼 함께 걱정을 해주곤 했습니다.
"아주머니, 술 한잔 주소."
"예예, 어서 오시오, 옷이 다 젖었구먼요."
"무슨 비가 이리 많이 오는지, 원. 빨리 소식을 전해야 하는디."
객주에 들어온 사람은 술을 한 잔 들이키고는 비를 맞으며 밖으로 나갔습니다.
한참 후에야 되돌아 오더니.
"징검다리를 건너갈 수 있으려나 싶어나가 봤더니 도저히 안되겠구먼, 큰일났데. 어떻게 해야쓴담."
"함부러 건너 가시다가는 물귀신 됩니다."
그 사람은 바쁘다고 해대며 초조하게 연방 술잔을 비웠습니다.
"이곳에 다리가 놓으면 좋것지라."
"주모는 그것을 말이라고 하는가, 아 좋다뿐이겠소."
"이곳에 다리를 놓는다면 얼마나 들까요?"
주모는 지나가는 소리로 슬쩍 물어 보았습니다.
"왜? 주모가 다리를 놔줄려고."
"아~니요, 그냥 물어본 것이지요."
"모르긴 몰라도 삼백냥은 족히 들거요."
"삼백냥, 삼백냥이라."
여인은 삼백냥을 몇 번이나 중얼거렸습니다.
여러 해 동안 영암을 오가는 행인들이 겪는 어려움을 보아왔던지라 그들을 도와줄 일이 없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옳지, 다리를 놓도록 하면 되겠구나, 내게는 그만한 돈이 없는데 어쩌지. 아냐, 푼푼히 모으면 될 수도 있을거야."
여인은 그날부터 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빈 항아리를 마련하여 두고, 일이 끝나면 벌어들인 돈을 그 항아리에 담았습니다.
처음에는 언제 그 돈이 모질려나 까마득하게 여겨졌지만, 동전은 바닥을 메우고 차츰 불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리가 생기면 통행에 불편을 느끼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변을 당하는 사람도 없을 것을 생각 하니 흐뭇하였습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데, 나도 한가지 일이라도 해야할 것이 아닌가.'고 왔던 그녀의 손이 세월의 흐름을 말해주듯 고운 티가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 반면에 항아리는 거의 동전으로 채워져가고 있었습니다.
여인은 다리가 놓이고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오고가는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여인은 곧 다리가 놓일 것을 생각하니 기쁘기 그지없었습니다.
항아리의 돈이 삼백냥쯤 될 것이라고 생각 되었습니다.
그 돈을 고을에 기증할 적당한 날을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몰래 한밤중에 그 항아리를 땅에 묻어 두었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상주도 없는 초라한 상여 한 채가 동구 밖으로 나갔습니다.
"왜, 죽었당가. 좋은 사람이었는데."
"아, 글쎄. 아무런 병도 없이 갑자기 죽었다 하네."
구경 나온 아낙들은 갑작스런 덕진의 죽음을 아까와 하며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세월이 흘러 고을의 원님이 바뀌었습니다.
원님이 부임한 첫날 밤이었습니다.
"원님, 제 소원하나 들어 주십시오."
"아니, 넌 도대체 누구냐?"
원님은 흰 소복을 입고 나타난 여인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원님, 놀라지 마십시오. 저는 여기서 십리쯤 가는 덕진리에 살았던 덕진이라는 여인이옵니다."
여인은 자기 사정을 이야기 하기 시작하엿습니다.
"제 소원은 영암과 덕진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었습니다.
다리를 놓기 위해 평생동안 돈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때를 기다리고 있는데 염라대왕의 부르심을 받고 이승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제가 살던 집의 부엌에서 서쪽으로 다섯 걸음만 가서 땅을 파보십시오.
그러면 항아리 하나가 있을 것입니다. 원님, 부디 저의 소원을 풀어주십시오."
이와 같이 말을 한 여인은 큰 절을 하고 물러나는 것이었습니다.
꿈을 깬 원님은 너무도 생생하여 이상히 생각되었습니다.
다음날, 그 곳으로 가서 그 여인의 말대로 다섯 걸음을 가서 파보았습니다.
이리하여 영암과 덕진사이에는 다리가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여인의 갸륵한 뜻을 살려 다리의 이름을 덕진교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또 마을에서는 그 여인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비를 세우고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현재의 덕진다리는 그 후 새로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옛날 덕진다리는 그때의 석물만이 남아 덕진여인의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참고하시어 도움이 되시길..................

 

출처: 네이버 지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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