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경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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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통 도요새 2016. 3. 3.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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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26 백두대간53 해서정맥79 한남정맥
01 백두대간27 백두대간54 해서정맥80 한남정맥
02 장맥정간28 백두대간55 성남정맥81 한남정맥
03 장맥정간29 백두대간56 성남정맥82 한남정맥
04 장맥정간30 백두대간57 성남정맥83 한남정맥
05 장맥정간31 백두대간58 성남정맥84 금북정맥
06 장맥정간32 백두대간59 한북정맥85 금북정맥
07 백두대간33 백두대간60 한북정맥86 금북정맥
08 백두대간34 백두대간61 한북정맥87 금남호남정맥
09 백두대간35 낙남정맥62 한북정맥88 금남정맥
10 백두대간36 청북정맥63 낙동정맥89 금남정맥
11 백두대간37 청북정맥64 낙동정맥90 금남정맥
12 백두대간38 청북정맥65 낙동정맥91 금남정맥
13 백두대간39 청북정맥66 낙동정맥92 금남정맥
14 백두대간40 청북정맥67 낙동정맥93 호남정맥
15 백두대간41 청북정맥68 낙동정맥94 호남정맥
16 백두대간42 청북정맥69 낙동정맥95 호남정맥
17 백두대간43 청북정맥70 낙동정맥96 호남정맥
18 백두대간44 청남정맥71 낙동정맥97 호남정맥
19 백두대간45 청남정맥72 낙동정맥98 호남정맥
20 백두대간46 청남정맥73 한남금북정맥99 호남정맥
21 백두대간47 청남정맥74 한남금북정맥100 호남정맥
22 백두대간48 해서정맥75 한남금북정맥101 호남정맥
23 백두대간50 해서정맥76 한남금북정맥102 호남정맥
24 백두대간51 해서정맥77 한남정맥103 뒷표지
25 장백정간52 해서정맥78 한남정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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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와 같은 저자의 당부말씀이 있었으니 꼭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 



旅菴 申景濬의 自然觀 考察 - 곤충 詩를 中心으로


저자 : 시인마뇽 우명길


목 차


I. 머리말


II.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의 생애(生涯)와 학문경향(學問傾向)

1.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의 생애(生涯)

2.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의 학문경향(學問傾向)


III. 한국시가(韓國詩歌)의 자연관(自然觀) 유형(類型)

1. 자연(自硏)에 대한 이해(理解) 및 인식태도(認識態渡)에 따른 유형(類型)

2. 자연(自硏)에 대한 표현(表現) 및 형상방법(形象方法)에 따른 유형(類型)


IV. 여암 신경준의 자연관

1. 한국시가의 자연관 유형

2. 곤충 시에 나타난 신경준의 자연관

 1)친화적자연관(親化的自然觀)

 2)순응적자연관(順應的自然觀)

 3)객관적자연관(客觀的自然觀)

 4)서정적자연관(抒情的自然觀)


V. 맺음말


참고문헌


I. 머리말


여암 신경준(旅菴 申景濬)은 조선조 영조 때의 실학자이다. 신경준은 당대의 어느 학자보다 폭넓게 학문을 연마해 국어, 국문학은 물론 역사, 지리, 철학 등 많은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이런 점에서 신경준은 18세기 학문의 통섭을 이룩한 독보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여암 신경준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육당 최남선이 발간한 책자『山經表』가 시중에 유포된 1980년대의 일이다. 이 책은 1913년 조선광문회에서 발간한 102쪽의 소책자로 여암 신경준이 지은『동국문헌비고』「여지고」의 ‘산수고’에 기초해서 쓴 책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 산줄기를 알기 쉽게 만든 이 책이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하다가 일반인들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산(山)잡지 『사람과 산』에서 이 책에 실린 백두대간과 9정맥을 직접 탐사하고 그 보고서를 잡지 『사람과 산』에 올리면서부터이다. 이렇듯 여암 신경준은 먼저 세인들에 지리학자로 알려졌다.


산경표가 우리나라 국내산행방식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산경표가 발견되기 전 국내산행은 어느 한 산을 정해 정상을 오르내리는 점 산행이 거의 다였지만 산경표의 발견은 산줄기를 이어가는 선산행, 즉 종주산행이 자리 잡게 된 계기가 되었다.


산수고를 작성해 후세들의 산행방식에 변화를 가져온 여암 신경준이 어떤 자연관을 갖고 있었나를 고찰하는 것은 우리 산악인들에는 그 나름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이에 여암 신경준의 자연관을 그가 지은 시를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신경준이 남긴 시는 백성의 삶과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시와 주변사물에 대한 관심을 형상화 시로 나뉜다. 신경준의 학문경향이 가장 잘 나타난 시는 후자의 영물시(詠物詩)로 채소시와 곤충시가 있다. 본고에서 분석 대상으로 삼은 곤충시는 <野蟲>과 <小蟲十章>이다.


II.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의 생애(生涯)와 학문경향(學問傾向)


1.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의 생애(生涯)


여암 신경준은 영조13년(1712년) 전북 순창에서 신말주의 10대 손으로 태어났다. 신말주는 친형 신숙주와는 달리 세조의 왕위찬탈에 분개해 서울을 떠나 전북 순창으로 거처를 옮긴 지사적인 인물이다.


신경준의 생애는 수학기(修學期)와 사환기(士宦期)로 나뉜다. 신경준은 수학기를 여러 곳으로 이사를 다니며 보냈다. 그의 첫 이전은 8살 때 서울로 공부하러 간 것이고, 그 이듬 해 스승을 따라 강화로 옮겨 3년간 수학했다. 12살 때 순창으로 돌아가 15년간 거주하면서 여러 곳을 떠돌아다녔다. 『詩則』은 23세 때 온양을 여행하다 만난 소년에게 시작법을 가르치려 지은 것이다.


신경준은 27세에 경기도 소사로 이주해 3년을 살면서 『素沙問答』을 지었고, 30세에 직산으로 내려가 『稷州記』를 썼다. 『素沙問答』은 ‘희다’의 ‘素’와 ‘모래’의 ‘沙’를 의인화하여 서로 논쟁을 하게 하는 독특한 형식의 철학서이고, 『稷州記』는 직산의 지형지물의 이름과 연원 등을 조사해 실은 지리서이다.


신경준은 33세에 순창으로 귀향해 10년간 머물면서 지리산을 비롯한 전라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선승들과 긴밀히 교유했다. 『訓民正音韻解』를 저술한 것은 이 기간 중이다.


신경준의 사환기는 늦게 시작되었다. 호남좌도 증광초시에 응시해 1등으로 합격한 것은 영조30년(1754년)인 43세의 일이다. 이때 만난 장시관 홍양호는 평생 신경준의 후원자가 되었다. 같은 해에 서울에서 치른 증광문과에 급제해 본격적인 벼슬길이 시작되었다. 46세에 예조랑을, 51세에 서산군수를 지낸 신경준은 장연현감, 사헌부 장령을 거쳐 56세에 사간원 사간으로 승진했다.


신경준이 『疆界志』를 저술한 것은 45세 때이다. 간관으로 재외자가 되었다는 이유로 유배됐다가 풀려난 신경준은 58세에 종부사정으로 임명되어 강화도의 준각원을 수리한 후 낙향했다. 영의정 홍봉한이 『疆界志』를 보고 천거한 신경준을 비변사의 낭청으로 임명한 영조는『東國文獻備考』의 편찬 업무를 맡겼다가 동부승지로 발탁하였고 다시 병조참지로 임명하였다. 『東國文獻備考』「輿地考」의 편찬을 전담했을 때 만들어진 초고를 기초로 지은 것이 지리서인 『道路考』이다.


60세에 북청부사로 임명된 신경준은 강계부사와 순천부사를 거쳐 63세에 제주부사로 부임해 1년 가까이 제주를 다스리다가 부사로 물러났다. 1775년 영조의 승하를 맞아 3년간 상복을 입은 뒤 68세에 낙향해 70세인 1781년에 숨을 거두었다.


신경준이 사환기에 능력을 한껏 발휘할 수 있었던 데는 늦은 만남을 아쉬워한 영조의 후원이 컸다.


2.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의 학문경향(學問傾向)


신경준의 학문에 크게 영향을 미친 두 가지는 소북의 가학전통과 서울학풍이다. 다른 유학자들과 달리 도가, 불교 및 양명학에도 관심을 가진 것은 집안 대대로 물려온 소북파의 학풍을 계승해서이고, 지지편찬이나 역사지리에 학문적 업적을 남긴 것은 8대조 신공제의 『東國輿地勝覽』신증작업에 참여한 가학전통을 이어받아서이다. 신경준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고문과 당시가 유행하고 노장, 불교 등 이단사상과 천문, 지리, 복무, 단학, 의약, 역학 등 잡학 및 기술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서울의 학문경향을 따른 조부 신선부로 알려졌다.


신경준의 학문 활동은 여러 권의 저술로 결실되었다. 수학기에 이미 『詩則』, 『訓民正音 韻解』,『素沙問答』,『稷州記』등을 남긴 신경준이 본격적으로 저술활동을 한 것은 사환기에 들어서이다. 후손 신재구가 펴낸 행장에 따르면 신경준의 저서로 한서천문지와 같은 종류로 『의표도』『빈앙도』가 있고, 주관의 직방도와 같은 종류의 책으로 『疆界考』,『山水經』,『道路考』 등이 있다. 문자와 언어에 대한 저술로 『일본정운』, 『언서음해』,『5성운해』등이 있고, 도(道)에 대한 문답으로 『素沙問答』이 있다. 이에 더하여 1910년 목판본으로 간행된 『旅菴遺稿』에 『동음해』, 『사연고』,『병선재』, 『태정금인』,『해주시해』,『순원화훼잡설』등이 수록되어 있다.


신경준의 저서로 주목할 만한 것은 지리서로, 그의 지리에 대한 관심은 거주지에서 영토문제에까지 이른다. 그가 머물렀던 소사에서 지은 『素沙問答』은 지리서가 아니나, 직산에 머물면서 지은 『稷州記』에는 작은 제방의 이름까지 그 연원이 실려 있다. 본격적인 지리서인 『四沿考』는 우리 국토를 토지에 국한시키지 않고 연해지역으로 넓혔다. 우리나라 역사와 지리를 종합적으로 서술한 『疆界考』는 각 지방의 연혁, 명승, 기문 등을 주로 다뤄 다른 지리지와는 많이 다르며, 『道路考』는 전국을 연결하는 교통망으로써 도로를 파악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신경준이 제작한 『東國輿地圖』와 『八道地圖』는 다음 세기에 고산자 김정호가 『大東輿地圖』를 제작하는데 밑거름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신경준의 뚜렷한 학문경향으로 들을 수 있는 것은 박학의 추구 및 개방적 학문관, 그리고 고증과 실증의 태도이다. 첫째 신경준은 다양한 방면에 학문적 관심을 기울였고 또 각 방면에서 상당수준의 학문적 결실을 거두었다. 지리학, 역사학, 음운학 등 다양한 학술분야에 저술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불교와 도교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해 『伽籃考』등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유학자 중 보기 드물게 박학한데다 개방적 학문관을 가진 덕분이다. 둘째 신경준의 지리서와 역사서가 높이 평가받는 것은 그가 고증과 실증을 추구한 학문적 자세를 견지한 덕분이다. 그의 이런 학문적 자세는 지리학과 역사학에 국한되지 않았다. 상세한 식물관찰과 철저한 고증이 『순원화훼잡설』 같은 수준 높은 수필집과 『菜圃引』같은 창작시를 낳은 것이다.


신경준에 대한 평가는 시대별로 차이를 보여 왔다. 신경준이 활동한 당대에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상존했다. 홍양호는 『旅菴遺稿』 서문에서 “매번 고금에 대해 토론하고 명리를 분석하여 밤낮없이 지냈으며 세상에 고락을 함께 하기를 30년간 시종여일하였으나 옛 사람들이 말하는 지음의 교훈이 분명하다”며 칭송했고, 이제 황윤석은 신경준의 최대 업적이랄 수 있는 『東國文獻備考』「輿地考」의 편찬에 대해 유형원, 김륜, 안정복과 한백겸의 여러 학설을 인용한 것뿐이라며 깎아내렸다. 일제강점기에 국학운동을 주도한 정인보는 “깊은 이치에서부터 미미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통달하였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오늘날 신경준은 많은 학자들로부터 지리, 역사, 국문학을 모두 어우르는 보기 드문 국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III.한국시가(韓國詩歌)의 자연관(自然觀) 유형(類型)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것은 약350만 년 전의 일로 그때부터 자연과 관계를 맺어왔다. 최초의 인류인 아우스트랄로페테쿠스가 숲속을 돌아다니며 식물을 채집하고 동물을 수렵하여 살기 시작했다는 것은 자연이 인류의 고향이자 생활공간으로 자리매김 해왔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오랜 옛날부터 자연에 순응해 살아가면서도 한편 자연을 정복하려고 끊임없이 애써왔다. 사람들이 자연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는가는 동양과 서양이 같지 않고 시대에 따라 다르다. 동양인들이 대체로 자연에 대해 순응하려는 소극적인 자연관을 견지해왔는데 서양인들은 자연과 맞서 싸워 극복하려는 보다 적극적인 자연관을 내보였다. 고대의 자연관이 자연에 대해 순응적이고 친화적인 것이라면 현대에는 자연을 개발의 대상으로만 여겨 오늘의 환경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조기영은 그의 저서 『한국시가의 자연관』에서 한국시가에 나타난 자연관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었다. 하나는 자연에 대한 이해 및 인식 태도에 따른 분류이고, 또 하나는 자연에 대한 표현 및 형상방법에 따른 분류이다. 본고에서는 신경준의 곤충시에 나타난 자연관을 알아보는 분석의 틀로 조기영이 분류한 아래 기준을 활용하고자 한다.


1. 자연(自硏)에 대한 이해(理解) 및 인식태도(認識態渡)에 따른 유형(類型)


조기영은 자연에 대한 이해 및 인식태도에 따라 자연관의 유형을 다음과 같이 6가지로 나누었다.


분류기준 자연관 해당시가


1)자연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태도 외경적 자연관 복희씨의 팔패/창힐의 상형

친화적 자연관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2)자연에 대한 인간의 접근태도 순응적 자연관 조지훈의 ‘낙화’

인공적 자연관 조지훈의 ‘고풍의상’


3)자연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태도 감흥적 자연관 최치원의 ‘秋夜雨中’

탐리적 자연관 윤선도의 ‘五友歌’


4)자연에 대한 인간의 사상적 유교적 자연관 김수영의 ‘공자의 생활난’

학문적 입장 방외적 자연관 한용운의 ‘코스모스’


5)자연에 대한 현실적 입장과 현실적 자연관 맹사성의 ‘강호사시가’

처지 이상적 자연관 김상용의 ‘남으로 창을내겠소’


6)자연을 관찰하고 조망하는 직접적 자연관 이광려의 ‘江行’

위치와 시공 간접적 자연관 정철의 ‘秋夜’


본고에서는 1), 2)의 분류기준에 따라 신경준의 곤충시를 집중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2. 자연(自硏)에 대한 표현(表現) 및 형상방법(形象方法)에 따른 유형(類型)


조기영은 자연에 대한 표현 및 형상방법에 따라 자연관의 유형을 다음과 같이 6가지로 나누었다.


분류기준 자연관 해당시가


1)자연에 대한 표현과 서술양식 서정적자연관 정지상의 <대동강>

서사적자연관 이순신의 <한산도>


2)자연을 묘사하고 표현하는 방법 사형적 자연관 윤두서의 <偶題>

형신적 자연관 이황의 <梅花>


3)자연을 수용하고 융회하는 시각적 자연관 박목월의 <나그네>

감각기관의 차이 청각적 자연관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중 ‘춘사’


4)자연을 관찰하고 형상하는 태도 주관적 자연관 김춘수의 <꽃>

객관적 자연관 이규보의 <放蟬賦>


5)자연에 융합하고 몰입하는 인화적 자연관 정도전의 <庭前菊>

의식 양상 물화적 자연관 서정주의 <내가 돌이되면>


6)자연을 표현하고 서술하는 시간적 자연관 박재삼의 <천년의 바람>

구상방법 공간적 자연관 정약용의 <夏日田園雜興>


본고에서는 1), 4)의 분류기준에 따라 신경준의 곤충시를 상세히 분석하고자 한다.


IV.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의 곤충시(昆蟲詩)에 나타난 자연관(自然觀)


여암 신경준은 모두 66제 154수의 시를 남겼다. 154수란 그의 50년이 넘는 시작활동을 감안하면 아주 적은 편수로 그를 문인으로 한정지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준형은 신경준의 시세계를 “백성의 삶과 현실에 대한 사실적 묘사”와 “주변 사물에 대한 관심”으로 양분해 고찰하였다. 백성의 삶과 현실에 대해 사실적으로 묘사한 시로 『농구』와 『민은시』를 들었고, 주변 사물에 대한 관심을 잘 드러낸 시로 채소시(菜蔬詩)와 곤충시(昆蟲詩)를 예로 들었다.


본고의 분석대상은 곤충시 11수로 모두 영물시(詠物詩)이다. 영물시는 자연물을 비롯한 구체적인 사물을 시화한 것을 이른다. 박명희는 신경준의 영물시를 관찰자의 입장에 서서 미물이라 해도 함부로 재단하거나 가치판단을 일삼지 않고 그 생태적 속성을 인정한 시로 평가했다.


신경준의 곤충시에는 『野蟲』과 『小蟲十章』의 10수 등 총 11수가 있다. 곤충시 『野蟲』은 이름 모르는 곤충을 다룬 시로 5언74구의 장편고시이다. 『小蟲十章』에는 <개구리(蛙)>, <개똥벌레(螢)>, <개미(蟻)>, <매미(蟬)>, <귀뚜라미(蛬)>, <거미(蛛)>, <나비(蝶)>, <파리(蠅)>와 <모기(蚊)> 등 9종의 곤충이 등장하고 곤충시의 결론 격인 <總吟>이 더해져 10수가 있다.


본고에 쓰인 곤충시 중 『野蟲』의 곤충시 11수에 드러난 신경준의 자연관을 알아보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앞에서 조기영이 분류한 바와 같이 자연에 대한 이해 및 인식태도에 따른 관점에서 그의 친화적 자연관과 순응적 자연관을 찾아보고자 한다. 또 하나는 자연에 대한 표현 및 형상방법에 따른 관점에서 서정적 자연관과 객관적 자연관도 같이 찾아볼 것이다.


1. 친화적자연관(親化的自然觀)


많은 동양인들은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살 수 밖에 없음을 깨닫고 자연과 친화적 관계를 맺으려 애써왔다. 중국의 제자백가 순자(荀子)와 장자(莊子)는 모두 친화적 자연관을 보인 학자이다. 순자의 자연관은 인간의 자연에 대한 외경과 공포의 마음을 이지적으로 이해하고 극복하여 친화적 관계를 맺는데 있었고, 장자의 자연관은 자연의 모든 만물을 똑 같은 눈으로 보고 인간과 차등을 두지 않은 제물사상에 바탕을 두었다. 순자의 자연관은 자연현상에 대해 과학적이고 지성적인 태도를 보인 점에서 서양인의 자연관과 유사한 면이 있음에 비해, 장자의 자연관은 자연과의 공존을 바탕으로 하는 제물사상(齊物思想)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어서 순자의 자연관보다 훨씬 더 친화적이라 할 수 있다.


‘친화적’이라 함은 더 이상 자연을 개발대상으로 삼지 않고 함께 공존하고자 하는 것을 뜻한다. 생활조건의 개선을 위해 자연을 개발하는 것을 당연시 해온 서양인들의 합리적자연관으로는 위기에 처한 지구를 구할 수 없어 자칫 잘못했다가는 인류가 공멸할 수 있다는 반성에서 태동된 것이 친화적자연관이다. 『莊子』의 「齊物論」에는 아래 글처럼 장자의 친화적 자연관이 잘 드러난다.


사람은 해와 달을 의지하고 우주를 옆에 끼고서 행동은 자연과 합치되고 몸은 자연의 혼돈 속에 두며 천한 사람들을 존중해야합니다. 보통사람들은 수고로이 몸과 마음을 쓰지만 성인은 멍청히 지냅니다. 억만년에 걸친 변화 속에 참여하면서도 다만 한결같이 순수함을 지탱해 나갑니다. 만물은 모두 있는 그대로 두고 이러한 방법으로 계속해나가는 것입니다.


신경준이 곤충의 존재를 제물론적으로 인식했다는 것은 그의 곤충시에 장자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도 확인된다.


鯤鵬誰說潻園前 곤어 대붕 거창한 말을 그 누가 장자 앞에 늘어놓으랴

好大奇文載末年 위대한 기문은 말년에나 생기는 법

吾輩賦蟲何ꝯ細 벌레를 노래하는 일이 어찌 쓸모없기 하겠나

一吟一笑破春眼 읊조리고 웃는 사이 춘곤증을 쫓으리라


위 글은 『小蟲十章』<總吟> 시의 전문이다. 곤어와 대붕은 『장자』의「제물」편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로 “곤어 대붕 거창한 말을 그 누가 장자 앞에 늘어놓으랴”는 곤충을 좋아해 노래했으면 그만이지 굳이 곤어 대붕을 말할 필요가 있겠는 가로 해석될 수 있음은 “벌레를 노래하는 일이 어찌 쓸모 없기 하겠나”는 전구(轉句)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시에는 곤충을 있는 그대로 그릴 뿐 윤리적 의미나 사상을 부여하지 않은 것은 좋아해서 그리 했으니 문제 삼지 말아달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다시 말해 미물로 천시 받는 곤충들도 다 존재 가치가 있어 있는 그대로 그렸으며 천시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음을 내 보여 준 것이다. “한번 읊고 한 번 웃어 봄잠을 깨려고 한 것일세”로 끝을 맺어 곤충시에 대한 논쟁을 피해갔으나 신경준이 의도한 바는 장자를 빌려 제물론적(齊物論的) 입장을 밝힌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豈憂旱七八 어찌 8년 동안 일곱 차례 가뭄들 것 걱정하랴

只恐雨霢霎 다만 가랑비 내리는 것이 두렵네

在昔天九潦 예전에 아홉 차례 홍수가 났을 때는

何能久倒立 어떻게 한 참 거꾸로 서 있었느냐


위 시는 곤충시 『野蟲』의 31-34구 내용이다. 이준형은 31구에 나오는 내용은 우임금 때 10년 동안 9차례나 홍수가 났고 탕임금 때 8년 동안 7차례나 가뭄이 들었다는 ‘장자’의 구절로부터 시상을 얻은 것이라며, 힘없고 조그마한 벌레가 사냥하기도 힘에 부친데 날씨와도 싸워야 함을 희화화한 것으로 해석했는데, 그보다는 어려움에 처한 곤충들에 대한 걱정이 묻어나는 대목으로 인간과 똑같이 미물인 곤충을 대하는 제물론적 인식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


吾人至賢物 우리는 지극한 영물이지만

蚊蝎嘬相集 모기나 좀이 물어뜯으려 모여들고

五穀至良草 오곡은 지극히 좋은 식물이지만

蟊蝗霣枝葉 해충과 메뚜기가 가지의 잎을 떨어뜨린다.

煌煌詩與書 찬란한 시경과 서경은

森列賢聖法 빽빽이 늘어선 현인과 성인의 법이지만

蠹兒敢篆噬 좀벌레들이 감히 물어뜯어

細點緣殘笈 자자란 점들만 망가진 책상자 안에 남아있네.

謂是天所使 이것을 하늘이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이라면

無乃理不合 이치에 안 맞지 않은가


위 곤충시 『野蟲』의 55-64구에서도 신경준의 제물사상이 엿보인다. 하늘이 시키신 일이 아님에도 모기가 어진 인간을 뜯어 먹고, 좀벌레가 인간이 떠받드는 경서를 물어뜯으며 산다는 것은 비록 곤충들이 미물이지만 인간에게 통용되는 질서나 가치를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신경준의 친화적 자연관이 잘 드러나는 구절이다.

신경준의 친화적 자연관은 다른 곤충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파리(蠅)>

愛爾人無憎爾多 널 좋아하는 사람 없고 미워하기만 하니

歐公仁厚亦云嗟 어질고 인자한 구양수도 너를 두고 탄식했네.

令人憎愛皆由我 사람에게 미움받고 사랑받기 모두 내 탓이거늘

不改營營奈爾何 반성 없이 앵앵대니 어찌 하겠나


<거미(蛛)>

腹裏經綸似爾稀 뱃속에 품은 경륜 너 같은 이 드물리니

遊絲碧落勢如飛 허공에 펼쳐 있는 거미줄 마치 나는 듯하네.

網羅處處彌山海 곳곳에 그물 쳐서 세상에 가득하니

莫道微蟲喜設機 조그만 벌레들아 때 만났다고 기뻐들 하지 말라.


<모기(蚊)>

鐵嘴如錐鬧晩風 송곳같은 쇠주둥이 늦바람불면 시끄러워

片時能得滿腔紅 잠깐이면 붉은 색 뱃속 가득 채운다네

可憐玉臂驚新濺 가련하다 고운 핏자국에 놀라니

一點丹痕似守宮 한 점 붉은 상처 수궁하는 모습 같구나


첫째 해충 파리를 너(爾)라고 의인화하여 표현했고, 전(轉)구에서 보여주듯 파리에게 가해지는 애증이 모두 나로부터 말미암았다고 표현한 것은 파리에 대한 신경준의 따뜻한 시선을 느끼게 한다. 아래 시는 『詩經』에 나오는 시 <쇠파리(靑蠅)>로, 즐겨 남을 모함하는 자들에 비유해 쇠파리를 깔 본 것이 신경준의 <파리(蠅)>와 많이 다르다.


쇠파리

윙윙 쉬파리 날다가

울타리에 앉았네

점잖으신 군자님은

남 모함하는 말 믿지 마시기를


윙윙 쉬파리 날다가

대추나무에 앉았네

남을 모함하는 자들은 나쁜 자들이어서

온 나라를 어지럽히네


윙윙 쉬파리날다가

개암나무에 앉았네

남을 모함하는 나쁜 자들이어서

우리들 서로 미워하네


둘째 <거미(蛛)>는 거미를 의인화시켜 그물을 쳐서 벌레들을 잡아먹는 모습을 익살맞게 그렸다는 점에서 ‘파리’와 다르지 않다. 이규보가 <매미를 놓아주는 노래(放蟬賦)>에서 “저 교활한 놈은 거미이거늘 그 무리들이 많이 불어났구나” 하면서 “누가 기교를 주어서 그물실로 둥근 배를 가득 채우게 했는가” 하고 거미의 교활성을 노래한 것과는 사뭇 다르다.


셋째 신경준은 사람의 피를 빨아 먹는 모기조차도 미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파리나 거미와 마찬가지로 해학적으로 그렸다. 공포심을 표현한 다산 정약용의 아래 시 <모기>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제물사상이 신경준의 <모기(蚊)>에서 돋보인다.


한 마리 모기소리 귓가에 들릴 때는

간담이 서늘하고 기가 막혀서

오장이 죄어들고 끓어오르네


신경준이 각종 해충에게도 따뜻한 시선을 보인 것은 모든 만물은 똑같다는 제물론적 인식에 바탕을 둔 생태친화적 자연관을 견지했기에 가능했다.


2. 순응적자연관(順應的自然觀)


순응적 자연관은 동양인의 주된 자연관이다. 순응적 자연관의 원천은 자연에 대한 원초적인 외경심이어서 자연을 친화의 대상으로 삼은 친화적자연관보다 훨씬 앞서 성행한 자연관이다. 과학문명이 최고도로 발달한 요즘도 등산을 하다가 천둥번개를 만나면 자연에 대한 공포심과 외경심이 절로 생기는데, 미개한 옛날에는 그 공포심이 훨씬 심했을 것이기에 무조건 자연에 순응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순응적 자연관을 잘 보여주는 것은 동양의 경천사상(敬天思想)이다. 조기영은 경천사상을 인간의 원초적인 자연에 대한 외경심에서 출발하여 자연의 섭리에 순응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인식에서 더욱 확대된 것으로 보았다.


동양인의 순응적자연관은 “하늘의 명은 아름답기 그지없네. 아아, 밝기도 해라.”라는 『詩經』의 시에서도 잘 드러난다.


신경준이 곤충시를 쓴 것은 임종 한 해 전인 73때의 일로 그의 주된 학문적 입장은 실학사상에 있었다. 자연에 친화적인 시는 여러 편 남겼으나 자연에 순응적인 내용은 곤충시『野蟲』에서만 보이는 것은 그가 실사구시를 중히 여기는 실학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래 곤충 시 『野蟲』의 35-40구에서 신경준은 가뭄 끝에 장마철을 맞아 이름 모르는 들 벌레가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을 했다가 이내 하느님이 구해줄 것이라며 안심한다. 하느님의 어진 것을 보았으니 그것은 모든 생명체에 먹이를 주시어 굶겨죽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을 양식으로 삼는 어류에는 무한의 물을 강과 바다를 통해 공급하고 흙을 밥으로 먹고 사는 지렁이에는 무한히 넓은 땅을 주신 하느님이 있어 야충도 살아가기 걱정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 신경준의 자연관은 하느님의 전지전능한 능력을 믿고 따르는 경천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순응적 자연관의 좋은 실례라 하겠다.


我觀天帝仁 나는 하느님 어진 것을 보았으니

有生食亦給 생명이 있으면 먹이도 주셨다.

魚蝦水爲糧 어류는 물을 양식으로 삼으니

江海渺洶涾 강과 바다는 아득히 넘실대지

蚯蚓土作飯 지렁이는 흙을 밥으로 삼으니

坦祐無際接 땅은 드넓고 끝이 없다네


신경준의 하느님 칭송은 아래 시와 같이 『野蟲』의 41-50구로 이어졌다. 하느님의 보살핌으로 모든 생명체가 잘 살아가는데 어찌하여 하느님께서 유독 이 야충에게만 인색하신가를 불평하다가, 이내 그 인색은 야충에 내려진 시련이 아님을 깨닫는다. 하느님의 별칭인 조물주가 한결같이 고르게 생명을 길러내어 만물이 각각 습성이 다른 것뿐이지 인색하게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麋鹿馬建羊 사슴 말 양에 이르기까지

草薦靡原隰 풀이 언덕과 습지에 풍성하여

不勞而不竭 힘들이지도 않고 고갈되지도 않으니

閑安養自洽 편안히 자라서 절로 흡족한데

獨於是虫嗇 오직 이 벌레에만 인색하여

何俾巧且捷 어찌 교묘하고 민첩하게 하셨는지?

乃知彼太虛 알겠다, 저 조물주는

造化任帥霅 조화를 절로 흩고 모이게 하여

一圓均慈生 한결같이 고르게 생명을 길러내어

物各異其習 만물은 각기 그 습성이 다르다네


순자의 순응관은 그 근본이 순천(順天)에 있다는 점이 경천에 근거한 동양의 순응관과 차별되는 점이다. 순자가 하늘이라 이르는 것에는 자연이란 뜻도 함축되어 있다. 순자는 단지 앉아서 자연의 은택을 기다리는 것 아니라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 자연의 법칙과 규율을 이용하여 생존하고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데 순응의 의미를 두었다. 순자는 『순자』의「천륜」편에서 세상이 잘 다스려지거나 어지러워지는 것이 하늘 때문인가를 묻는다.


잘 다스려지거나 어지러워지게 하는 것은 하늘인가? 해와 달과 별들이 운행되고 있는 현상은 우임금 때나 걸 임금 때나 같았다. 그러나 우임금 때는 잘 다스려졌고 걸왕 때는 어지러웠으니, 잘 다스려지거나 어지러워지게 하는 것은 하늘이 아니다.


순자가 “『시경』에 ‘하늘이 높은 산을 만드셨고, 태왕께서는 그것을 다스리셨네. 태왕께서 일으킨 나라를 문왕께서 편안케 하셨네.’라고 읊은 것도 이것을 뜻하는 말이다.”라며 세상을 잘 다스려지거나 어지러워지게 하는 것은 하늘이나 땅이 아니고 사람이라 답한 데서도 그의 자연관이 순천에 의거한 순응적자연관임이 확인된다.


신경준의 순응적 자연관이 맹자의 사천사상보다 순자의 순천사상에 더욱 가까우리라 보는 것은 그가 과학과 실용을 중시한 실학자이기 때문인데 실제 그의 곤충시에서는 그런 순천사상이 보이지 않는다. 생명체들이 먹고 사는 것이 그들이 자연의 법칙과 규율을 이용하여 생존하고 발전해서가 아니고 하느님의 어질음과 조물주의 조화로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그렇다. 이것은 아마도 신경준의 시작(詩作)에 실학만이 아니고 전통적인 유교와 더불어 불교 및 도교 모두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 것이다.


3. 객관적자연관(客觀的自然觀)


조기영은 주관적자연관의 대응 개념으로 사용한 ‘객관적자연관’이란 객관적 자연물의 고유성을 보장하는 자아의 세계화를 뜻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본고에서는 자연을 관찰하고 형상화할 때 주관적인 견해나 판단을 억제하고 자연물의 객관적 존재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형상화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조기영의 객관적 자연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연물의 존재가치도 객관적으로 탐색하는 자연관이라 하겠다.


자연물에 대한 객관적인 태도는 이규보의 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매미를 놓아주는 노래(放蟬賦)

저 교활한 놈은 거미이거늘 그 무리들이 많이 불어났구나.

누가 너에게 기교를 주어서 그물실로 둥근 배를 가득 채우게 했는가.

매미가 거미그물에 걸려 매우 슬픈 소리를 지르는데

내가 차마 듣지 못하고 끌어내려 날려 보냈다.


신경준은 곤충시 『野蟲』을 통해 이규보의 <매미를 놓아주는 노래(放蟬賦)>에서보다 더욱 자연물 야충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했다. 『野蟲』의 1-6구까지의 아래 시와 같이 신경준은 옛 문헌을 뒤져 성인들도 이름을 모르는 곤충이라 확인하고 이 곤충의 외관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有蟲狀貌異 모습이 이상한 벌레가 있는데

黎色細腰胛 검은 색의 허리와 어깨가 가늘다

黨族於蟻近 개미와 비슷한 족속이지만

末宜同譜牒 그 족보가 같지는 않다네.

爾雅不之記 ‘이아’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

古聖識未及 옛 성인의 지식도 미치지 않았네


뒤이은 7-12구에서도 야충의 집짓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러면서도 어찌하여 들판 습지를 탐내는지 존재론적 의문을 품어본다. 신경준의 곤충시가 주목받는 것은 위와 같이 실증적이고 고증적인 학문경향이 잘 드러나서이지 문학성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大地亦云寬 대지는 이렇게 넓은데

奚貪郊墟濕 어찌 들판의 습지만 탐내는가

鑿地爲家舍 땅을 파서 집을 만들고

向天開戶□ 하늘 향해 문을 열어 두었네.

逢雨尾以窒 비를 만나면 꼬리로 막고

値晴嘴以押 맑은 때는 주둥이로 다진다.


13-16구에서 묘사대상은 먹이를 포획해 먹는 장면이다. 외관과 집짓기, 먹는 모습까지를 객관적으로 묘사한 신경준은 17-18구에서 먹이 감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표출한다.


有時虫蠅過 벌레나 파리가 자나갈 때는

呑捕如電輒 번개처럼 잽싸게 잡아서

携將入穴去 구멍에 가지고 들어가

賀作卯酉饁 즐거이 아침저녁 밥으로 삼는다.

蟲蠅卒見困 벌레와 파리가 졸지에 곤경을 만나

惝慌良可悒 두려워 불안해 하니 참으로 가엽도다.


신경준은 연민의 태도에서 바로 벗어나 야충의 먹이 감 포획에 대해 장시간 관찰하여 얻은 결과를 19-30구까지에 담담하게 표현했다. 하루에 잡은 벌레의 수를 세어 표현한 것이 한 예이다.


小蟲力固微 작은 벌레는 힘이 진실로 미약하니

快如峱陽獵 노산 남쪽에서 사냥하듯 호쾌하건만

大蟲雖肥豊 큰 벌레는 살찌고 풍성하더라도

悵望將奈罨 멍하니 바라만 보지 어찌 잡겠는가?

一日較所得 하루에 잡은 것을 비교해보면

必且五與十 반드시 다섯에서 열 마리 이리라

爾有幾子女 너는 자녀가 몇이 있으며

爾有幾妻妾 너는 처첩이 몇이 있느냐?

苟爾一身口 네 몸뚱아리의 입 하나 뿐이라면

日日胡謂乏 하루하루 어찌 부족하다 하겠느냐?

靜伺長張哆 조용히 엿보며 오래 입 짝 벌리려면

爾吻應苦澀 네 입술은 응당 쓰고 떫으리니


곤충시『野蟲』은 신경준의 객관적 존재로서의 자연관을 확인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두 자식의 식습관(食習慣)이 다름을 보여주고 자식들의 잘못을 꾸짖을 수밖에 없다 한 것은 자식들도 서로 같지 않은데 곤충이 사람과 다른 것은 당연한 것이니 곤충의 객관적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만물은 각자 방식대로 존재하고 살아가는 객관적 존재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齊人生兩子 제 나라 사람이 두 아들을 낳았는데

兩子行不叶 두 아들의 행동이 맞지 않았다.

一子食烹鵝 한 아들은 삶은 거위를 먹어도

嘔吐不留口帀 토할 뿐 맛을 보지도 못하고

一子吮膿痔 다른 하나는 고름을 빨아 먹고도

美甛逾旨月葉 저민 고기보다 달고 맛있다고 하네.

父母其奈爲 부모가 그것을 어찌 하리오

宜責子所執 자식들 지난 버릇을 꾸짖을 수밖에

感唶賦野蟲 느낀바 있어 들판의 벌레를 읊으니

庶或觀此什 혹 이 시를 보아주기를 바라네.


이규보의 시 <매미를 놓아주는 노래(放蟬賦)>보다 더 객관적 자연관을 보여주는 시가 신경준의 『小蟲十章』이다.


<개구리(蛙)>

群呼競唱野塘流 들녘 못에 무리지어 다투듯 울어대는

皤腹彭亨錦襖頭 하얀 배 볼록하고 비단 같은 머리의 개구리

汲汲終宵如不及 밤새워 모자란 듯 울어대더니

緣何日出一齊休 해 뜨자 어쩐 일로 일제히 그치나


<개미蟻>

九闕崔嵬一竅深 높다란 구중궁궐은 구멍하나 깊이요

邦畿恢拓老槐林 넓게 펼친 나라 땅은 느티나무 고목 숲이로다

美甘不似蜂王積 아름답고 달기야 여왕벌만 못하지만

能使臣民保古今 신민으로 하여금 오랜 세월 보존하게 하네.


<나비蝶>

春於粉翅許香緣 봄이면 고운 날개로 좋은 연분 맺어주고

乍在枝頭忽向天 언뜻 가지 끝에 있더니 홀연 하늘로 나네

野紫山紅看已盡 보랏빛 들판 붉은 산 이미 다 보았으니

海棠何處號神仙 해당화피는 어느 곳에 신선이라 부르나


위 3시의 공통점은 해당 곤충을 자세히 관찰하여 그 생태적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것이다. 개구리의 외관과 매미가 사는 구멍의 집을 구중궁궐에 비유해 익살스럽게 묘사했고 나비가 날개로 좋은 연분을 만들어준다고 에둘러 표현하기는 했으나, 해가 뜨면 울음을 그치는 개구리, 느티나무 고목 속에 구멍을 깊숙이 내고 살아가는 개미, 그리고 이 꽃 저 꽃을 날아다니면서 열매를 맺게 해주는 나비 등의 사실적 묘사에서 신경준의 객관적 자연관을 읽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4. 서정적자연관(抒情的自然觀)


서정적자연관이란 자연에 대한 표현과 서술양식에 따라 분류한 것으로 서사적자연관과 대응되는 개념의 자연관이다. 시의 요체는 서정시라 말하여도 결코 무리가 아닌 것이 서정시야 말로 세계를 자아화한 문학작품이기 때문이다. 조기영은 서정적 자연관이란 시인 개인의 시적 정감을 자연물과 같은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표현하는 양식이라 했다. “객관적 자연물과의 교융에 의해 시인의 내면적 감정이 표출되는 것이 서정시의 일반적 모습”임을 전제 할 때 서정적자연관을 가름하는 기준으로 시인이 묘사한 자연물이 객관적 자연물로 쓰였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순서이다.


<황조가>에 나타난 자연관은 서사적 자연관이 아니고 서정적 자연관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고구려의 유리왕이 부인 치희와 이별한 슬픔을 꾀꼬리라는 객관적 자연물에 담아냈기 때문이다. 고려의 정지상이 남긴 아래의 시에서도 사랑하는 임과 이별하는 슬픔을 대동강의 강물에 잘 담아낸 시이다.


대동강

비 개인 강둑에는 풀빛 더욱 짙어가고

임 떠나는 남포에는 슬픈 노래 울려라

대동강 푸른 물이 마를 날 있을 건가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 더하네


여암 신경준의 곤충시 ‘소충십장’에서 서정적 자연관을 찾아볼 만한 시는 몇 수 안된다. 이것은 신경준이 곤충을 묘사하면서 시적 감흥을 얻기보다는 사실적 생태를 그리는데 치중해서이다.


<개똥벌레(螢)>

初謂流星落屋東 별똥별이 집 동쪽에 떨어졌나 싶더니

更疑柳絮泛輕風 다시 보니 가벼운 바람에 버들개지 날리는 듯 하여라.

太陽杳杳西歸後 태양이 아스라이 서산으로 넘어간 뒤

欲補餘光起草中 사라진 빛 대신하려 풀밭에서 피어났다


개똥벌레 정도이면 얼마든지 서정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다산 정약용이 지은 아래 시 <반딧불>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산림에 사는 선비 그 누가 있어/이 불빛에 잔경을 비춰 볼 건가”의 결구만 보아도, 신경준의 <개똥벌레(螢)>에서 찾아볼 수 없는 서정성이 보다 물씬 풍긴다.


반딧불

쓸쓸히 높이 솟은 오동나무 바깥으로

두어 마리 반딧불이 이리저리 날아드네

밝은 해가 고루고루 사방을 비치니

저 같이 작은 것도 그 빛 받아 반짝이네

반짝반짝 많은 사람 놀라게 하면서도

당당하게 제 모습 숨기지 않네

산림에 사는 선비 그 누가 있어

이 불빛에 잔경을 비춰 볼 건가


신경준은 문학적 형상화를 위해 익살스럽게 표현하기는 했으나 개똥벌레를 객관적상관물로 해서 담은 시적정서가 보이지 않는다.


『小蟲十章』 중에서 서정적자연관을 보이는 가장 잘 보여주는 시는 <귀뚜라미(蛬)>이다. 신경준은 귀뚜라미를 경물화해 가을밤의 정서를 성공적으로 담아냈다.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를 듣고 쫓겨난 부인과 나그네가 수심에 잠긴다는 것은 다른 곤충 시에서 찾아볼 수 없는 서정적 표현이다.


<귀뚜라미(蛬)>

喞喞寒聲動九秋 찌륵 찌륵 싸늘한 소리 가을 밤에 울어대니

屛妻孤客一時愁 쫓겨난 부인, 외로운 나그네 수심에 잠긴다

苦吟何事棲空壁 무슨 일로 괴롭게 우느라 빈 벽에 붙어 있나

試看蜻蜒碧落遊 푸른 하늘에 노니는 잠자리를 보게나.


아래 시는 매미를 읊은 시이다.


<매미(蟬)>

風枝露葉永相依 흔들리는 가지 이슬 맺힌 나무 잎에 길이 서로 의지하여

吟哢不知姸日遲 우느라 고운 해 더딘 줄 모르네.

遠挹高風人不見 원대한 높은 품격 알아보지 못하니

徘徊樹底立移時 나무 밑을 서성대며 한참 섰노라


안대회는 고려시대 이래 장구한 기간 동안 시인들이 즐겨 음영하는 사물이 따로 존재했고 매미에 부여된 일반적 상징성은 깨끗한 선비라고 했다. 이것은 매미가 귀뚜라미나 여치처럼 낮은 곳에서 울지 않고 나무 위 높은 곳에서 우는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 시에서도 매미가 고귀한 존재로 그려졌다.


“원대한 품격을 알아보지 못하니/

나무 밑을 서성대며 한참 섰노라”의 시구에서 잘 드러난다.


<귀뚜라미(蛬)>처럼 시인의 고유한 정서를 드러내지 못하고 그저 예부터 전해오는 일반적 상징을 담는데 그쳐 서정성에서 <귀뚜라미(蛬)>보다 떨어진다 하겠으나 다른 곤충 시보다는 서정적 자연관이 잘 드러나는 시라 하겠다.


V. 맺음 말


신경준은 실증과 고증을 중시한 18세기의 실학자이다.


지금까지 신경준의 자연관이 무엇인지 그의 곤충시를 통해 알아보았다. 조기영이 분류한 자연관을 분석의 틀로 삼아 곤충시 『野蟲』과 『小蟲十章』의 10수 등 총11수에 담긴 자연관을 도출해보았다. 분석대상으로 삼은 시의 절대 편수가 적어 일반화시키기에는 무리이다 싶지만, 11수 모두 대상 자연물을 나름 객관적으로 그린 영물시로 분석 결과 신경준의 실증적이고 고증적인 학문경향이 잘 드러나 있음을 보았다.


곤충시를 분석해 얻은 신경준의 주된 자연관은 제물론적 입장에서 만물을 똑같이 대하는 친화적 자연관과 곤충 하나하나의 존재가치를 인정하고 자연물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한 객관적 자연관이다. 고증과 실증을 중시하는 신경준이 과학과 실용을 중시하는 순자보다 자유를 추구하며 분방하게 살다간 장자의 입장에서 친화적 자연관을 가진 것은 의외의 일로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신경준의 곤충 시에서 약하게나마 순응적자연관과 서정적자연관이 드러난 것은 비록 실학자이지만 제 학문과 사상을 두루 통섭하고자 한 그의 노력을 고려해 볼 때 얼마든지 있음직한 일이다.


신경준이 남긴 시는 총 56제 154수이다. 본고에서 분석한 시는 2제 11수에 불과해 본고만으로는 신경준의 자연관이 이런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결론짓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 11수 모두 삶의 끝 무렵에 지은 것들이어서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자연관이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알아내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전체 시를 제재별로, 그리고 생애단계별로 나누어 분석해야 신경준의 자연관이 어떤 변화를 해왔고 주된 자연관이 바로 이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또한 앞으로의 연구과제이다.


참고문헌


1.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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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수, 『산경표』, 푸른산,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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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영, 『한국시가의 자연관』, 북스힐, 2005.


2.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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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주, 『역주 여암시』, 경성대학교 문학석사학위논문, 2003.

박명희,「여암 신경준의 영물시 연구」, 『한국언어문학』35, 한국언어문학학회, 1995.

안대회,「한국 충어초목화훼 시의 전개와 특징」,『한국문학연구』2,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한국연구소, 2001.

이준호, 『여암 신경준의 학문경향과 시세계』,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석사학위논문, 2011.



산경도와 산맥도(출처: 우리산줄기이야기)

 “산경도”란 우리나라 전통산지 인식체계 즉 산자분수령에 의한 산줄기 흐름을 지도에 나타낸 것으로 백두대간 장백정간 한북정맥등 13개의 정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산줄기의 연속성에 의한 분수계를 따라 이루어졌다

 “산맥도”란 하루 빨리 없애야할 지도로 일본학자들이 일제강점기에 만든 태백산맥 등을 지도에 나타낸 것으로 산줄기의 연속성이나 분수계와는 관계없이 땅속의 지질구조선을 따라 만들어졌다고 하나 그것도 허구라는 당위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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