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지도

순창 아미산 배미산 가산

꼴통 도요새 2017. 10. 31. 04:20

 

순창 아미산, 배미산, 가산, 옥녀봉, 동산

 

1. 산행지: 아미산(峨眉山515.1m), 배미산(414m), 가산(421m), 옥녀봉(303.5m), 동산(345m)

2. 위치: 전북 순창군 풍산면

 

6. 산행거리및 시간: 10.51km/ 4시간 25분

 

8. 산행코스: 송정마을→굴다리→암릉→아미산→아미산정상→고인돌→철계단→신선바위→배미산→못토고개→옥녀봉→못토고개→가산 →동산→귀래정

7. 들머리: 날머리: 풍산면 반월리 월명교[출발/ 도착]

8. 산행코스: 월명교→월명마을→청적봉→아미산 왕복→옥녀봉 왕복→안산 왕복→월명교

 9. 특징:

아미산

조선의 대학자이며 풍수지리에 능통한 서거정은 아미산 품에 안겨 있는 순창을 ‘호남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湖南之勝地)’으로 평가했고, 시인묵객들은 ‘산은 높으나 그윽하다(山高勢幽)’고 예찬했다. 지리적으로 본 아미산은 북쪽에는 조선시대 궁중진상품으로 유명한 전통고추장을 재현하는 민속마을을 품었다. 동쪽의 남산에는 조선시대의 최고의 정자로 담양 면암정과 쌍벽을 이루는 귀래정歸來亭과 우리나라 전통지리서인 산경표山經表를 편찬한 여암 신경준 생가, 그리고 순창이 나은 권일송 시인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서쪽 금과방향으로 뻗어간 줄기에는 다섯 명의 재상이 태어날 명당이 있어 더욱 가보고 싶은 곳이다. 향토사학자 양상화씨에 의하면 순창에서 바라보는 아미산은 마치 배의 형상(伏舟)이라서 배산으로 불렀던 것을 일본인들이 역 이용해서 천지개벽 때 배를 매어 두었던 배맨산으로 왜곡했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금과방향에서는 미인의 눈썹, 또는 초승달을 닮은 중국 산동성 백산현에 있는 아미蛾眉산과 같은 의미로 부른다. <<한국지명총람>>에는 산이 높고 험하다는 의미로 정상을 아미산, 서남쪽 금과로 뻗어 나온 산줄기에 있는 다섯봉우리 중 414봉은 중아미산, 끝 봉은 소아미산으로 기록됐다. 반면 양화화씨는 서남쪽 금과방향으로 용처럼 꿈틀거리며 뻗어 가는 산줄기에 다섯 봉우리가 첨예하게 솟아 있는 것을 다섯 재상이 태어날 명당이라고 했다. 그 산줄기 아래에 400년 전 부터 부자들이 집성촌을 이루는 대장리가 있는데, 일본인들이 다섯명의 재상이 나올 것을 우려해 마을 위 오상재에 쇠말뚝을 박고 배맨산으로 불렀다고 한다. 풍산면 상죽마을 남수원(652-9606)씨에 의하면, 못토재는 옛적에 순창으로 통하는 큰 고개였으며, 상죽의 동쪽 봉우리를 작은 아미산, 상죽마을 뒷편의 중봉을 아미산, 북쪽 암봉의 정상을 시루봉이라고 했다. 또한 순창지역 주민들은 아미산을 ‘배맨산’이라고도 하는데 옛적에 산 주변에 물이 가득 차서 시루봉 정상에 있는 절구통바위에 배를 매어 두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마도 양상화씨 고증과 같이 일본인들이 배산을 배맨산으로 왜곡한 듯 싶다. 아무튼 아미산은 말의 꼬리향상의 마미산(馬尾), 높고 험하다는 뜻의 아미산(峨嵋), 여인이 요염하게 웃음짓는 아미산(峨媚), 배 모양의 배산(舟), 배를 매 두었던 배맨산 등 다양하고 복잡한 이름을 갖고 있어 하루빨리 재정립해야겠다. 그리고 역사적 의미가 살아 숨 쉬는 신말주 세거지 남산대에 있는 귀래정은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자 조선의 실학자 신말주가 관직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는 의미로 서거정이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언급하여 명명한 정자다. 그리고 신말주의 부인 설씨는 강천사의 중창불사 시주를 권하는 보물 <설씨 권선문첩>을 지었고, 후손 신경준은 조선 영조의 명을 받아 우리나라 전통지리서인 산경표를 편찬하였기에 오늘날 후손과 산악인, 지리학도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아미산은 비록 낮은 산이지만 울창한 소나무 숲과 바위가 어우러진 모습과 정상에서 배미산으로 이어지는 암봉의 웅장한 모습은 이 부근에서 보기 드문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특히 순창방향보다는 금과방향에서 바라보는 경관이 더욱 정겹고 아름다워 금과의 명산으로 불린다. <<산경표>>의 우리전통지리로 고찰해 본 아미산의 산줄기는 이렇다. 호남정맥 강천산과 광덕산을 지나 덕진봉 직전의 332봉에서 동쪽으로 가지 친 지맥이 223봉과 아미산을 지나 순창과 풍산에서 여맥을 다한다. 물줄기는 섬진강에 합수되어 남해의 광양만으로 흘러든다. 행정구역은 순창군 순창읍, 금과면, 풍산면을 경계한다. [신말주 세거지 및 신경준생가]조선조 문신 신말주 선생이 세조가 단종을 폐위(1456년)하고 왕위에 오르자, 순창으로 낙향하여 지은 귀래정(歸來亭)에서 시문을 벗 삼으며 10명의 노인과 십로계를 맺고 지은 십로계 첩을 만들었다. 그의 부인 설씨는 1482년 강천사 부도암 중창불사에 시주를 권하는 설씨 권선문첩(보물 728호)이 있다. 그곳은 조선 영조의 명을 받아 우리나라전통지리서인 산경표(山經表, 1769년)를 편찬한 여암 신경준의 생가다. 매년 10월 중순에 순창고추장 축제가 열린다. 조선시대 궁중 진상품으로 유명한 순창고추장은 최근 들어 발효식품의 항암 및 비만억제 효과 등 우수성입증과 웰빙 바람과 함께 우리식생활에서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산행안내

o 1코스: 송정마을(24번국도)-88고속도로 굴다리-(1.5)아미산-배미산-(2.5)못토재-(1.5)가산-(2.5)풍산면 탄금마을(27번국도)(5시간, 8.0km)

o 2코스: 백야마을-88고속도로굴다리-농장-송림-안부-정상-동남능-암능-안부-못토재-민속고추장마을(5.3km 3시간)

 

송정마을 앞 24번국도와 88고속도로로 굴다리로 들어가면 김해김씨 비석이 있는 곳이 산행들머리다. 동쪽으로 울창한 소나무마다 담쟁이덩굴이 줄타기하고 있다. 송림과 바위가 어우러진 능선을 걸으면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아미산 정상이다.(송정에서 50분소요) 사방이 탁 트여 조망이 훌륭하다. 북쪽 회문산과 장군봉, 동쪽은 순창과 남원의 고리봉. 문덕봉이 한눈에 잡힌다. 정상에서 암릉을 지나면 배미산의 거대한 바위에 설치된 철 계단을 타고 내려간다. 신선바위를 지나면 서쪽 발산. 상죽마을, 남쪽 배미산을 알리는 팻말이 마중 나온다. 밋밋한 능선에 묘소가 있는 배미산에 닿는다. 배미산의 철 계단을 내려오면 아미산농장 울타리를 따라 간다. 임도로 가다 밤나무 농장이 있는 쉼터를 지나면 못토재를 만난다.(아미산에서 1시간15분)

못토재에서 농가 2채가 있는 동쪽으로 오르면 대나무 숲 간이화장실이 있는 남쪽 임도를 따라 등산로가 이어진다. 임도가 끝에서 밤나무 단지 우측으로 너덜을 지나 잡목 숲을 헤치면 삼거리다. 북쪽 능선은 신경준 생가가 있는 남산으로 이어진다. 남쪽 바위를 우회하면 거대한 바위에 자리한 가산에 닿는다. 작은 봉우리들이 계속 나오는 소나무 길을 걸으면 벌꿀농장의 외딴집을 만난다. 소 농장을 거쳐 풍산과 순창을 잇는 27번 국도변의 탄금마을 앞에 닿는다.[출처/ 새만금일보]

[정의]

1597년 8~9월에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아미산 일대에서 일본인이 일으킨 순창군민 학살 사건.

[역사적 배경]

1597년 정유재란이 발생하고 일본군은 전라도 방면으로 대거 들어오게 된다. 8월 16일에 남원성을 함락한 일본군의 주력 부대는 전주로 향하게 되고, 일부 부대는 두 갈래로 순창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 중 한 갈래는 순창읍내로 들어오고, 다른 한 갈래는 팔덕면 방면으로 들어왔다.

[경과]

당시 순창 군수 배경남(裵慶男)은 가족과 함께 산속으로 도망하였고, 일본군 500여 명이 무인지경으로 순창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읍민들과 주변 마을 사람들은 피난 짐을 꾸릴 시간도 없이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하였다.

[결과]

일본군들은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재산을 약탈하였으며, 병사를 나누어 백성들을 학살하였다. 이때 일부 사람들이 남쪽 아미산(峨嵋山)으로 도망하였으나 모두 학살당하였다. 아미산은 순창읍과 풍산면, 금과면, 팔덕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해발 515m이다.[출처/ 향토문화전자대전]

아미산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

아미산(娥媚山) 요염하게 웃음 짓는 여인의 눈썹을 닮았다는 의미

아미산(峨嵋山) 높고 험하다는 의미,

정상석 표기, 아미산峨嵋山(518m),

마미산(馬尾山) 말꼬리 형상이라는 의미

배산[舟山] 배 모양이라는 의미

배맨산: 배를 매어 두었던 곳이라는 의미

 

---북쪽---

장군봉782.6m(355˚/16.7km)

회문산830m(정북0˚/16.7km)

 

---동쪽---

문덕봉598m(80˚/13.8km)

고리봉710m(95˚/13.7km)

지리산 노고단1503m(100˚/39.5km)

 

---남동---

동악산735m(120˚/15.6km)

 

---남쪽---

백아산810m(165˚/20.9km)

설산523m(185˚/6.1km)

무등산1186.8m(200˚/27km)

 

---서쪽---

병풍산822m(260˚/20.2km)

 

---북서쪽---

추월산731m(293˚/12.7km)

산성산603m(300˚/7.5km)

내장산763m(305˚/24km)

강천산584m(320˚/7.5km)

 

아미산은 5명의 재상이 배출된다는 풍수설을 믿은 일인들이 정상에 쇠말뚝을 박아놓고 주민들에게 옛날 배를 매었던 말뚝이라 속이기도 했다. 아미산이 순창읍 방향으로 배를 엎어 놓은 듯 한 복주(伏舟) 형상이라서 배산으로 불렀던 것을 역이용한 것.

아미산은 515m로, 순창군 금과면에서 바라보는 경관이 순창읍 방향에서 보는 경관보다 뛰어나다.

 

설씨부인 권선문[薛氏夫人勸善文]

조선 중기의 문신 신말주(申末舟)의 부인 설씨가 지은 권선문첩

필사본. 보물 제728호. 1첩. 이 권선문첩은 설씨가 남편과 함께 전라도 순창에 낙향해 있을 때, 광덕산(廣德山)에 절을 세우기 위하여 1482년(성종 13)에 신도들에게 시주를 권선하는 글을 짓고 사찰의 설계도를 그려 돌려보게 한 것이다. 이 문첩은 붉은 종이를 붙인 16폭의 절접(折摺)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 14폭에는 권선문이 먹으로 쓰여 있고 나머지 2폭에는 사찰의 채색도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절접의 뒷면에는 설씨 부인 후손들의 가전(家傳) 서찰과 권선문에 관한 글이 있고, 끝에는 ‘성화 18년(1482) 7월 일 정부인(貞夫人) 설(薛)’이라는 작성연대와 인장이 날인되어 있다. 양쪽의 표장(表裝)은 채색 문양이 있는 비단천으로 장식하였다. 이 문첩은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쳤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훼손되었고, 또한 10번째의 절접은 5항 중 2항이 손상되어 다른 사람의 글씨로 되어 있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비교적 잘 보존되어 온 고문서이다. 조선 초기 사대부의 집안에서 불사에 관심을 보인 일면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국립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순창 여인들의 길>>

안정샘-산동리남근석-0.13km/1'-창덕리남근석-2.1/3'-대모암-0.1/1'-홀어머니산성-4.6/7'-설씨부인권선문-0.1/1'-귀래정-2.2/3',0.1/1'-물통골약수터-9.8/12'-고려직제학양수생처열부이씨려-4.0/4'-요강바위

<맨 아래 그래프의 거리/시간 표기는 도보와 차량이 섞여 있어 혼란스럽다. 거리만 참고하면

0.13+2.1+4.6+0.1+2.2+0.1+3.7+9.8+4.0=약 27km 정도로 보아야겠다.>

 

남산사는 고령신씨 사당이다.

귀래정 신말주선생 후손세거지[歸來亭 申末舟先生 後孫世居地]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에 있는 조선시대 고택(古宅)

1994년 8월 10일 전라북도기념물 제86호로 지정되었다. 단종 때의 문신 신말주(申末舟:1429∼?)와 정부인(貞夫人) 설씨(薛氏)를 비롯하여 신경준(申景濬) 등 그의 후손들이 살았던 곳이다.

신말주는 신숙주(申叔舟:1417∼1475)의 동생으로 1429년(세종 11)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자즙(子楫), 호는 귀래정(歸來亭)이다. 1451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454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면서 벼슬길에 올랐으나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부인 설씨의 고향인 순창으로 내려와 귀래정을 짖고 시문을 벗 삼아 지냈다.

이후 신씨는 대대로 세를 이루어 명문가로 자리 잡았는데 특히 11대손인 신경준은 영조 때의 학자로 1754년 문과에 급제, 강계(江界)·순천(順天) 부사, 제주목사(濟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1996년부터 복원사업이 추진되는 이곳에는 신경준이 그린 고지도 3점과 설씨부인권선문첩(薛氏夫人勸善文帖)을 비롯한 여러 점의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귀래정 신말주후손세거지 [歸來亭申末舟後孫世居地] (두산백과)

 

<안내판의 내용>

이곳은 1455년 단종이 왕위를 물러나고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귀래정 공이 27세에 낙향하여 그 후손이 대대로 거처하여 온 곳이다.

귀래정은 형 신숙주의 권유로 세조 5년(1459)에 사간원 우헌납 등 여러 관직에 출사하여 세조 13년(1467)에 벼슬을 사양하고 다시 낙향했다고 한다. 성종 7년(1476) 전주부윤으로 임명되어 다시 이곳을 떠난 뒤 70세에 낙향하여 말년을 보낸 곳이다.

권선문(보물 728호)을 지은 귀래정의 배위인 설씨부인의 출생지이며, 또한 중종의 명신으로 신공제(申公제)공과 영조조에 실학자인 여암 신경준이 출생한 곳이다.

이외에도 충신과 효자, 열녀, 명사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다.

 

귀래정[歸來亭]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에 있는 조선시대 누(정)각.

1984년 4월 1일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67호로 지정되었다.

1456년(세조 2) 신숙주(申叔舟)의 아우 신말주(申末舟:1439∼?)가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내몰고 제7대 왕위에 오르자 이에 불만을 품고 벼슬에서 물러나 순창으로 낙향, 자신의 호를 딴 귀래정(歸來亭)을 짓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키면서 은둔생활을 하던 곳이다. 순창읍에서 88올림픽고속도로 진입로를 따라 1㎞ 지점에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74년 다시 세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귀래정기(歸來亭記)》와 강희맹(姜希孟)의 시문 등이 액판으로 보존되어있다.

 

귀래신선생유허비와 신경준생가터유지비

 

신말주[申末舟]

자 자즙(子楫), 호 귀래정(歸來亭)

출생 - 사망 : 1429년(세종 11) ~ 1503년(연산군 9)

본관 : 고령(高靈)

대표관직(경력) : 대사간, 전주부윤, 첨지중추부사

 

조선전기 대사간, 전주부윤, 첨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자집(子楫), 호는 귀래정(歸來亭). 서화가 신덕린(申德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조참의 신포시(申包翅)이고, 아버지는 공조참판 신장(申檣)이며, 어머니는 정유(鄭有)의 딸이다. 신숙주(申叔舟)의 동생이다. 1454년(단종 2)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식년 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다. 성격이 조용하고 담담하여 벼슬하기를 즐기지 않았다.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로 벼슬을 사임하고 물러나 순창에 살면서, 귀래정을 지어 산수를 즐겼다. 형 신숙주가 강권하여 벼슬에 나오게 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신말주가 1470년(성종 1) 봄에 순창에 내려가 오래 귀경하지 않아 한때 파직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뒤 1476년 전주부윤, 1483년 창원도호부사, 1487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와 대사간, 이듬해 첨지중추부사·전라수군절도사를 지낸 기록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말주 [申末舟]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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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말주 선생의 십로계첩[申末舟先生-十老契帖]

전라북도 순창에 은거한 조선 전기의 문신 신말주가 십로계에 관한 사항을 정리한 화첩.

 

신말주(申末舟)[1429~1503]의 본관은 고령, 자는 자즙(子楫), 호는 귀래정(歸來亭)이다. 1429년(세종 11)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형은 신숙주(申叔舟)이다. 단종 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로에 나갔으나 세조가 단종을 폐위함을 옳게 여기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아내 설씨 부인의 고향인 순창에 내려와 정착하였다. 그 후로 후손들이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 남산대에 신씨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신말주는 노년에 이르러 순창에서 지기상합(志氣相合)한 노인 9명과 계회를 맺어 ‘십로계(十老契)’라 이름하였다. 계의 연유와 목적, 성격, 행동 등을 적은 서문을 쓰고, 여기에 본인을 포함한 10명의 노인들의 인물도를 그리고 경구시를 첨부한 것이 이 십로계첩(十老契帖)이다. 서문과 도형을 쓴 계첩(契帖) 10벌을 만들어 각각 그 후손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나 다른 계첩은 찾을 수 없고 원작 첩질인 신말주의 것만 현재 후손인 신길수가 보관하고 있다. 남원 장조평(張肇平)의 사당인 십로사(十老祠)에 소장된 것이 있었다 하는데 8·15 광복 후에 도난당하여 행방을 알 수 없다. 신말주가(申末舟家)의 계첩 또한 분실되었으나 그것을 다시 찾은 기연은 다음과 같다.

“신말주의 8세손인 신후정(申後棖)이 화탄(花灘)[순창군 유등면]가에 살았는데, 어떤 노승이 문을 두드렸다. ‘이곳이 신씨 집입니까?’라 함에 ‘그렇습니다.’라 하니 그 중은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저는 십로계 중 이 아무개 후손입니다. 제 선조의 후손 중에 이제 저 한 사람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이 계축을 사서 안고 산중으로 이리저리 어렵게 생활하면서 지금까지 이것을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지금 제 나이가 여든입니다.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나 딱히 이것을 줄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생의 수적(手跡)입니다. 그러니 선생의 후손들에게 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 계축을 가지고 왔습니다.’라 하고서는 화축을 꺼내서 바쳤다.”[신경준, 「십로계축 후서(十老契軸後敍)」『여암 유고(旅庵遺稿)』 권5]. 이 내용은 신말주의 10세손인 신경준(申景濬)[1712~1781]이 1731년(영조 7)에 다른 성씨 기로(耆老)의 후손이 소장하고 있던 십로계축 중의 한 본을 전해 받은 기연을 70세가 된 1781년(정조 5)에 적은 것이다. 신말주 선생의 십로계첩은 1992년 6월 20일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십로계첩은 1499년(연산군 5)에 신말주가 직접 그린 그림과 시 10점을 모아 엮은 첩본이다. 전문 420자로, 신말주가 처음 작성할 때는 가로 12.5㎝, 세로 28.5㎝인 종이 11장에 매첩 4행 12자로 각 개인의 해학적인 칠언 절구(七言絶句)를 적었다. 그중 1첩에는 2행 14자로 서문을 적었는데 가로 18.5㎝, 세로 23㎝ 크기에 계를 맺은 연유, 목적, 성격, 행동 등이 기록되어 있고, 또한 10명의 인물도를 그린 후 각 개인의 생활과 인격, 사상과 함께 계훈적인 절구시(絶句詩)를 적어 넣었다. 현재 십로계첩과 관련되어 남아 있는 그림은 삼성 미술관 리움 소장본[권],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142호 고령 신씨 가전본[첩], 1790년 김홍도 모사본 「십로 도상도(十老圖像圖)」[첩, 호암 미술관 소장], 1997 한국 고미술 대전에 출품된 후모본[첩], 2009년 5월 서울 인사동 화랑 고도사에 전시된 개인 소장의 후모본[첩] 이 5점이다. 이 중에서 고령 신씨 가전본은 서문과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고 첩의 형태로 장황(粧imagefont)되어 있다. 그림의 형태는 첩의 각 면 위에 작은 그림을 잘라 붙인 형태이고, 그림의 끝부분이 잘린 곳도 확인된다. 따라서 원래 두루마리[축(軸)] 형태였던 것을 첩으로 개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 부분의 화면은 세로가 가로보다 약간 길지만 거의 정사각형에 가깝다.

 

십로계첩에 기록된 10명은 생년월일 순으로 서열을 메기고 나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돌아가면서 모임을 주관하였다. 모임을 여는 순서가 한 바퀴 돌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방식이었다. 순서대로 나열해 보면, 이윤철(李允哲)-안정(安正)-김박(金博)-한승유(韓承愈)-설산옥(薛山玉)-설존의(薛存義)-오유경(吳惟敬)-신말주-조윤옥(趙潤屋)-장조평의 순이다. 십로계첩은 한 장에 인물 한 명을 배치하고 기물이나 배경은 소나무, 시녀, 바위 등으로 최소화하였다. 화면 상단에는 각 인물의 생활·인격·사상 등을 읊은 4행의 시를 적었다. 산수화 위주에 계회 장면을 작게 표현한 16세기 궁중의 계회도(契會圖)와는 달리 인물 위주로 표현한 점이 특징이다. 대부분 수염이 기다란 노인이 방석 위에 앉아 있는데, 흥에 겨워 덩실덩실 춤을 추거나 술을 이기지 못하고 드러누운 경우도 있다. 그림의 기법은 수묵으로 그린 백묘법(白描法)[동양화에서, 진하고 흐린 곳이 없이 먹으로 선만을 그리는 화법]이며 필선이 매끄럽지는 않다. 인물의 표현은 곡선 위주로 묘사하였고, 붓의 첫머리에 약한 정두(頂頭)를 세웠다. 계회도로는 제작 시기가 이른 것에 속하고 궁중의 공식적인 모임인 계회도가 아닌 문인들의 사적인 계회를 그린 기록화라는 점에서 회화사적 가치가 있는 자료이며, 당시 노인들의 근세적 생활과 사상, 당대의 정치·사회·풍습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논어(論語)』 위정(爲政) 편에서는 “일흔이 되어서는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고 하여 뜻대로 하여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나이를 ‘종심(從心)’이라 하였다. 또한 옛날에는 평균 수명이 짧아 80세 이상 사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심지어 70세까지만 살아도 장수한 것으로 여겨 중국 당나라의 시인 두보(杜甫)도 「곡강시(曲江詩)」에서 “사람이 70까지 사는 것은 예부터 드물었다[人生七十古來稀]”고 하여 70세를 ‘고희(古稀)’라고도 부른다. 이와 같이 당시 70세가 넘은 노인 10명이 모여 계를 형성하였다고 하는 점은 후대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신말주의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후대의 자손들에게 경책(警責)을 삼게 하기 위한 의도가 가장 크다고 할 것이다. 또한 십로계첩의 화풍이 『설씨 부인 권선문』의 ‘광덕산 부도암도(廣德山浮圖庵圖)’의 것과 유사하여 십로계첩의 그림을 설씨 부인이 그렸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였고, 설씨 부인이 아닌 다른 사람의 작품으로 보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인물도의 작가가 누구이냐의 문제는 10점 중 현재 단 한 점만 남아 있는 상황에서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다. 추후 다른 작품이 발굴되었을 때 온전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말주 선생의 십로계첩 [申末舟先生-十老契帖]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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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준(申景濬)[1712~1781]

자 순민(舜民), 호 여암(旅菴)

출생 - 사망 : 1712년 ~ 1781년

 

1712(숙종 38)∼1781(정조 5). 조선 영조 때 학자.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순민(舜民), 호는 여암(旅菴). 아버지는 신숙주(申叔舟)의 아우 말주(末舟)의 10대손인 진사 내(淶)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로 의홍(儀鴻)의 딸이다.

33세 때까지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며 살다가 33세부터 43세까지 고향에 묻혀 살면서 저술에 힘썼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운해훈민정음(韻解訓民正音)』(세칭 훈민정음운해)을 꼽을 수 있다.

43세 되던 1754년(영조 30) 비로소 향시에 합격했는데 당시의 시험관은 홍양호(洪良浩)였다. 그 해 여름 증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상경 후 홍양호와의 교분이 두터웠다. 과거합격 후 정언·장령·현감 등을 역임한 다음 1769년 종부시정(宗簿寺正)이 되어 강화의 선원각(璿源閣)을 중수한 뒤 일단 고향에 돌아갔다.

그러나 곧 영조의 명으로 『여지승람(輿地勝覽)』을 감수하고, 1770년에는 문학지사(文學之士) 8인과 함께 『문헌비고』를 편찬할 때 <여지고 輿地考>를 담당하였으며, 이어서 그 해 6월 6일부터 8월 14일까지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의 감수를 맡았다.

이후 승지·북청부사·순천부사·제주목사 등을 역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여생을 보낸 다음 1781년(정조 5) 70세로 일생을 마쳤다. 업적은 여러 문헌에 다음과 같은 논제(論題)나 책이름으로 나타나 있다.

 

『운해훈민정음』(행장에는 五聲韻解)·『일본증운(日本證韻)』·『언서음해(諺書音解)』(유고목록과 서에는 東音解)·『평측운호거(平仄韻互擧)』·『거제책(車制策)』·『병선책(兵船策)』·『수차도설(水車圖說)』·『논선거비어(論船車備禦)』·『의표도(儀表圖)』·『부앙도(頫仰圖)』·『소사문답(素沙問答)』·『직서(稷書)』·『장자변해(莊子辨解)』·『강계지(疆界志)』(또는 疆界考)·『산수경(山水經)』·『도로고(道路考)』·『산수위(山水緯)』(旅菴全書에는 山水考로 통합되어 있음.)·『사연고(四沿考)』·『가람고 伽藍考』·『군현지제(郡縣之制)』 등이다.

 

이상에서 그가 문자학(文字學)·성운학(聲韻學)·지리학(地理學) 등을 중심으로 다방면에 걸쳐서 업적을 남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운해훈민정음』은 송학(宋學)의 시조의 한 사람이라는 소옹(邵雍)의 『황극경세성음도(皇極經世聲音圖)』(正聲正音圖라고도 함.)를 본보기로 하여 일종의 운도(韻圖)를 만들려고 전개한 이론인데, 훈민정음 창제 이후 가장 깊이 문자론(文字論)을 전개한 학술적인 업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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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경표』 [山經表]

순창 출신의 조선 후기 실학자 신경준이 편찬한 조선의 산맥 체계를 정리한 지리지.

신경준(申景濬)[1712~1781]의 자는 순민(舜民), 호는 여암(旅庵)이며 본관은 고령이다.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의 남산대(南山臺)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진사 신래(申淶)이며, 어머니는 한산 이씨로 이의홍(李儀鴻)의 딸이다. 1754년(영조 30) 증광시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장령·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769년에 종부시정(宗簿寺正)이 되어 강화의 선원각(璿源閣)을 중수하였다. 영조의 명으로 『여지승람(輿地勝覽)』을 감수하였고, 1770년에는 『문헌비고(文獻備考)』 중 『여지고(輿地考)』의 집필을 담당하였다. 많은 저술을 하였는데 특히 『운해 훈민정음』, 『언서 음해(諺書音解)』, 『강계지(疆界志)』, 『산수고(山水考)』, 『도로고(道路考)』 등 문자학(文字學)·성운학(聲韻學)·지리학(地理學) 등을 중심으로 다방면에 걸쳐서 업적을 남겼다.

『산경표(山經表)』는 1913년에 최남선(崔南善) 편으로 조선 광문회(朝鮮光文會)에서 활자본으로 간행, 널리 유포되었다.

필사본 1책 48장으로 이루어졌다. 사주 단변(四周單邊)에 행자수(行字數)는 일정하지 않으며, 어미(魚尾)는 없다. 규격은 반곽(半郭) 23.2×15.0㎝이다. 국립 중앙 도서관과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산경표』는 우리나라 산맥[山徑]의 갈래, 분포, 위치 등을 기록한 지리지이다. 산의 내력의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읍치(邑治)를 어떻게 둘러 있는지 등을 상세하고도 일목요연하게 표로 기록하였다. 『산경표』는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한 개의 대간(大幹)과 한 개의 정간(正幹), 13개의 정맥(正脈) 등 총 15개의 산맥으로 조선의 산줄기를 분류하였다. 15개의 산맥은 백두 대간(白頭大幹), 장백 정간(長白正幹), 낙남 정맥(洛南正脈), 청북 정맥(淸北正脈), 청남 정맥(淸南正脈), 해서 정맥(海西正脈), 임진북 예성남 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 한북 정맥(漢北正脈), 낙동 정맥, 한남 금북 정맥(漢南錦北正脈), 한남 정맥, 금북 정맥, 금남 호남 정맥(錦南湖南正脈), 호남 정맥이다.

『산경표』의 산맥 체계는 몇 가지 특징을 보인다. 첫째, 대간과 정간을 제외하면 대부분 하천의 수계(水界)를 기준으로 산줄기를 나누었다. 둘째, 대간·정간·정맥 등으로 산줄기에 위계성(位階性)을 부여하였다. 셋째, 『산경표』에 나타난 간과 맥들은 혈맥이 서로 통하듯이 연결되어 단절이 없다. 넷째, 백두산이 국토의 중심 또는 출발점으로 인식되었다. 『산경표』는 조선의 산맥 체계를 수계(水系)와 연결시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놓은 책으로서,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일본인이 분류, 명명한 산맥 구분 및 산맥 명칭 이전의 조선의 전통적인 산지 분류 체계를 파악할 수 있는 점에 중요한 의의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산경표』 [山經表]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산경표[山經表]

조선 시대 영조 때 여암 신경준이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조선의 산맥 체계를 도표로 정리한 책을 말한다. 우리나라 옛 지도에 나타난 산맥들을 산줄기와 하천 줄기를 중심으로 파악하여 산맥 체계를 대간 · 정맥 · 정간 등의 표현으로 백두대간과 연결된 14개의 정간 · 정맥으로 집대성하였다. 《산경표》는 고토 분지로 등 일본 학자들이 우리나라의 지질 구조선에 바탕을 두고 분류한 근대 산맥 체계보다 현 산세 줄기를 따라서 산세를 파악함으로써 지역 구분은 물론 유역 구분 등 생활권 구분에 보다 가깝고 현실적인 준거를 제시하고 있다.

백두대간 [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동쪽 해안선을 끼고 남쪽으로 흐르다가 태백산 부근에서 서쪽으로 기울어 남쪽 내륙의 지리산에 이르러 우리나라 땅의 근골을 이루는 거대한 산줄기의 옛 이름이다.

 

2005년 1월 1일부터 시행되고 2009년 3월 5일자로 개정된 「백두대간 보호에 관한 법률」에서 “백두대간이라 함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금강산·설악산·태백산·소백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큰 산줄기를 말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산경표에 따르면 백두산부터 원산, 함경도 단천의 황토령, 함흥의 황초령, 설한령, 평안도 연원의 낭림산, 함경도 안변의 분수령, 강원도 회양의 철령과 금강산, 강릉의 오대산, 삼척의 태백산, 충청도 보은의 속리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인 신경준이 쓴 산경표(山經表)에서 한반도의 산줄기를 대간과 정간, 정맥으로 나타낸 체계를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산경표는 1913년 활자로 인쇄된 책자가 많이 남아 있다.

 

과거 우리 조상들이 인식하던 나라 땅의 산줄기〔山經〕는 하나의 대간(大幹)과 하나의 정간(正幹), 그리고 13개의 정맥(正脈)으로 이루어졌다.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여러 갈래로 갈라진 산줄기는 모든 강의 유역을 경계지었다. 크게 나누어 동·서 해안으로 흘러드는 강을 양분하는 큰 산줄기를 대간·정간이라 하고 그로부터 다시 갈라져 하나하나의 강을 경계 짓는 분수산맥(分水山脈)을 정맥이라 하였다.

대간을 이루는 주요 산은 기점인 백두산(2,744m)으로부터 동남쪽으로 허항령(虛項嶺, 1,401m), 포태산(胞胎山, 2,289m), 최가령(崔哥嶺, 1,527m), 백사봉(白沙峰), 두류산(頭流山, 2,309m) 등 2,000m 정도의 높은 산으로 이어져 압록강과 두만강의 유역을 동·서로 분계하였으며 북동쪽으로 장백정간(長白正幹)을 갈래하였다.

 

서남쪽으로 후치재〔厚致峙, 1,335m〕, 부전령(赴戰嶺, 1,445m), 황초령(黃草嶺)으로 이어져 압록강의 남쪽과 동해로 흘러드는 분수기를 이루며, 다시 남쪽으로 차일봉(遮日峰, 1,743m), 철옹산(鐵瓮山, 1,085m), 두류산(頭流山, 1,324m)으로 이어져 대동강의 남쪽 정맥인 해서정맥(海西正脈)을 서남쪽으로 두었다.

 

원산 서남쪽으로 이어진 대간은 마식령(馬息嶺, 788m), 백암산(白岩山, 1,110m), 추가령(楸哥嶺, 752m)으로 연결되어 임진강의 북쪽 유역의 경계를 이루었고 한강 북쪽 한북정맥(漢北正脈)의 시점을 이루었다.

 

동해안을 끼고 국토의 척추인 양 이어진 대간은 금강산(金剛山, 1,638m), 진부령(陳富嶺, 529m), 설악산(雪岳山, 1,708m), 오대산(五臺山, 1,563m), 대관령(大關嶺, 832m), 두타산(頭陀山, 1,353m), 태백산(太白山, 1,567m)으로 이어 흐르다가 남쪽으로 낙동강의 동쪽 분수 산줄기인 낙동정맥(洛東正脈)을 형성시켰다.

 

대간의 본줄기는 내륙 깊숙이 소백산(小白山, 1, 421m), 죽령(竹嶺, 689m), 계립령(鷄立嶺), 이화령(梨花嶺, 548m), 속리산(俗離山, 1,508m)으로 뻗어내려 한강과 낙동강을 남북으로 분수하였다. 이로부터 추풍령(秋風嶺), 황학산(黃鶴山, 1,111m), 삼도봉(三道峰, 1,177m), 덕유산(德裕山, 1,614m), 육십령(六十嶺, 734m), 영취산(靈鷲山)까지 금강의 동쪽 분수산맥을 형성하며 섬진강의 동쪽 분수령인 지리산(智異山, 1, 915m)에서 백두대간은 끝난다.

 

백두대간은 장백정간(長白正幹)과 함께 서쪽으로 해안선까지 많은 ‘골’과 ‘들’을 이루며 뻗어 내려간 13개의 정맥, 즉 청북정맥(淸北正脈)·청남정맥(淸南正脈)·해서정맥(海西正脈)·임진북예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한북정맥(漢北正脈)·한남정맥(漢南正脈)·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금북정맥(錦北正脈)·금남정맥(錦南正脈)·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호남정맥(湖南正脈)·낙동정맥(洛東正脈)·낙남정맥(洛南正脈)과 연결되고 있다.

 

이들 산줄기의 이름은 강줄기의 이름에서 얻어진 것이다. 산과 물이 하나로 자연을 이루고, 언어·습관·풍속 등과 의식주의 다양함이 산줄기와 물줄기의 가름으로 세분화되어 생활 철학을 탄생하게 하였다. 산줄기마다 지역을 구분 짓는 경계선이 되어 부족국가의 영역을 이루었고 삼국의 국경을 비롯하여 조선 시대의 행정경계를 이루었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도 자연스런 각 지방의 분계선이 되었다. 이 땅의 지세(地勢)를 파악하고 지리를 밝히는 데 있어서 백두대간은 그 근본이 된다.

 

「백두대간 보호에 관한 법률」에 의하여 백두대간보호지역이 지정되어 있는데, 이는 백두대간 중 특별히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된 지역에 대하여 산림청장이 지정 고시하는 지역을 말하며, 산림청장이 환경부장관과 협의하여 핵심구역과 완충구역으로 나누어 보호하고 있다. 이 가운데 핵심구역은 백두대간의 능선을 중심으로 일정 구역을 지정하며, 완충구역은 핵심구역의 연접지역으로서 핵심구역의 보호상 필요한 지역을 지정하도록 되어있다.

 

고지도 상에 나타나는 백두대간의 의의는 한반도 산지체계의 근간을 이룬다는 점이고 이를 통해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한반도 전체의 영토, 정치, 인문사회적 측면에까지 민족 정서적 관점에서 삶의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지형적으로는 정간과 정맥이 우리나라 하천의 주요 발원지가 되며, 이것을 중심으로 국토의 물줄기가 갈라지게 되어 현대적으로 의미에서 유역권 구분의 기본이 되고 있다. 정신적으로는 한반도의 역사가 백두대간 중심의 지맥에 뿌리를 둔다는 역사적 의미도 강한 편이며, 우리 고유의 땅의 흐름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자연관을 대표하는 개념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백두대간의 지리적 위치 때문에 한반도 전체의 생물군집의 진화와 퇴보의 과정을 거치면서 생태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경관생태학적으로도 백두대간은 지형적 연결성 때문에 생물의 이동통로로서 작용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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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래정에 글을 남긴 서거정과 강희맹

서거정[徐居正]

출생 - 사망 : 1420 ~ 1488

 

전국(戰國)시대부터 송(宋)나라 때까지 중국 역대의 명문(名文)을 뽑아놓은 책 [고문진보(古文眞寶)]. [고문진보]에서도 그 문장이 가장 많이 실린 인물이 당나라 유학자인 한유(韓愈, 768~824)이다. 특히 [고문진보]에 실린 한유의 문장은 서문(序文)이 큰 비중을 차지하여 가히 서문 전문가라 할 만하다.

 

조선시대 한유에 비견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인물로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을 들 수가 있다. 서거정은 세조의 총애를 받아 승승장구하면서 성종대까지 국가의 편찬 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오랜 기간 대제학을 지냈으며, [경국대전], [삼국사절요], [동문선] 등 주요 책의 서문을 작성한 ‘서문 전문가’였다. 그의 명문들은 [사가집(四佳集)]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조선전기 최고의 문장가 서거정을 만나 본다. 당대 최고의 학맥과 문장을 흡수하다

 

선비 중에 입덕(立德)ㆍ입공(立功)ㆍ입언(立言), 즉 삼불후(三不朽)의 아름다움을 겸비한 자가 드물지만 영원히 전해질 훌륭한 일이 되는데, 하물며 말(言)은 학문의 모범이 되고 공(功)은 관직의 일정한 직무를 지킨 데에 있으며 덕(德)은 인망에 부응하는 달성(達成) 서공(徐公, 서거정) 같은 분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니 그 영원히 전할 것에다 무엇을 더할 것이 있겠는가?

- [국조인물고] 권12, 경재(卿宰) 서거정(徐居正)

 

덕(德)ㆍ공(功)ㆍ언(言)을 겸비했다고 평가되는 서거정. 조선시대에 서거정만큼 영화로운 삶을 산 지식인은 드물 것이다. 그는 네 번 현과(賢科)에 올라 여섯 왕을 섬겨 45년 간 조정에 있었으며, 오랜 기간 대제학으로 있으면서 당대 문단을 주도했다. 실록의 그의 졸기에는 “대제학과 지성균관사를 겸임하였는데, 대개 문형(文衡)을 맡은 것으로서 전책(典冊)과 사명(詞命)이 모두 그 손에서 나왔다1).”고 하여,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문형임을 기술하였다. 서거정은 과거 시험을 23차례 주관하며 많은 인재를 뽑았고, 육조(六曹) 판서ㆍ사헌부 대사헌(大司憲)ㆍ한성부 판윤(判尹)ㆍ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 등 고위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 ‘’

 

서거정의 본관은 대구(大邱)이고, 자(字)는 강중(剛中)이며, 호는 사가정(四佳亭)ㆍ정정정(亭亭亭)이다. ‘거정(居正)’은 [춘추]의 <공양전(公羊傳)>에 “군자대거정(君子大居正)”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는데, 항시 정도(正道)를 지키며 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자(字) ‘강중’은 [주역(周易)]에서 따온 용어이다.

 

서거정의 할아버지는 호조전서(戶曹典書)를 지낸 서의(徐義)였고, 아버지는 목사(牧使) 서미성(徐彌性)이었다. 어머니는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의 딸로, 서거정이 권근의 외손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권근은 이색(李穡)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고려말 이색의 문하에 있었던 정몽주(鄭夢周)ㆍ이숭인(李崇仁)ㆍ정도전(鄭道傳) 등 당대 석학들과 교유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는 태조와 태종을 도와서 새 왕조의 문물을 정비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권근은 초대 대제학을 역임하였는데, 대제학이라는 직책은 과거 시험을 주관하는 자리로서 선비들은 그가 선호하는 문예사조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초기 문인들은 권근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거정은 또한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였던 이계전(李季甸. 1404~1459)에게서도 수학했다. 이계전은 이색의 손자이자 권근의 외손자이기도 했으며, 대제학까지 역임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서거정은 자형(姉兄)인 최항(崔恒)에게도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서거정은 최항에 대해 “처음에 공[최항]이 우리 집안사람이 되었을 때에 나는 나이가 아직 어렸었다. 내가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은 것을 가엾이 여겨 자상하게 일러주고 타일러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었는데, 내가 처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자 집현전에서 10년을 외람되이 동료로 지냈고, 또 관각(館閣, 예문관)에서 수십여 년을 상관으로 모셨다.”라고 했다. 서거정이 1444년(세종 26) 문과에 합격했을 때 최항은 대제학을 맡고 있었고, 1467년(세조 13) 서거정이 대제학에 올랐을 때 최항이 영의정으로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최항이 서거정의 든든한 후견인의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서거정은 자신의 능력과 더불어 최고의 학문과 문벌을 자랑하던 권근ㆍ이계전ㆍ최항 등과 혈연ㆍ학연으로 연결되면서 최고의 문장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서거정은 이들에게 도움을 받은 정황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나의 외조 권근은 도덕과 문장이 백세의 모범이 될 만하여 일찍이 예문응교(藝文應敎)를 역임하고 마침내 문형(文衡)을 맡았으며, 그의 아들 권제(權踶)는 선업을 잘 이었고, 권제는 이계전에게 전하였으니, 이계전은 바로 권근의 외손이요, 그가 다시 최항(崔恒)에게 전하였으니, 그는 또한 권근의 외손서(外孫壻)인 것이다. 내가 무능한 사람으로 잠시 빈자리를 채워서 영성을 이었는데, 비록 불초하지만 역시 권근의 외손이다. 한집안에서 팔십에서 구십 년 동안에 아버지를 비롯하여 아들 그리고 외손 세 사람이 서로 이어 예문응교가 되었다가 끝내 문병(文柄)을 손에 쥐고 일품의 관직에 오른 경우는 천고에 드문 일이니, 이는 실로 우리 외조의 적선(積善)으로 인한 경복(慶福)과 시례(詩禮)를 가르치신 은택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 서거정, [사가집] 권 31, 시류(詩類) <贈蔡應教壽>

 

위의 기록은 서거정의 집안이 문(文)으로 크게 번성하여 왔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세조와의 인연과 득의의 시절

서거정은 세조(世祖, 재위: 1455~1468)가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있던 시절부터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1452년(문종 2) 겨울, 그는 사은사(謝恩使) 수양대군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중국에 갔다. 이때 경사(京師: 명나라의 서울)에 관복과 고명(誥命)을 하사한 것에 대해 사은하러 가는 길이었다. 비록 서거정은 가던 도중 모친상을 당하여 되돌아왔지만, 수양대군의 큰 신뢰를 얻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수양대군은 서거정의 노모(老母)가 위독하다는 편지를 받고 비밀에 부쳐 알지 못하게 했는데, 서거정이 노모에 대한 불길한 꿈을 꾸고 몹시 슬퍼하였다고 한다. 이에 세조는 감탄하며 “서거정의 효성은 하늘을 감동시킬 만하다.”고 이야기했고, 세조가 즉위한 이후에도 당시의 꿈을 일컬으며 “내가 그대를 등용한 것은 비단 재주 때문만은 아니다.”하며 그를 가상하게 여겼다.

 

이러한 인연에서였는지 1455년(세조 1) 6월에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이후, 당시 사명(辭命: 왕명을 전달하는 외교문서)의 대부분을 서거정에게 찬술하게 하였다. 그리고 세조는 서거정에게 공조참의ㆍ예조참의ㆍ이조참의ㆍ형조참판ㆍ예조참판ㆍ형조판서ㆍ성균관지사ㆍ예문관대제학 등 주요 관직을 연이어 제수하였다. 서거정은 이처럼 세조의 신임 아래에서 관직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서거정의 스승 이계전이 세조의 왕위찬탈 때 협력한 공으로 공신록(功臣錄)에 이름을 올린 사실과 서거정이 함께 교유하며 여가를 보냈던 인물들이 권람ㆍ한명회ㆍ신숙주와 같은 권신(權臣)들이었다는 점도 이러한 상황을 잘 말해준다. 특히 한명회와는 어릴 때부터 함께 유학(遊學)했고 그 교분이 매우 가까웠다고 전한다2).

 

서거정이 조선초기에 수행한 역할은 대단했다. 세종에서 성종대까지 6명의 왕 아래에서 문병(文柄)을 장악했던 학자로서, 그의 학풍과 사상은 15세기 관학(官學)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훈신(勳臣)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는 문장에 일가를 이루고, 특히 대규모 편찬 사업의 기획과 실무에 능하였다. 서거정이 국가적 요구에 의해 편찬한 것으로는 [경국대전(經國大典)]ㆍ[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ㆍ[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ㆍ[동문선(東文選)]ㆍ[동국통감(東國通鑑)]ㆍ[오행총괄(五行摠括)] 등이 대표적인데, 법전ㆍ역사ㆍ지리ㆍ문학 등의 분야에 걸쳐서 총 9종으로 그 분량은 수백 권에 달한다. 개인 저술로는 [동인시화(東人詩話)]ㆍ[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ㆍ[필원잡기(筆苑雜記)]ㆍ[사가집(四佳集)] 등 많은 저작이 있다.

 

특히 서거정이 각종 서책의 서문을 작성한 것이 눈에 띈다. [사가집] 권4~권6까지 실려 있는 서문만도 70편 이상이다. 국가에서 편찬한 책들의 서문을 도맡아 썼다는 데서 그만큼 그에게 그 편찬물에 대한 책임감이 부여되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국가 기록물의 서문을 쓰는 자는 국가에서 그 책을 만든 의도를 명확하게 간파하고 있어야 했을 것이고, 서거정은 그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 ‘서문 전문가’로 발탁된 것으로 파악된다.

 

서거정은 [경국대전]의 서문에서 “지금부터 자자손손 이어서 훌륭한 군주가 나와 모두들 이 [경국대전]을 준수하며 어기지도 않고 잊지도 않는다면, 우리 국가의 문명(文明)의 정치가 어찌 오직 주나라보다 융성할 뿐이겠는가. 억년 만년 무궁한 왕업이 응당 더욱 장구하게 이어질 것이다3).”하며 조선 최초의 법전을 잘 따를 것을 피력하였다. 그리고 그는 역사서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삼국사절요]의 서문에서는 예로부터 천하와 국가를 다스린 자는 모두 사서(史書)를 남겼다고 하며, 군주의 어리석음과 명철함ㆍ국세의 강성함과 쇠약함ㆍ국운의 길고 짧음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국여지승람]의 서문에서는 우리나라가 단군이 처음 나라를 세우고, 기자(箕子)가 봉토를 받은 이래로 삼국ㆍ고려시대에 넓은 강역을 차지했음을 자랑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에서 서거정의 역사 전통과 영토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동문선]의 서문에서 서거정은 우리나라의 문장은 삼국시대에 시작하여 고려 때에 융성하였고, 조선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문장이라는 것은 ‘도를 꿰는 도구[貫道之器]’라고 표현하였다.4) 그가 문장을 중시하였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특히 당나라 한유(韓愈)의 문장을 본받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저술 곳곳에서 한유의 문장을 인용한 부분을 쉽게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본인 스스로도 “훌륭한 문장으로는 당(唐)나라의 한유(韓愈)ㆍ유종원(柳宗元)과 송나라의 구양수(歐陽脩)ㆍ소식(蘇軾) 만한 이가 없습니다5).”라고 하면서 한유를 칭송하였다. 또, 권별(權鼈)이 “서거정의 시는 한유ㆍ육방옹(陸放翁)의 체를 전적으로 모방하였으며, 손만 쓰면 시가 되어 아름답고 화려하여 적수가 없었다6).”라고 평가한 부분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긍정과 부정이 교차하는 평가

서거정은 1488년(성종 19) 향년 69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이때 ‘문충(文忠)’의 시호를 받았다. 서거정은 이듬해 3월에 광주(廣州) 서쪽 방이동(芳桋洞)에 묻혔고, 후에 대구 향현사(鄕賢祠-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서거정이 조선 건국 초기에 담당했던 역할은 실로 중요했다. 그는 꾸준히 고위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국가의 전책(典冊)과 사명(詞命) 등이 모두 문형(文衡)을 맡았던 그의 손에서 나왔다. 그가 남긴 저술은 법전ㆍ역사ㆍ지리ㆍ문학 등 방대한 양이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며 영화로운 삶을 살았던 서거정에 대해서 실록의 졸기에서도 많은 부분을 할애하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특히 서거정이 다양한 학설에 능통하고 문장이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음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서거정은 온량간정(溫良簡正: 온화하고 무던하며 간소하고 바름)하고 모든 글을 널리 보았고 겸하여 풍수(風水)와 성명(星命)의 학설에도 통하였으며, 석씨의 글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문장을 함에 있어서는 고인(古人)의 과구(科臼: 규범)에 빠지지 아니하고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어서, [사가집] 30권이 세상에 행한다. [동국통감]ㆍ[여지승람]ㆍ[역대연표]ㆍ[동인시화]ㆍ[태평한화]ㆍ[필원잡기]는 모두 그가 찬집(撰集)한 것이다. 정자를 중원(中園)에 짓고는 못을 파고 연(蓮)을 심어서 ‘정정정(亭亭亭)’이라고 이름하고, 좌우에 도서를 쌓아 놓고 담박한 생활을 하였다. 서거정은 한때 사문(斯文)의 종장(宗匠)이 되었고, 문장을 함에 있어 시를 더욱 잘하여 저술에 뜻을 독실히 하여 늙을 때까지 게으르지 아니하였다.

- [성종실록] 1488년(성종 19) 12월 24일(계축)

그러나 실록의 졸기 뒷부분에는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기술되어 있다.

 

조정에서는 가장 선진(先進)인데, 명망이 자기보다 뒤에 있는 자가 종종 정승의 자리에 뛰어오르면, 서거정이 치우친 마음이 없지 아니하였다. 서거정에게 명하여 후생(後生)들과 더불어 같이 시문을 지어 올리게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서거정이 불평해 말하기를 “내가 비록 자격이 없을지라도 사문(斯文)의 맹주로 있은 지 30여 년인데, 입에 젖내 나는 소생(小生)과 더불어 재주 겨루기를 마음으로 달게 여기겠는가? 조정이 여기에 체통을 잃었다.”하였다. 서거정은 그릇이 좁아서 사람을 용납하는 양(量)이 없고, 또 일찍이 후생을 장려해 기른 것이 없으니, 세상에서 이로써 작게 여겼다.

- [성종실록] 1488년(성종 19) 12월 24일(계축)

 

[성종실록]을 편찬한 사관(史官)들은 서거정의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고 있다. 그가 생전에 혁혁한 공을 이루었지만, 속이 좁고 후진 양성에 적극적이지 못했다는 비판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의 일부는 수용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훈구파가 점차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16세기 사림파의 시대가 열리는 상황도 자리하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서거정은 훈구파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사림파의 시각에서는 부정적인 요소가 많은 인물이었다. 그가 중심이 되어 편찬한 역사서ㆍ지리지 등이 사림파 인사의 참여하에 개찬되었던 현실도 조선초기 최고의 문장가 서거정의 입지를 좁혀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전기 서거정이 완성한 문장 능력은, 체제의 정비와 문화 발전에 든든한 자양분이 되었다.

 

주]

1[성종실록] 1488년(성종 19) 12월 24일.

2[연산군일기] 1501년(연산군 7) 9월 17일(임진).

3서거정, [사가집] 권 4, 序 <經國大典序>.

4서거정, [사가집] 권 4, 序 <東文選序>.

5[성종실록] 1475년(성종 6) 5월 7일(을묘).

6권별, [海東雜錄] 권 4, 本朝 徐居正.

 

[네이버 지식백과] 서거정 [徐居正] - 세종에서 성종대까지 문병(文柄)을 장악했던 학자 (인물한국사, 신병주, 장선환)

 

강희맹[姜希孟]

출생 - 사망 : 1424 ~ 1483

서거정과 쌍벽을 이룬 조선 전기의 문장가

“세종 때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는데 시와 문장에 깊이가 있고 자세하며, 온후하고 흥미가 진진하면서 매인 데가 없이 호탕하였다. 웅장 심오하고 우아(優雅) 건실함은 사마자장(司馬子長, 사마천)과 같고, 넓고 크고 뛰어나기는 한퇴지(韓退之, 한유)와 같으며, 간결하고 예스러우면서 정밀하기는 유유주(柳柳州, 유종원)와 같았고, 빼어나고 자유분방하기로는 여릉(盧陵)의 문충공(文忠公, 구양수)과 같아서 당시 선비들의 추앙을 받았다.1)”

 

중국의 명문장가 사마천ㆍ한유ㆍ유종원ㆍ구양수에 비유되었던 강희맹(姜希孟, 1424~1483). 그는 당시에 문병(文柄)을 장악했던 서거정(徐居正, 1420~1488)과 절친한 사이였으며, 경사와 전고(典故)에 통달한 조선 초기의 뛰어난 문장가였다. 동시에 강희맹은 노련한 정치가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3차례 공신에 책봉되었고, 왕의 총애와 신임 속에서 원자(元子)를 보양(保養)하였으며, 여러 관직을 거쳐 궁극에는 종1품인 좌찬성에 이르렀다. 형 강희안(姜希顔, 1417~1464)과 함께 조선 전기 형제 문장가로도 명망이 높았다.

 

강희맹의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경순(景醇)이며, 호는 사숙재(私淑齋)이다. 할아버지는 강회백(姜淮伯), 아버지는 지돈녕부사 강석덕(姜碩德)이고, 어머니는 영의정 심온(沈溫, 1375?~1418)의 딸이다. 어머니가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의 동생이었으므로, 세종은 강희맹의 이모부가 되며, 세조와는 이종사촌이 된다. “왕비 친가의 인척이 되어 경복(慶福)을 양성하여 문벌이 빛나게 번성했다2)”는 평가는 이러한 왕실과의 인연에서 비롯된 것이다. 강희맹의 형은 시ㆍ글씨ㆍ그림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 불린 강희안이었으며, 형제는 조선 전기 문장과 정치, 예술적 자질에서 각별한 능력을 보였다.

 

강희맹은 특히 이종사촌이었던 세조대에 각별한 총애를 받으며 활발한 정치 활동을 하였다. 경연검토관ㆍ세자보덕(世子輔德)ㆍ공조참판ㆍ이조참판ㆍ예조판서ㆍ형조판서 등을 역임했던 것이다. 강희맹에 대한 세조의 신임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그의 졸기에서 세조가 그를 강명(剛明)함이 제일인 신하로 평가했던 것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3). 1466년(세조 12)에 있었던 발영시(拔英試, 현직 중신과 문무백관을 대상으로 임시로 실시한 과거)에서도 세조의 각별한 총애가 드러났다. 5월 8일에 이미 시험을 마치고 김수온을 장원으로 하여 34인에게 상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참가하지 못한 강희맹을 위해 다음날 다시 시험을 실시했던 것이다. 세조는 강희맹이 그 시험에 복제(服制) 때문에 참여하지 못해 매우 서운하고 유감스럽게 여긴다는 이야기를 듣고, 문신 1백여 인을 불러 다시 시험을 출제하였다4). 추가 시험으로 강희맹 등 6인을 더 선발했다.

 

세조에 대한 강희맹의 충성도 컸다. 강희맹은 세조가 말년에 병환으로 눕게 되자, 날마다 궁에 출입하여 시중을 들었다5). 이에 세조는 크게 감동하여 병의 차도가 있은 후에 더욱 총애하여 여러 번 물품을 내렸고, 형조판서를 특별히 제수하였다6). 강희맹의 극진한 정성은 가족이 병이 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강희맹은 학문하는 여가에 의술을 익혀서 부모와 형이 아플 때 손수 약을 지어 받들었다고 전한다7).

 

세조에 이어 조카인 예종이 즉위한 이후에도 강희맹에 대한 신뢰는 변치 않았다. 강희맹은 1468년 남이(南怡, 1441~1468)의 옥사를 다스리는 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익대공신(翊戴功臣)의 호를 처음에 받지 못하였다. 그러자 예종에게 글을 올려 스스로 그 공을 열거하였고, 예종은 익대공신 3등에 오르게 하여 진산군(晉山君)에 봉하였다.

 

성종이 즉위한 후에는 성종을 잘 보필하고 정치를 잘해주었다는 이유로 강희맹에게 좌리공신(佐理功臣)의 칭호가 내려졌으며. 얼마 안 되어 병조판서ㆍ이조판서 등에 임명되었다. 세조, 예종, 성종 3대를 연이어서 왕들의 신임을 받자, 강희맹을 꺼려서 익명서를 지어 강희맹을 비판하는 자가 나타났다. 이에 성종은 친히 어서(御書)로 “나는 경(강희맹)을 의심하지 않고 경은 나의 말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각별한 신뢰를 다시금 내비쳤다. 나아가 판돈녕, 좌찬성에 이르기까지 높은 관직을 제수해주었다.

 

강희맹의 집에서 자란 어린 연산군

성종은 강희맹에게 원자(元子) 시절의 연산군을 보호하는 중책을 맡기기도 했다. 1477년(성종 8) 3세인 원자가 병이 나자, 성종은 강희맹의 집에 원자를 보내 치료하게 하였다. 이때, 강희맹의 부인 순흥 안씨가 큰 역할을 했다. 그녀는 원자에게 춥고 따뜻함을 잘 조절해주고 젖을 알맞게 먹여 10일이 채 되기도 전에 건강을 되찾게 해주었다. 그녀가 원자를 보살필 때, 위기 속에서 지혜를 발휘하여 원자를 구했다는 일화가 적혀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원자가 잘못하여 실을 삼키는 바람에 목구멍이 막혀 매우 위급하였다. 여러 종자(從者)들은 너무 급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부짖기만 할 뿐이었다. 부인이 달려와서 보고, “어찌 물건 삼킨 어린이를 반듯이 눕혀 물건이 더욱 깊이 들어가게 하느냐.”하며 즉시 안아 일으키고 유모를 시켜 양편 귀밑을 껴잡게 하였다. 이어 부인이 손가락으로 실을 뽑아내니 기운이 통하여 소리를 내었다. 여러 종자들은 부인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려 감사하기를, “부인께서 우리들의 목숨을 살렸습니다. 어찌 다만 우리들을 살렸을뿐입니까. 나라의 근본이 부인 때문에 편안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 [연려실기술], 성종조 고사본말

 

위의 기록에 나오는 강희맹의 부인 안씨는 안숭효(安崇孝)의 딸로, 1442년(세종 24) 강희맹과 결혼했다. 그녀가 원자를 잘 길러주고 위기에서 구해준 까닭에 강희맹은 성종의 신임을 더욱 굳게 받을 수 있었다. 1478년(성종 9) 성종은 원자가 강희맹의 집에 있으므로 호위하는 군사들을 보내주었고, 원자가 준마(駿馬)를 보기 좋아하여 강희맹의 집으로 말 1필을 내려주기도 했다8). 1482년(성종 13)에도 원자가 강희맹의 집에 있었다는 기록9)으로 보아 원자가 강희맹의 집에 장기간 머물렀던 것으로 파악된다. 강희맹과 연산군과의 각별한 인연은 그의 문집인 [사숙재집(私淑齋集)]에 <연산사삼층(燕山辭三疊)>이 기록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연산군 역시 왕이 된 후 강희맹이 도움을 준 것을 기억했다. [연려실기술]에는 “그때 매양 정원의 소나무 밑에서 놀았는데 왕위에 오르고 나자 진시황이 소나무 다섯 그루에 대부의 벼슬을 준 것처럼 그 소나무에 벼슬을 주고 금띠를 둘러주고, 또 그 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는 말에서 내리게 하였는데 지금의 순청동(巡廳洞)이 바로 그 피마병문(避馬屛門)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

 

관중과 포숙, 강희맹과 서거정

중국의 고사에서 자신을 가장 잘 알아준 벗을 언급할 때 거론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의 관계이다.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 권 62의 <관안열전(管晏列傳)>을 보면 관중이 ‘나를 낳아준 것은 부모요, 나를 알아주는 자는 포숙이다.’라면서 포숙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표현한 기록이 보인다. 그런데 서거정이 강희맹의 비문을 써주면서 강희맹과 자신을 관중과 포숙과 비교한 것이 흥미롭다. 서거정은 비문의 말미에서 두 사람의 오랜 인연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아! 내가 차마 비명을 지을 수 있겠는가? 나와 공은 책을 끼고 교유하여 백수(白首)에까지 이르렀는데, 항상 말하기를, “나를 낳아 준 사람은 부모요, 나를 알아 준 사람은 공이다.”하였다. 벼슬길에 나아간 이래로 두 번 과거를 함께 보았고, 또 훈맹(勳盟)을 같이 한 데다가 혹은 관각(館閣)에서 동료로 지냈고, 혹은 경연의 자리에 함께 있었으며, 혹은 사국(史局)을 함께 맡았고, 혹은 책 편찬을 함께 하기도 하며 40년 동안 일찍이 하루도 서로 떨어진 적이 없었는데, 공명(功名)의 진취(進就)에 있어 혹 앞서기도 하고 혹 뒤서기도 하였지만, 역시 대략적으로 서로 동등했다.

 

서거정은 경연관, 사관, 편찬 사업 등 모든 분야에서 함께 호흡을 맞추었던 강희맹의 죽음을 누구보다 아쉬워했고, 강희맹과 자신의 우정을 관중과 포숙의 관계로 비유한 것이다. 서거정이 강희맹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서거정과 강희안의 친분 때문이었다. [연려실기술]에는 ‘서거정이 공(강희맹)을 강희안의 집에서 처음 보았는데, 이때 나이 겨우 15세였으나 재주가 노련ㆍ성숙하였었다. 거정이 일찍이 희안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그대의 자유(子由, 소동파의 아우인 소철)이다” 하니 희안은 “형이 자첨(子瞻, 소동파의 자)이 아닌데 아우가 어찌 자유(子由)가 되겠는가” 하고 서로 한바탕 웃었다.’는 기록이 있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도, ‘무오년(戊午年, 1438년)에 나 서거정이 공의 형 인재(仁齋, 강희안)와 함께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날마다 서로 찾아다니며 어울리다가 인재의 집에서 처음 공을 보게 되었다. 공은 나보다 4, 5세 어리어 그때 나이가 15세였는데, 재주는 이미 노련했다. …… 공은 진사시에 합격하여 나와 함께 다니며 공부하고 사귀었으니, 그 돈독하기가 얼굴로써가 아니라 마음으로였다.’고 하여, 서거정과 강희맹과의 각별한 관계를 언급한 내용이 보인다.

 

강희맹은 서거정과 함께 세조와 성종의 각별한 신임 속에서 편찬 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세조가 [경국대전]을 편찬하면서 6, 7명의 대신들에게 업무를 분장해서 의정할 것을 명하였는데, 강희맹은 서거정과 함께 선발되었다. 서거정은 ‘강희맹의 의론은 정밀하고 심오하며 환하고 원대하였으므로, 왕이 자주 불러 물어보면 아뢰는 대답이 뜻에 맞으니, 같은 반열에 있는 사람들이 감복하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1478년(성종 9) [동문선] 편찬, 1481년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에 있어서도 강희맹은 서거정과 더불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재기 발랄한 문장력을 발휘하다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문장가라 하면 흔히 신숙주, 서거정 등을 꼽지만 강희맹 역시 문장에서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연려실기술]에는 ‘공의 문장은 세상의 추앙을 받았으며, 고대의 전적(典籍)을 연구하여 고금의 사실을 널리 통달하였다. 의논함에 있어서는 재기(才氣)가 발랄하니 듣는 이가 싫증을 내지 아니하였다.’고 하여 강희맹의 문장에 특히 재기가 있음을 언급하였다. 성현(成俔, 1439~1504)은 수필집 [용재총화]에서 ‘진산(강희맹)의 시(詩)와 글은 법도에 맞고 우아(優雅)하며 타고난 기틀이 저절로 여러 사람들보다 숙성되어, 정제(精製)와 끊음에서 최고로 삼는다.’고 하여 강희맹의 문장에 대해 높은 점수를 주었다.

 

문장가로서 강희맹의 능력은 세조에서 성종대의 편찬 사업에서 특히 발휘되었다. 세조 때 [신찬국조보감(新撰國朝寶鑑)]과 [경국대전] 편찬을 비롯하여 사서삼경의 언해 사업에 참여하였고, 성종 때는 [동문선]ㆍ[동국여지승람]ㆍ[국조오례의]ㆍ[국조오례의서례] 등의 편찬에 참여하면서 박학한 지식과 문장력을 최대한 발휘하였다.

 

강희맹은 국가에서 주도한 관찬서의 편찬 사업 뿐만 아니라, 개인 저작물을 통하여 자신의 취향을 문장으로 표현했다. 강희맹은 관료로서의 감각을 지닌 문인이면서도 농촌 사회에 전승되고 있는 민요와 설화에 깊은 관심을 가져 관인문학(官人文學)의 고답적인 자세를 스스로 없앴다. 시골에서 한가롭게 살면서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촌담해이(村談解灑)]에서는 이러한 면모가 잘 나타난다. [촌담해이]는 짤막한 줄거리로 구성된 작품인데, 과부ㆍ중ㆍ호색한ㆍ머슴들의 애정 행각을 담은 내용이 대부분이다. [용재총화]와 더불어 조선 전기 골계문학의 흐름을 볼 수 있는 저술이다.

 

강희맹은 실용서에도 관심을 가졌다. 1486년에 편찬된 농서 [금양잡록(衿陽雜錄)]은 강희맹이 말년에 경기도의 금양현(현재의 시흥)에 퇴경(退耕)하면서 그곳의 농사 전반을 기록한 책이다. 후대의 학자 권별(權鼈, 1589~1671)이 쓴 [해동잡록]에는 ‘[금양잡록] 한 편을 보면 모든 곡식의 품질과 모양의 구별, 씨 뿌리기에 적당한 시기, 작업의 순서 등이 모두 사리에 들어맞는다. <제풍변(諸風辨)>, <농담농구(農談農謳)> 등의 편은 분별하여 기술함이 매우 자세하여 농가의 수고하는 모습을 빠짐없이 기록하였다10).’고 하여, [금양잡록]에 대해 후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외에 강희맹이 쓴 여러 이야기들에서는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훈구파 관료이자 문장가이면서도, 일상의 삶에 소소한 관심을 가졌던 저자의 캐릭터를 찾아볼 수 있다. [해동잡록]에 기록된 몇 가지 이야기를 소개해보기로 한다.

 

가. 강진산(姜晉山, 강희맹)이 <노기편(老妓篇)>을 지었는데, 그 소서(小序)에 이르기를, “같이 간 한 재상이 한 기생을 사랑하였는데 신축년에 다시 사신으로 가서 보니, 그 몇 명의 기생들이 더러는 기적(妓籍)에서 빠져나갔고, 혹은 행수기생(行首妓生)이 되었는데, 옛날의 아리따운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무자년은 14년이나 지난 것이다. 늙어 추해짐이 오히려 이러하니, 그 아리따운 얼굴이란 잠깐 동안이요 오래가지는 못하는 것이 아니냐.” 하고, 이에 시를 지어 탄식하였다.

 

나. 오설(五說)을 지어 아들을 훈계하였는데, 1, 도자(盜子, 도둑의 아들) 2, 담사(啗蛇, 뱀을 잡아먹음) 3, 등산(登山), 4, 삼치(三雉), 5, 요통(溺桶)이다. 그리고 말하기를, “나는 옛사람의 찌꺼기[학문]를 늘어놓았으나 너는 그 정수(精髓)를 빨아먹고, 나는 옛사람의 가죽과 털[거죽]을 말했으나 너는 그 진수(眞髓)를 캐도록 하라.” 하였다. …… 세 번째는 등산(登山)이다. 노(魯)나라 백성에 세 아들이 있었는데, 갑은 침착하고 성실하나 절름발이였고, 을은 기이한 것을 좋아하고 온전하였으며, 병은 경솔하나 날쌔었다. 하루는 서로 약속하고 태산(太山) 일관봉(日觀峯)에 오르기로 하였는데, 을은 산 밑에 있었고 병은 산 중턱에 있었는데 해는 벌써 어두컴컴하였다. 갑은 쉬지 않고 천천히 걸어 바로 산꼭대기에 이르렀다.

 

위의 ‘가’ 이야기는 외모에 대한 경계를 보여주고 있으며, ‘나’ 이야기는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를 연상케 하는 것으로, 성실하게 꾸준히 정진해야 목표에 이를 수 있음을 자식들에게 훈계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훈구파로 살아간 삶, 사림파의 비판을 받다

이처럼 세조에서 성종대에 걸쳐 문장력과 관료적 자질로 한 시대를 풍미했음에도 불구하고 강희맹에 대한 사관의 평가는 그리 긍정적이지 못하였다. “사람됨이 공손ㆍ근엄하고 신중ㆍ치밀하여 벼슬을 맡고 직책에 임함에 행동이 사의(事宜)에 합치하였다. …… 예제(禮制)를 참정(參定)할 때에 문장이 정밀하고 깊이가 있으며 속되지 않았는데, 종이를 잡기가 무섭게 곧 (문장이) 이루어졌다.”고 하여 일견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듯이 보였지만, 후반부에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주류를 이룬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강희맹은 책을 많이 보고 기억을 잘하며 문장이 우아하고 정밀하여 한때의 동년배들이 그보다 앞서는 자가 없었다. 다만 평생 임금의 뜻에 영합하여 은총을 희구하였다. 세조가 금강산에 거둥하였을 때, 이상한 새가 있어 하늘가를 빙빙 돌며 춤추었다. 세조가 부처의 힘이 신묘하게 응한 것이라 하였는데, 강희맹이 서울에서 그 말을 듣고 드디어 <청학송(靑鶴頌)>을 지어 바치었다. 세조가 일찍이 술이 거나하여 좌우에게 희롱하여 말하기를, ‘나는 중토(中土)를 횡행(橫行)하고 싶다’ 하였는데, 강희맹은 이를 사실로 여기고 이에 한 권의 책을 지어 바쳤다. 이름하여 [국세편(國勢篇)]이라 하였는데, 아첨하는 말이 많이 있었다. …… 또 그 공을 스스로 열거하여 공신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이조판서가 되어서는 비방을 받음이 또한 많았다. 비록 사조(詞藻)의 아름다움이 있기는 하나, 무엇을 취하랴?” 하였다.

- [성종실록] 1483년(성종 14) 2월 18일

 

평생 왕의 뜻에 영합한 점이나, 공신 책봉에서 스스로 공을 논한 것에 대해 사관은 지극히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왕의 뜻에 맞추는 측면은 관료가 지니는 기본적인 속성임을 고려하면, 이러한 평가는 [성종실록]을 편찬한 사관이 사림파의 입장에 있었던 것과도 관련이 크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그와 비슷한 정치적ㆍ학문적 행보를 보인 서거정이 긍정과 부정이 교차하는 평가를 받는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실제 강희맹은 송나라 붕당의 폐해를 언급하면서 신진 세력인 사림파의 견제에도 앞장을 섰다. “송나라 붕당의 화는 구래공(寇萊公, 구준(寇準))이 인물을 지나치게 공격하는 데서 기인한 것인데, 그 흐름이 가져온 폐단은 비록 정주(程朱)라도 붕당을 면치 못했던 것이다. 요즈음에 보니 젊고 패기 있는 신진들이 날마다 인신공격을 일삼으니 그 폐단이 장차 어떠하겠는가.” 하였다는 [필원잡기]의 기록은 이러한 입장을 잘 보여준다.

[네이버 지식백과] 강희맹 [姜希孟] - 서거정과 쌍벽을 이룬 조선 전기의 문장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