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벌전투
黃山伐戰鬪
황산벌은 지금의 충청남도 연산지방이다. 7세기 중반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압력이 가중되자 당과의 외교관계를 강화했고, 당 역시 여러 차례의 고구려원정에서 실패하자 백제를 선제공격하기로 하여 당과 신라 사이에 군사동맹이 체결되었다.
그리하여 660년 3월 당 고종은 소정방(蘇定方)을 시켜 1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산둥[山東] 반도를 출발하여 백제를 공격하게 했다. 이에 호응하여 신라 무열왕은 그해 5월에 김유신 등의 장군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경주를 출발하여 6월 18일 남천정(지금의 이천)에 머물렀다. 그리고 태자 법민을 보내 병선 100여 척을 거느리고 덕물도(지금의 덕적도)에 가서 소정방을 맞이하게 했다. 이때 당군과 신라군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에서 합세하여 공격할 계획을 정했다.
태자가 돌아오자 무열왕은 대장군 김유신과 장군 품일·흠춘 등과 함께 정예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사비성(지금의 부여)으로 향하게 했다. 당시 백제 조정에서는 방비책을 강구하던 중 당군이 백강(지금의 금강)에 상륙하지 못하게 하고 신라군이 탄현(지금의 충남 대덕)을 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흥수의 견해를 묵살했다. 그리하여 백제군은 백강에 상륙한 당군에게 대패했고, 신라군은 이미 탄현을 넘어 황산벌로 진군했다.
의자왕은 계백에게 5,000명의 결사대를 주어 이를 막게 했다. 계백은 가족을 죽인 뒤 비장한 각오로 출전하여 황산벌에 먼저 도착하고 3군데에 진영을 설치했다. 신라군은 군사를 3갈래로 나누어 4번을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고 군사들은 지쳤다. 이때 신라의 장군인 흠춘이 아들 반굴을 적진으로 보내 힘껏 싸우다 죽게 했다. 그러자 장군 품일 역시 아들 관창을 내보내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게 하여 결국 죽게 했다. 반굴·관창의 용감한 모습에 감격한 신라군은 죽음을 각오하고 진격하여 크게 승리했다. 백제군은 중과부적으로 대패하여 계백이 전사했고 좌평·충상·상영 등 20여 명이 사로잡혔다.
그 전투에서 신라군이 당군과 합세하기로 약속한 기일에 늦었다고 하여 당군과 신라군 사이에 마찰이 생겼다.[출처: 다음백과]
황산벌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신양리지도보기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강종원
[정의]
660년 백제와 신라가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논산시 연산면 신양리 일대의 벌판.
[개설]
황산벌은 660년 백제와 신라가 대규모 전투를 벌였던 당시 백제의 행정구역이었던 황등야산군의 벌판으로, 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신양리 일대의 벌판을 말한다.
936년에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후백제의 신검(神劒)과 일리천(一利川)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도망가는 적군을 추격하여 끝내 이곳에서 후백제의 항복을 받았다고 전한다. 후백제 멸망 후 이를 기념하고자 태조는 황산을 천호산(天護山)이라 개칭하고 개태사(開泰寺)를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명칭유래]
황산이라는 지명은 『삼국사기(三國史記)』 태종무렬왕조에는 ‘황산지원(黃山之原)’,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충청도 연산현 산천조에는 ‘황산지야(黃山之野)’라는 내용에서 확인된다. 따라서 ‘황산’이라는 지명은 삼국시대부터 이미 있었으며,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논산시 연산면 신량리에 황산리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황산벌은 신양리 일대의 분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장소: 논산시 연산면 황령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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