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경표

대동여지도와 김정호

꼴통 도요새 2015. 11. 26.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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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란?

1866년 고산자 김정호가 제작한 22첩으로 된 한국의 목판지도이다.

조선시대 최대, 최고의 과학적 지도로 평가되는 이 지도는 70여장의 목판에 새겨 22개 첩으로 만들어 펴냈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그의 집무실에서 전국의 각각 축척이 다른 군현읍 지도를 가지고 축척을 일치시켜 전국 지도를 완성하고 평생에 걸쳐 목판으로 만드는 작업을 한 지도제작자이다 당시 개인이 지도를 만드는 것을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라는 인식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김정호는 누구인가?

10년 동안 팔도강산을 세 번 백두산을 여덟 번 답사하여 대동여지도를 완성하였다는 소가 자다가도 일어나 웃을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얼마 전 만하더라도 초등학교 교과서에 단골로 등장하였는데, 이는 일제시대 때 날조된 내용임을 조금만 생각해보면 금방 그 답이 나옵니다 지금과 같은 측량기구도 없고 교통수단도 없는데 무슨 방법으로 전국방방곡곡을 측량하고 기록하여 지도를 만들었다는 말입니까? 이는 일제가 김정호의 위대함을 비현실적으로 강조하여 그것도 몰라보는 조선왕조의 우매함을 입증하려 했고 정의롭고 개화된 일본이 이를 알아보고 이 지도를 이용해 청일전쟁 노일전쟁 토지조사 등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하며 그 가치를 아는 문화국가인 일본이 조선을 다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우민정치를 하기 위한 조작극이라는 것을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김정호는 백두산을 오른적도 없고 전국을 답사한 적도 없습니다오로지 그의 작업실에서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군현지도를 입수하여 그 축적을 바꾸고 내용을 통일시키고 그것을 과학적으로 재구성하였습니다

김정호초인적인 산악인도 아니요, 신비한 측량기사도 아닌 위대한 지도제작자 편집자였던 것입니다 참고적으로 1997년부터 초등학교 교과서에 있는 김정호의 지도제작 과정에서 답사설이 사라지고 오로지 애국심과 애민정신으로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고 수정되었음이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입니다

 

태백산맥은 없다. 우리나라의 산줄기 백두대간: 조선 문종 때인 1451년에 완성된 고려사에는 9C 말 신라의 승려이자 풍수지리가인 도선의 저서 룡기와 관련한 글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우리나라가 백두에서 시작하여 지리에서 마쳤으니 그 형세가 물을 뿌리로 하고 나무를 줄기로 한 땅인지라...”라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이는 우리 선조들이 백두대간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최초의 기록으로 우리나라의 산줄기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끝을 맺는다는 관념의 반영이기도 하다. 그 후, 백두대간은 이익의 성호사설이나 신경준 이 편찬했다고 알려진 ‘산경표’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를 동서로 가르며 우리나라 모든 산과 산줄기들의 근간이 되고 모든 강들의 시원(始原)이 되는 백두대간. 우리 선조들이 기대어 살았고 우리 민족의 애환이 녹아 있는 산줄기들의 아버지 격인 백두대간. "산맥(山脈)이라는 개념의 등장" 제국주의 열강들이 호시탐탐 조선땅을 노리던 조선 말기, 일제는 1876년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선땅의 지질조사를 끈질기게 요구한다. 1897년 화폐제도를 금본위제도로 바꾼 일제는 조선의 금을 캐가기 위하여 광분하던 1900년 겨울 고토분지로(小騰文次郞)라는 일본 지질학자를 조선으로 파견한다. 금을 비롯한 조선의 지하자원 수탈을 목적으로 들어와 교통 수단도 변변치 않던 시절 고토는 조랑말 4마리와 6명의 대원 등 빈약한 규모로 은밀하게 지질조사를 하게 된다. 그 후, 고토는 1902년 겨울 재입국하여 같은 방식으로 조사를 실시한 다음 총 266일이 걸린 두 차례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조선산악론(An Orography Sketch of Korea) 및 지질구조도라는 논문을 동경제국대학 논문집에 발표하게 되는데 이때가 1903년이다. 즉 고토는 조선땅 동서 1,000리, 남북 3,000리에 대한 지리 및 지질 검토를 단 266일만에 마무리하였고(1903년) 그 후 전도와 산악론, 지리지 등이 연속적으로 발간되는 데 단 2년이라는 시간 밖에 소요되지 않았으며(1905년) 후술하는 바와 같이 대한제국 학생용 교과서에 오르는 데에도 단 5년 밖에 소요되지 않았던 것(1908년)이다. 고토는 이 논문에 있는 지질구조도에 우리나라의 전통 산줄기 개념인 백두대간을 위시하여 1정간 13정맥 등 15개의 산줄기를 36개로 분해하여 각 산맥에 임의로 이름을 부여하면서, 이 중 우리나라 산줄기의 근간을 이루는 백두대간을 마천령산맥, 함경산맥, 태백산맥, 소백산맥 등 4개의 산맥으로 토막을 내었다. "고토분지로의 "백두산을 없애자." 특기할 만한 것은 민족의 영산이며 사상의 지주인 백두산위 지도에 표기조차 되지 않았음은 물론 다른 산들과는 달리 산맥 이름에도 백두라는 단어를 올리지도 못하고 한낱 고개에 불과한 천령에 그 이름까지 빼앗긴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여기에 더하여 고토는 백두산을 철천지 원수로 여겼는지 자신의 지질구조도에서 황해도나 전라남도, 경상남도는 바둑판처럼 지질구조선을 산맥이라는 이름으로 그어놓은 반면 백두산 부근은 허허벌판으로 놔뒀으며 마천령산맥의 지질구조선은 아예 백두산에 와 닿지도 않는다. 백두산에 대해서 이상하리만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던 일본은 백두산의 최고봉인 將軍峰을 兵使峰으로 격하시켜 부르다가 1909년에는 간도협약으로 백두산을 중국에 넘기 버리더니 그 이후에는 다시 大正峰이라고 자신들의 왕 이름을 따서 부르는 등 만행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한편 고토가 논문을 발표한 이듬해인 1904년 정치지리학자인야쓰쇼에이(矢津昌永)는 바둑판 같았던 고토의 산맥도를 한국지리라는 책을 통하여 어느 정도 정리를 하였으나, 여전히 소백산맥은 부채살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1905년 대한제국이 통감부 체제로 들어가면서 1906년 실업실찬지리에 이어 1908년 고등소학대한지지라는 지리 교과서를 편찬할 때 비로소 오늘날의 지도와 유사한 산맥도가 실리게 된다. 고토의 지질구조도 야쓰쇼에이의 한국 지리 실업실찬지리 상황이 이렇게 급박하게 전개될 때 1906년 정연호는 최신고등대한지지라는 교재에 우리의 산줄기를 있는 그대로 싣기는 하였지만 통감부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었으며, 1910년 육당 최남선에 의해 우리의 고전을 보존하기 위하여 설립된 조선광문회에서 1913년 편찬한 산경표에 실린 우리 산줄기 이름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지질구조선 = 산맥" 이로써 산과 강을 기준으로 하여 그려진 실제 지형과 일치하는 자연스러운 지리개념인 백두대간 등 우리의 산줄기는 없어지게 되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땅속의 지질구조선을 근거로 하여 중간에 강에 의하여 끊기기도 하며 실제 지형과 일치하지도 않는 인위적이고 가공된 지질학적 선(線)인 산맥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는 일제의 교묘한 음모가 지리학에 앞서 지질학을 들여보냄으로써 자원 침탈의선두에 서게 되었고 결국 이 입양아가 적자를 몰아낸 꼴이 되었으며 지질학이 우리 전통 지리학을 밀어내면서 지리학의 뼈대로 자리잡게 되는 결과를 빚게 되었고 마침내 우리나라 국토인식의 왜곡, 문화전통의 왜곡, 역사의 왜곡 등 총체적 민족자존심의 왜곡 내지는 상실이 시작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백두대간 등 우리나라의 전통 산줄기 개념은 잊혀지게 되었고, 우리는 고토의 산맥체계가 산맥방향을 잘못 잡고 산맥의 성인(成因)이 과학성이 결여되었음에도 를 무비판적으로 학교 교육을 통하여 인문지리와는 무관한 지질학적 개념인 산맥을 전수 받았으며 우리나라의 지리 학자들 역시 산경표의 존재도 모르는 채 아무런 문제 의식 없이 그저 고토가 교육한 내용대로 땅속의 지질구조선을 산맥이라는 이름으로 교과서에 올리고 그것들을 가르쳤던 것이다. "산경표(山經表)의 재등장"그러던 것이 1980년 이우형이라는 지도쟁이에 의해 산경표가 우연히 발견된 이래 우리의 산줄기는 주로 지리학자 이외의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았으며 특히 노웅희, 조석필, 박성태 같은 이들은 책자를 통해 우리 산줄기 되살리기의 불씨를 지폈고 전국 지리교사들의 모임을 중심으로 우리 산줄기 이름 되찾기 운동도 전개 되었으며 2004년에는 국토연구원 김영표 부원장 등 연구원들에 의하여 GSI기법을 사용한 새산맥도가 발표되기도 하는 한편 백두대간보호에관한법률이 공포되어 2005년부터 시행됨으로써 어느덧 백두대간은 공식용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국토연구원에서는 고토의 조랑말 대신 인공위성을 사용했고, 거기에 컴퓨터로 계산된 각종 수치와 정보를 덧보탰으며 한반도를 가로 세로 각각 30m 짜리 정사각형으로 나눈 다음에 이 정사각형의 한 가운데의 높이를 쟀다. 이렇게 실측된 수치에 위성 영상을 겹쳐 넣고, 지질학적인 분포도를 또 겹쳐 넣었고 여기에 기존에 알려져 있는 해발 200m이상 산봉우리와 고개 5103개의 좌표를 기록했다. 고토가 조랑말을 타고 다니면서 288일 동안 해안이나 강가 혹은 고개의 절개지 등을 다니면서 주운 돌로 기록한 논문보다 훨씬 정교하고 과학적이지 않은가? 이에 앞서 북한은 1996. 1. "우리나라의 산맥 체계에 일제잔재가 많아 남아 있어서…"라고 하면서 산맥체계와 이름을 재정비하는 작업에 착수하여 백두대간을 백두대산줄기라는 이름으로 복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질구조선을 산맥이라고 하며 제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우리나라 지리학자들은 요지부동이었고 이들의 도움으로 태백산맥은 여전히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하지만 산맥이 옳다면 그게 일본인이 만들었건 미국인이 만들었건 그게 문제 될 리는 없을 것이다. 이러는 사이 산맥은 아직도 지리교과서의 한 쪽을 차지하고 있건만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이미 백산맥 종주라는 단어는 없어져 버렸고 이 자리를 백두대간 종주라는 슬로건으로 벌써 30,000명 넘는 이들이 종주를 마쳤고 지금 이 순간에도 수 백 명의 산꾼들이 우리의 산줄기를 밟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 답사가 계속될 백두대간. 독일의 지리학자 훔볼트(humboldt)는 안데스 산지를 2만번 정도 오르내리면서 안데스 산지를 연구하였고, 페루 해류에 대해 연구를 하여 그 업적을 인정받아 페루해류를 훔볼트 해류라고도 하지 않은가. 우리나라의 지리학자들은 과연 백두대간을 걸어보기나 하였는가. 아니 그 백두대간이 그렇게 싫다태백산맥이나 차령산맥 혹은 노령산맥이라도 걸어보기나 했는가. 걸어 보았으면 그 산맥의 실체를 직접 확인해 보았는가. 지리 과목이라는 게 책상머리에 가만히 앉아서 연구하는 과목은 아니지 않는가. "지질구조선(地質構造線)의 다른 이름 山脈" 산맥의 종주국이라 할 일본마저도 포기한 개념인 지질구조선을 근간으로 한 산맥 개념. 왜 지구과학 혹은 대학에서나 배워야 할 지질학 개념인 산맥을 굳이 생성 원인 운운하며 지질구조선을 들먹이면서 중고등학교는 물론 초등학교에서까지 지리나 사회시간에 배워야만 하는 걸까. 산의 연속인 산(山)이 하나의 혈관(脈)으로 이어져 있는 참 의미의 山脈이 아니고 강에 의하여 몇 번이고 단절되었어도 여전히 산맥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하는 산맥. "일제의 잔재인 태백산맥" 아직도 태백산맥이 백두대간의 자리를 꿰차고 눌러 앉아 있는 이유는 혹시 고토가 가르쳐 준 우리나라가 토끼 모양이거나 노인이 중국을 향해 절을 하고 있는 형상(사대주의와 지정학적 운명론)이라는 말에서 비롯된 "태백산맥이 우리나라의 등뼈인 척량산맥(脊梁山脈)"이라는 말과 "태백산맥이 우리나라를 동서로 가르고 있다."허무맹랑한 일제의 가르침을 아직도 신봉하고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나라의 산맥이라는 개념은 에베레스트나 록키 혹은 안데스 같은 산맥의 개념과는 전혀 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 그런 산체(山體)와 같은 산맥을 우리나라의 작은 산줄기와 비교하면서 가르치는 것은 무언가 은폐하고 싶어하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영역에서는 일제의 잔재들을 많이 청산하였지만 아직도 태백산맥 등 산맥들이 백두대간 등 우리 산줄기들을 대신하여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이유는 고토의 이론이 옳아서가 아니라 른 대안을 정립해 보겠다는 우리의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의지가 부족해서는 아닐까. 결론 우리가 산맥을 배우는 목적은 지질구조나 조산운동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산맥이 우리 생활에 어떻게 관련되어 있고 구체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기 위한 방편으로 배우는 것이다. 또한 산맥의 주향(走向), 그 시작과 끝, 그 산맥에 있는 산들을 궁금해 하고 그것들이 우리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을 대변해 주지 못하여 땅맥 혹은 지맥으로 불러야 온당할 우리나라의 산맥. 우리가 일제의 지배만 받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통일이 되었더라면 분명히 청산되었을 산맥. 일본이 아직도 제국주의의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이 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우리의 아이들에게는 고토가 남기고 간 산맥과 산맥 이름 대신 올바르고 제대로 된 우리의 산줄기들을 쉽게 가르쳐 줌으로써 민족적인 자긍심을 되살리고 백두대간과 거기서 분기한 각 산줄기 그리고 거기서 발원한 강들에 기대어 살아왔던 우리 선조들의 역사나 지리, 문화 등을 재조명하고 우리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되새겨야 할 시점이 아닐까.

산경도와 산맥도

“산경도”란

우리나라 전통산지 인식체계 즉 산자분수령에 의한 산줄기 흐름을 지도에 나타낸 것으로 백두대간 장백정간 한북정맥등 13개의 정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산줄기의 연속성에 의한 분수계를 따라 이루어졌다

“산맥도”란 하루 빨리 없애야할 지도로 일본학자들이 일제강점기에 만든 태백산맥 등을 지도에 나타낸 것으로 산줄기의 연속성이나 분수계와는 관계없이 땅속의 지질구조선을 따라 만들어졌다고 하나 그것도 허구라는 당위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고산자 김정호 이야기| 산경표?/新산경표?

noh871| 조회 11 0|추천 0| 2014.10.24. 14:07 http://cafe.daum.net/woori.sanjulgi/BzfS/29

고산자 김정호에 대한 이야기가 왜곡된데는 신경수 선배님이 쓰신 것처럼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왜곡된 내용입니다. 1993년 국민학교 5학년 2학기에 실린 내용입니다. '김정호는 억울한 죄명으로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그 때 나라를 다스리던 완고한 사람들이 '대동여지도'를 보고, 이 지도는 나라의 사정을 남에게 알려주기 위한 것이라고 오해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김정호의 피땀이 어린 지도의 목판본까지 몰수해 불사르고 말았으니,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외국과 거의 왕래를 하지 않았고,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기를 꺼리고 있었던 것이다. 김정호는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업적은 오늘날까지 찬란하게 빛나며 우리 가슴속에 살아있다. 아울러 그의 굽힐 줄 모르는 의지와 신념은 우리에게 영원한 가르침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해방후 50년이 넘도록 국정교과서에 실어 전 국민을 일제강점기 논리에 따라 인식하게하였습니다. 김정호는 옥에 갇힌 적도 없고, 대동여지도의 목판본이 불살라진 적도 없습니다. 대동여지도가 목판본으로 인쇄된 것에 대하여 당시 조정의 절대적인 지원이 있었습니다.병조판서를 지낸 신헌이 대동여지도 제작에 협조하였다는 글을 남겼고, 유재건은 사대부가 아닌 인재들의 행적을 기록한 이향견문록에 김정호가 죽은지 얼마되지 않아 김정호의 전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김정호는 자시이후 궁정출입이 자유로운 3정승과 같은 대우를 받아 궁정출입이 자유로웠습니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만 목판으로 만든것이 아니라 최한기의 도움으로 지구전후도라는 세계지도 목판본도 만들었습니다. 목판본이라는 것 자체가 수요가 많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전에 제작한 청구도가 필사본이므로 대중적인 수요를 충족시키기 어려웠다고 판단됩니다. 이는 조선후기 상업받달에 따라 유통이 급성장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대동여지도를 제작하기 위하여 김정호는 상당히 과학적으로 접근을 하였습니다. 우선 과거 우리나라 지도들을 모두 조사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대동여지도의 저본으로 여지도를 활용하였고, 최초의 근대지도로 평가받는 정상기의 동국여지도에서 사용된 축척을 발전시켜 축척을 적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부족한 부분은 직접 답사하기도 하여 정확성을 높였습니다. 여러 설이 있지만 백두산 지역도 1번은 갔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또한 기준점으로 현재 보신각옆에 표석으로 새겨져있는 지점(경도로 표현)을 정한후 나침반을 사용하여 방위와 거리를 표시하였습니다. 축척은 백리척을 사용한 정상기와 달리 십리척을 사용하였구요. 여기서 잠깐 확인하고 가실께요 대동여지도의 축척은? 1:160,000이라고 책들을 찾아보면 나옵니다. 하지만 대동여지도의 축척은 1:216,000으로 보는게 타당합니다. 왜냐하면 전자의 것은 10리를 4km로 환산했을 때 적용되고, 후자는 10리를 5.6km로 본 우리 선조들의 거리단위에 기초할 때의 축척입니다. 대동여지도의 우수성은 이와같은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제작한 지도로 매우 정확하며, 범례를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행정경계 표시방법, 거리, 가항하천과 비가항하천의 표시 등 목판에 새긴 내용의 풍부성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상 제가 아는 김정호 이야기입니다. 산줄기 이름을 짓는 몇가지 원칙 산경표에 산줄기 이름이 없는 산줄기 즉 기맥 지맥 분맥 단맥 이름은 후손들이 짓게끔 유보된 사항이지만 아직까지 정부나 공신력있는 기관에서 발표를 한적이 없으므로 나름대로의 원칙을 가지고 이름을 지어 답사를 하여야 혼동이 없을 것이다 물론 후일 공식적인 이름이 공표된다면 물론 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산경표란?

신라시대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백두대간을 그 기둥으로 삼고 거기에서 파생된 산줄기 강줄기 등을 있는 그대로 파악해서 여암 신경준이 1769년에 옛부터 발달해온 군현읍지도를 근간으로 하여 그 때까지 축적된 지리학적 지식과 정보를 학문적인 체계를 갖추어 족보형식으로 편찬한 우리나라의 지리정보 집합서이다 국가의 행정적인 지원(영조임금의 명을 받고 집필한 것임) 아래 공식적으로 편찬된 산경표의 산줄기 체계는 바다 건너 욕심많은 인간들이 이 땅을 유린하기 전까지는 국가의 공인된 개념으로 인식되었음이 분명하다

 

산줄기 이름을 짓는 몇가지 원칙

산경표에 산줄기 이름이 없는 산줄기 즉 기맥 지맥 분맥 단맥 이름은 후손들이 짓게끔 유보된 사항이지만 아직까지 정부나 공신력있는 기관에서 발표를 한적이 없으므로 나름대로의 원칙을 가지고 이름을 지어 답사를 하여야 혼동이 없을 것이다 물론 후일 공식적인 이름이 공표된다면 물론 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기본골격은 분기되는 모산줄기 이름을 그 산줄기의 족보를 밝히기 위해서 분기되는 순서대로 조합을 하고 그 맨 끝에 들어가는 이름을 아래와 같이 짓는다

첫째: 그 산줄기중 가장 인지도가 높은 산의 이름을 차용해 이름을 짓는다

둘째: 전부 인지도가 비슷비슷하면 제일 높은 산의 이름을 차용해 이름을 짓는다

셋째: 모산줄기가 분기봉 정상을 안거치고 달아날 경우 높이는 비록 낮지만 인지도가 비슷비슷하면 그 분기봉 이름을 차용해 이름을 짓는다

넷째: 그 산줄기중 산이름이 하나도 없는 경우 고개이름이나 능선상에 있는 마을이름이나 이름있는 바위 등 등이 있을 경우 그 이름을 차용해 이름을 짓는다

다섯째: 그 산줄기중 아무 이름도 없을 경우 그 산줄기 끝지점에 있는 마을이름을 차용해 이름을 짓는다

여섯째: 산이름이 있을지라도 그 지방을 더 중히 여겨 그 지방이름을 차용해 이름을 짓는 경우도 있다 단 군단위 이상이거나 인지도가 높은 지명이름을 차용하여 지어야 한다

일곱째: 산이름은 물론 마을이름이라던지 기타 등 등 아무것도 차용할 수 없는 산줄기는 할수 없이 분기봉 이름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데 그나마 분기되는 봉우리마저 이름이 없다면 그 산줄기중 가장 높은 봉우리 옆 마을 이름을 차용해 이름을 짓고 부기를 해서 이해를 돕는다

 

물론 위와 같은 원칙에 의거 이름을 지었다고 하여도 미리 100% 맞는 정보를 가진 것도 아닌만큼 실제 답사를 하며 합당한 이름으로 지금도 수정을 해나가고 있다는 것을 독자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출처: 산경표따르기 http://cafe.daum.net/woori.sanjul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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