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관한 자료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꼴통 도요새 2017. 9. 6.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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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2017. 8. 21. 드디어 출간.

 

 

차례

 

 

1부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중산리~천왕봉)

장감독이 백두대간에 드는 이유

도선국사

산맥은 우리나라 고유의 산줄기 인식 체계

지리산 천왕봉

남강의 발원지

산자분수령

천왕봉 정상석, 성모상

남강기맥, 덕천지맥

 

2부 백두대간

 

1. 지리산 구간(천왕봉~성삼재, 24.7km)

영신봉 고찰

박성태의 신산경표와 신백두대간

지리북부능선

TIP ‘지리산 7암자 순례산행

TIP 백두대간에 있는 세 개의 삼도봉

노고단에 얽힌 이야기

무넹기?

덕천지맥, 낙남정맥

 

2. 고남산 구간(성삼재~유치 삼거리, 28.6km)

성삼재 소고(小考)

나침반은 신라의 발명품?

삼각점의 의의

격변의 현장 구한말

여원재와 이성계 그리고 고토 분지로

Tip 마루금의 올바른 뜻은?

서시지맥

 

3. 백운산 구간(유치 삼거리~육십령, 38.6km)

고토 분지로가 도대체 누구야?

고토의 두 차례 지질조사

()자 이름을 가진 산

산경표에서 본 정맥

임천지맥, 금남호남정맥

 

4. 덕유산 구간(육십령~빼재, 29.2km)

훼손된 대간길

태극종주코스

TIP 기맥의 개념

기맥(岐脈) 보충

역사에 조예가 깊었던 고토 분지로

TIP 육당 최남선

남강기맥, 무주남대지맥

 

5. 대덕산 구간(빼재~우두령, 38.3km)

소사 마을의 고랭지 채소밭

초점산과 황강기맥

부항령

백수리산과 수리봉

삼도봉

산맥이 고토의 작품이라고?

산경표(山經表) 1

황강기맥, 초강지맥, 영동지맥

 

6. 황악산 구간(우두령~큰재, 40km)

백두대간 개황(槪況)

질매재와 우두령

삼성산은 어디 있나?

황악산의 뜻은?

여시굴은 여우굴?

괘방령 이야기

조선의 지도를 바꾼 고토

태백산맥은 이렇게 만들어진 거야!

mountain ranges 혹은 mountains가 산맥이 되다

준희 최남준

감천지맥

 

7. 백학산 구간(큰재~화령재, 35.6km)

지질구조선이 산맥이 되다

구조선의 세 방향

지도에 이름을 올리는 절차

영강지맥

 

8. 속리산 구간(화령재~늘재, 28.5km)

봉황산 볼거리들

충북알프스 이야기

칡이 많이 나는 고개여서 갈령인가?

천왕봉인가, 천황봉인가?

천왕봉과 비로봉

속리산의 8, 8, 8석문

속리산이라는 이름의 유래

한남금북정맥, 보청지맥, 이안지맥

 

9. 희양산 구간(늘재~이화령, 42.4km)

진행방식에 따른 산행 분류

산꾼들이 쓰는 은어(隱語) 몇 가지

봉암사

 

10. 조령산 구간(이화령~차갓재, 35.5km)

지현옥 추모목(追慕木)

부봉(釜峰)이라는 이름

조령(鳥嶺)이 새가 쉬어서 가는 고개라고?

마패봉이 박문수와 관계가 있다고?

하늘재 소고(小考)

고토 분지로의 최고 스승은 이중환이다

. 고토는 택리지에서 산맥을 보았다

쌍천지맥, 달천지맥, 영강지맥

 

11. 황장산 구간(차갓재~죽령, 31.4km)

인간 한계(extreme)에 도전하는 팀들

도계 역할조차 제대로 못하는 대간길

황장봉산(黃腸封山)

TIP 황월장봉산

황장산(黃腸山)과 황정산(皇庭山)

수리봉 소고(小考)

저수령의 유래

금천지맥, 한천지맥

 

12. 소백산 구간(죽령~마구령, 29.8km)

마을 이장님의 도움을 받으며

. 고토는 택리지에서 산맥을 보았다

마의태자와 국망봉?

상월조사와 98

마구령은 마군령이었다!

서천지맥

 

13. 태백산 구간(마구령~화방재, 40.9km)

태백산맥에 태백산은 없다?

남난희가 걸은 태백산맥

고토가 읽은 택리지

구룡산 유래 안내판에 대한 유감

내성기맥, 운곡지맥

 

14. 함백산 구간(화방재~댓재, 45.5km)

만항재와 옥동석항지맥

금대산과 지장어천지맥

검룡소가 한강의 발원지라고?

삼수령

신경준의 산수고, 여지고

이제 드디어 산경표다

카르스트의 나라 삼척

옥동지맥, 석항지맥, 지장지맥, 어천지맥

 

15. 두타청옥산 구간(댓재~백복령, 27km)

박달령과 전단향

조선의 영산 백두산

근역강산맹호기상도

백두대간의 유래

 

16. 석병산 구간(백복령~닭목령, 30.3km)

석회암과 백복령

100m가 낮아진 자병산

석병산 일대는 탑 카르스트

삽당령 이야기

조선광문회 발간 산경표 해제(서문)

산경표의 편찬자와 편찬 시기는 아무도 모른다?

 

17. 대관령 구간(닭목령~진고개, 36km)

고루포기산과 횡계고원

대관령은 단대령

대관령국사성황당

선자령의 위치?

대공산성 가는 길

물을 건너는 대간길

오대지맥

 

18. 오대산 구간(진고개~구룡령, 22km)

진고개의 유래

오대산과 오대(五臺)

한강의 발원지 우통수

한강정맥?

산경표는 곧 산자분수령이다

한강기맥, 양양남대지맥

 

19. 갈전곡봉 구간(구룡령~조침령, 18.75km)

구룡령 이모저모

구룡령 옛길

산줄기에는 계급이 있다

 

20. 점봉산 구간(조침령~한계령, 20.25km)

조침령 이야기

단목령 이야기

박성태 신산경표를 만들다

신산경표의 특장(特長)

 

21. 설악산 구간(한계령~미시령, 22km)

수리산이 설악산?

대청봉 부근

조정래도 속은 태백산맥

구한말 지리교과서

김영표 새 산맥도를 만들다

희운각대피소

 

22. 신선봉 구간(미시령~진부령, 14.5km)

미시령의 다른 이름들

신선샘과 화암사 코스

과태료 부과

새이령과 석파령

대한지리학회 드디어 입을 열다

마산의 유래

흘리령과 석파령

향로봉 유감

 

에필로그

 

 

 

출판사 서평

 

백두대간의 지침서로 활용하기에 필요충분조건을 다 갖춘 책!

백두산은 대륙의 산줄기들을 하나로 모은 다음 이를 다시 우리나라 전역으로 골고루 퍼트렸다. 대륙의 모든 기운과 생명의 원천은 이 산줄기를 타고 물줄기를 만들고는 곳곳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우리 선조들은 이를 조선산맥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백두대간(白頭大幹)이라 이름 지었다. 우리나라를 동서로 가르며 모든 산과 산줄기 그리고 물과 물줄기의 근간이 되는 아버지 산줄기 백두대간. 우리 국토의 70퍼센트가 산지여서 산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우리 민족의 애환이 녹아 있는 백두대간. 일본의 지질학자가 도용(盜用)산맥개념과의 충돌로 지금도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백두대간. 그렇게 일제에 의해 고초를 겪고 난 후 다시 한국전쟁으로 인해 허리가 잘린 채 신음하고 있는 백두대간. 그래서 오늘도 반쪽만 그 답사를 허락하여 결국 미완으로 마무리해야만 하는 백두대간.

 

대한민국에서 산줄기 산행 전문작가로 통하는 현오 권태화는 오랜 시간 동안 백두대간과 9정맥을 완주하고 지금은 기맥, 지맥 등을 진행하면서 얻은 풍부한 산행력과 짬짬이 공부하면서 쌓은 인문 지식을 바탕으로 역사와 지리 등 백두대간에 관한 흥미로운 지식과 산줄기 산행에 관한 모든 것을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저자가 오랜 시간 동안 직접 백두대간을 눈으로 보고 머리로 산의 이어짐을 그리면서 걸은 기록이고, 백두대간에 얽힌 숨겨진 얘기들을 해박하게 대화 형식으로 풀어가는 여정이다. 이런 형식은 백두대간 종주 산행의 묘미와 현장감을 최대한 살려준다. 또한 무려 576페이지나 되는 올컬러북에 담긴 진귀한 자료사진이나 백두대간에 얽힌 숨은 이야기, 알고는 싶었으나 그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는 흥미로운 내용을 읽다보면 책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 책을 펴내면서 백두대간은 드디어 태백산맥으로부터 해방되었으며, 이제 백두대간이 대한민국의 아버지 산줄기인 것과 백두대간만이 우리의 큰 산맥임을 선언한다. 그러면서 백두대간에서 가지를 친 정맥과 지맥까지 빠짐없이 소개하고, 대간길에서 만나는 모든 산이나 고개도 제대로 알려준다. 산맥과 산줄기의 차이뿐만 아니라 그 옛날 산줄기가 산맥이 되었다가 다시 지금의 산줄기로 돌아오는 과정도 소상하게 밝힌다. 또한 백두대간과 관련된 사람들을 소개하고 환경과 관련된 이야기도 나눈다.

무엇보다 산경표, 택리지, 대동여지도를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의 조선산맥론과 함께 해부하면서 사람들이 백두대간에 관해 궁금해 하는 것을 우리의 관심사와 함께 풀어낸다. 이 책을 펴내면서 가장 큰 수확과 보람이 있다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거짓된 백두대간을 낱낱이 파헤치고, 터넷에 떠도는 허무맹랑한 얘기들을 어느 정도 지울 수 있게 된 점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산이 좋아서 산에 오르지만 백두대간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대간꾼들에게 종합적인 지식의 장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거짓된 백두대간을 낱낱이 파헤친다

1980년 대동여지도에 미친 지도쟁이 이우형은 인사동 고서적 서점에서 낡은 책 한 권을 발견한다. 산경표였다. 그조차 산경표가 무슨 책인지 모르고 다만 이라는 글자가 들어가서 구입한 것이었다. 산경표는 우리나라 산줄기의 족보책이었다. 내용인즉 백두산은 대륙의 산줄기를 하나로 모은 다음 이를 다시 우리나라 전역에 골고루 퍼트렸다는 것이다. 즉 대륙의 모든 기운과 생명의 원천은 백두산에서 흘러가는 산줄기를 타고 물줄기를 만들고는 나라 곳곳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는 것이었다.

백두대간이었다. 이 산줄기가 바로 백두대간이었다. 하지만 생소했다. 그때까진 그랬다. 그 책을 발견한 이우형도 몰랐고 소설 태백산맥을 쓴 조정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도 몰랐다. 아니 우리나라 사람 모두 그 백두대간을 몰랐던 것이다. 그저 일본인 지질학자가 알려준 태백산맥으로만 알고 있었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은 이름도 모르는 고개인 마천령산맥에서조차 빠져 있었다.

그 이유는 일본의 식민지 교육 때문이었다. 일본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는 우리 선조들이 사용하고 있던 산맥이라는 개념을 지질구조선의 대체 개념으로 도용했다. 그러고는 백두대간과 정맥을 참절(斬截)했다. 1903년의 일이었다. 이때부터 산맥과 산줄기 개념의 혼동이 시작되었고 우리 지리교과서에서 백두대간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 책의 저자 현오 권태화는 이 점에 주목했다. 신라 도선이 백두대간이라는 산줄기를 인식하고 있던 때부터 성호 이익과 택리지의 이중환을 거쳐 여암 신경준에 이르면서 완성된 우리나라 산줄기 체계가 황국사관에 물든 고토 분지로가 조선 땅에 들어와 노두(露頭)를 조사하며 자원 침탈을 위한 작업을 하면서 백두산의 혼을 끊듯 백두대간을 토막 내는 과정을 말이다. 그리고 현재도 산맥에 밀려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백두대간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필자는 이 일련의 과정을 백두대간을 걸으면서 얘기한다.

 

산줄기 최고 작가의 백두대간 결산 작품!

백두대간을 이어서 걷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남쪽 백두대간이 시작하는 진부령에서부터 지리산 천왕봉에 이르는 방법 즉 남진(南進)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거꾸로 지리산 천왕봉을 출발하여 진부령으로 진행하는 방법 즉 북진(北進)이다. 우리 민족의 염원인 통일이 되는 날 북쪽의 나머지 백두대간을 이어가기 위해 저자는 이 책에서 북진을 선택했다.

노련한 저자는 지리산에서는 성모석상과 진포대첩, 황산대첩을 이야기하고, 김종직, 조식과도 대화를 나눈다. 이 책의 45본문을 보자.

 

사실 이 천왕봉에는 볼거리가 하나 더 있었다. 왜구와 광신도 때문에 사라진 성모상이 바로 그것이다. 뒤에 얘기하겠지만 이 성모상은 천왕봉을 지키다 14세기 말에 왜구에 의해 훼손당한 적이 있었다. 간신히 복원해 놓았는데 1970년대 몰지각한 종교인이 우상숭배라고 하면서 또 훼손했다. 그것을 천왕사 주지 혜범이 어렵사리 찾아서 현재는 이 성모상을 천왕사에서 보관하고 있다.

역사에 해박한 장감독이 거든다.

, 나도 들어봤어. 14세기 말에 최무선의 진포대첩과 연관된 얘기지. 그 전쟁이 화포를 이용한 해전으로서는 세계 최초였다고 하잖아. 서양의 레판토 해전보다 191년이나 앞섰고.”

인물로는 천왕봉의 이 성모상과 고토 분지로, 최무선, 이성계 등과 연관 짓고, 역사적인 사건으로는 진포대첩, 황산대첩을 연결시켜 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야.”

, 근데 진포대첩이나 황산대첩 때 왜구 잔당들이 여기까지 와서 성모석상의 목을 쳤다는 건 무슨 얘기야

그게 참 재미있어. 나중에 해당되는 대목에서 또 얘기하자. 성모상 얘기는 김종직(1431-1492)유두류록(遊頭流錄)’에 보면 자세히 나와. 나아가 후세 사람들이 목을 다시 붙여놓았다는 얘기도 있고.”

장감독은 조금 의아스러운 모양이다.

그럼 그 성모는 누구야

기록에 의하면 15세기경에 이 천왕봉에는 성모묘(聖母廟)라고 하여 세 칸짜리 작은 사당이 있었어. 거기에 이 성모석상이 모셔져 있었고. 여기서 맑은 날을 보지 못할 경우 이 석상에 기도를 하면 날이 갠다고 했대. 속설에 이 성모는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이라고 하지.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는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라고 나와 있고.”

 

저자는 산경표의 기본원리인 산자분수령도 얘기한다. 이 책 28쪽의 본문을 보자.

 

산맥은 고토 분지로가 만든 개념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 선조가 예전부터 쓰던 말이었어. 그것을 고토가 도용한 거지. ()이 뭐야? 맥은 끊어지지 않고 하나로 이어진 것을 얘기하잖아. 그러니 산이 하나로 이어지는 거니까 산줄기이고 그걸 한자로 표기하면 산경(山經)이 되잖아. 그걸 우리 인체 구조에 빗대어 산맥(山脈)이라고 한 것이지.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그렇게 인식을 했던 거야. 산과 강 그리고 사람을 달리 생각한 게 아니고 하나의 유기체로 보았던 거지. 그러니 우리 선조들은 산을 보면서 그것들이 이어지는 산줄기를 보았고, 그 산줄기와 산줄기 사이에서 발원하는 물줄기를 보았던 거야. 그러고는 자신이 그 산줄기와 물줄기에 기대어 살고 있는 것을 본 거지. 선조들은 산줄기나 물줄기를 인간과 달리 본 게 아니고 하나의 공동체로 본 거야. 어찌 보면 산맥이라는 개념은 우리 민족에게는 자연스럽고 친숙한 개념이었던 거지. 그걸 고토가 교묘하게 이용한 것이고. 우리의 산줄기는 곧 분수계(分水界). 분수령(分水嶺)이라고도 하지. 그러니 앞으로 산은 스스로 분수령이 된다.’라는 의미의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에 대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얘기할 거야.”

산에 오르기 전부터 쏟아내는 잔소리지만 그래도 새로운 얘기니 장감독은 흥미 있게 경청해 준다.

그리고 이거 하나는 확실히 해두자. 앞으로 자주 나오는 얘기지만 산맥산줄기. 그리고 산줄기=분수계가 돼. 하지만 1903년 이전 얘기를 할 때는 산맥=산줄기=분수계이고. 어쩌면 1988년경 이전에는 지리학자들 일부도 산맥=산줄기혹은 산맥=분수계로 봤었을지도 몰라.”

 

저자는 산행을 하면서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거짓된 백두대간도 낱낱이 파헤친다. 이 책의 본문 37쪽을 보자.

 

개선문(凱旋門) 바위를 통과할 때쯤이면 계절과 상관없이 온몸은 땀투성이가 된다. 좌측 천왕봉 바로 아래 직벽에는 천왕샘이 있다. 석간수인 이 샘의 물맛이 일품이다. 그런데 이 옆의 안내문에는 이 샘이 남강의 발원지란다. 거짓말이다!

거짓말? 여기가 남강의 발원지가 아니란 말이야? 그럼 남강의 발원지가 어디야

국립공원 안의 안내판을 잘못 써놓았다니 장감독은 자못 놀란 표정이다.

남강 들어봤지? 진주 남강. 논개가 촉석루에서 왜장 로구스케를 안고 떨어져 죽었다는그 남강의 발원지가 여기가 아니라는 말이지.”

무슨 말이야? 여기에는 이렇게 써놨는데!”

하긴 어디든 안내판에 씌어져 있는 글을 보면 그 내용을 신뢰하게 마련이다. 산이 특히 그렇다. 하지만 의외로 엉터리 내용이 기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서 보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저자는 이 책의 본문 145쪽에서도 일침을 가한다.

 

빼재는 수령(秀嶺)이라고도 부른다. 이는 빼어나게 수려한 고개라는 의미로 해석을 하여 억지로 가져다 붙인 한자어다. 예전에 이 부근에 있던 산적이 산짐승을 잡아먹고 그 뼈를 쌓아두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으나 행인도 별로 없었던 이 고개에 무슨 산적이 있었겠냐는 반문에는 꼬리를 내리게 될 것 같다.

그래도 이 빼재가 빼어나게 아름답다는 의미에서 왔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이 부근 사람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고 하니 수령(秀嶺)만큼은 아닌 게 틀림없을 것 같다. 어쨌든 그런 수령이 아닌 빼재가 지금은 추풍령에 대항하여 신풍령(新風嶺)으로 개명을 했다고 한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도 수령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판이니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도를 자주 들여다보면 볼수록 국토지리정보원 지도도 믿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을 자꾸 느끼게 된다.

 

저자는 영신봉에서 신백두대간을 이야기하면서 노고단에서 지리산과 두류산 그리고 노고단의 유래도 들려준다. 이 책의 32쪽 본문을 보자.

 

백두대간의 시작은 지리산 천왕봉(1915m)이다. 지리산은 방장산, 두류산, 삼신산 등이라고도 했다. 이들 중 두류산(頭流山)이 제일 마음에 와 닿는다. 해석해 보면 백두산()에서 흘러()내린 산이라는 뜻이다. 즉 백두대간이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의 이음이라는 인식이 고스란히 이 두류산이라는 이름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지리산에 대해서는 이 산을 타다보면 지루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억지 얘기도 가끔은 등장한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들어가 생각해 보면 두류는 우리말을 한자어로 표기한 것에 불과하다. 즉 두류는 옛 우리말 두르였다. ‘병풍처럼 크게 둘렀다는 의미다. 큰 산줄기라는 말로 두름/의 형태였던 것이다. 두르두류로 된 것에 적당하고 그럴싸한 한자 頭流를 가져다 붙인 것이다. 또한 지리두르드르드리디리지리의 또 다른 과정을 거쳐 변하게 된 것인데 마찬가지로 이 지리에 적당한 한자인 智異를 가져다 붙여 오늘날의 한자어 지리산(智異山)이 되었다. 즉 구개음화와 전설모음화 과정을 거쳐 결국 오늘?? 지리산이라는 이름이 된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는 지루한 산’, ‘지혜로워지는 산이라는 말은 삼가자.

 

저자는 덕유산 구간에서는 남강기맥도 얘기하고 덕유태극종주 얘기를 하면서 산을 보는 요령도 배워보면서 환경문제 얘기도 나눈다. 이런 얘기는 속리산을 지나면서 불붙기 시작하여 오대산과 설악산에서 절정을 이룬다.

 

저자의 변 산을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야 이 책을 선보여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 책의 분량은 무려 576쪽이나 된다. 두툼한 분량이다. 하지만 이틀 혹은 삼일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내용이다. 그만큼 책장이 잘 넘어간다는 얘기다.

백두대간이라는 것을 알고 싶어 하는 초보 산꾼, 백두대간을 꿈꾸고 있는 산꾼, 이미 몇 번이고 백두대간을 종주한 대간꾼, 그 누구에게나 어울리고 또 열려 있는 책이다.

이 책의 첫 페이지를 넘기면 일단 독자는 현오와 함께 백두대간을 걸어 진부령까지 가게 된다. “진부령에서 백두대간을 졸업하는 순간 독자는 이미 대간꾼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라는 필자의 자랑이 빈 소리로만 들리지 않는다.

 

 

본문 중에서

 

 

산맥은 이미 우리 선조들이 예로부터 가지고 있던 산줄기 인식 체계다. 일찍이 우리 조상들이 사용하고 있던 산줄기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18세기 말이 되어서야 정립된 백두대간이니 정맥이니 하는 이름은 산맥 개념보다 훨씬 후에 생긴 것들이다. 다시 말해서 산맥이라는 큰 틀 안에 백두대간이니 한북정맥이니 하는 산줄기 개념들이 들어있는 것이다. 이렇듯 산맥과 대간, 정간, 정맥 등은 서로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었다. ()의 나라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조선 최고의 인문지리학자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서 조선의 산줄기를 조선산맥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지리교과서에서 배웠던 산맥(山脈), 이른바 교과서산맥은 우리 조상들이 쓰던 산맥과는 전혀 다른 개념인 것이다.

우리나라 전통적 산줄기 개념으로서의 산맥. 그리고 지질구조선의 다른 이름인 이른바 교과서 산맥’. 이 둘이 산맥(山脈)이라는 공통된 이름으로 사용되면서 용어의 혼란이 시작되었다. 문제는 1903년부터 1980년까지의 기간이다. 이는 1903년 고토 분지로가 조선산맥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이래 일제강점기 식민 교육을 거쳐 1980년 이우형 선생이 서울 인사동의 한 고서점에서 산경표라는 책을 발견하기까지의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교과서산맥이 진짜 우리나라의 산줄기인 줄로 알았다. 일본인들이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pp. 29-30

 

우리나라에는 노루목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 여럿 있다. 설악동에서 비선대 올라가는 곳에도 있고, 포천, 안성, 진주 등 우리나라 곳곳에 퍼져 있다.

어떤 국어사전에는 노루가 자주 다니는 길목이라고까지 친절하게 설명도 해 놓았다. 그런데 어떤 곳 지명을 보면 한자로 노루 장()에 목 항()을 써서 장항(獐項)이라고까지 표기한 곳이 눈에 띈다. 그런 곳의 지형은 어떻게 생겼을까? 노루가 다닐 만한 곳이 아닌 거 같은데.

사실 여기서 노루의 뜻은 늘어진 땅이다. 산에서 들로 길게 뾰족하게 나온 땅의 모양인 에서 발음이 비슷한 훈()을 가진 누를 황()이 나왔고, 역시 발음이 비슷한 노루 장()이 나왔다고 한다. 거기에 실제 노루는 목이 긴 짐승이니 너른 들이나 산에서 내려오는 좁은 지역을 일컫기에 노루목만큼 좋은 단어는 없었으리라. 그걸 다시 한자어로 표기하니까 장항(獐項)이 된 것이다.

이참에 고양시의 장항동이나 고구려부터 내려온 안산의 옛 이름이 장항구(獐項口)였음이 다 그 생김새와 관련이 있음을 이해할 수 있겠다.

-pp. 64-65

 

, 항상 가지고 있던 의문인데 예전 우리 선조들은 어떻게 이 백두대간을 파악할 수 있었을까? 그땐 GPS나 나침반도 없었을 텐데.”

그 궁금증은 사실 필자도 가지고 있었다. 아니 산줄기를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던 의문이기도 하다.

나라고 그런 궁금증이 없었겠냐? 그런데 삼국사기를 보면 당나라 승려 법안이 신라에서 자석을 얻어간 사실이 나와 있다고 해. 서기 6695월에는 자석 두 상자를 당에 보냈다는 기록도 있고. 나침반은 종이, 화약과 더불어 중국이 자랑하는 3대 발명품 중에 하나인데 그렇다면 세계 최초로 나침반을 발명한 나라는 신라로 볼 수 있다는 거지. 나침반의 원래 이름이 신라침반(新羅針盤)인데 여기서 자를 빼면 나침반이 되잖아? 바로 그 얘기지.”

그렇군. 우리나라가 중세 이전에는 중국, 근대에 들어서는 일본을 통해 서양에 그 존재가 알려졌다는 게 문제야. 산줄기나 산경표도 다른 나라에서 도용하지나 않을지 모르겠네.”

글쎄. 어쨌든 우리 조상들은 산줄기를 본 게 아니고 물줄기를 본 거야. 물줄기가 더 정확하잖아. 한눈에 볼 수 있고.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끝이 나올 테고 그 끝은 항상 두 개의 산줄기가 만나는 곳 아니겠어? 물줄기의 다른 말을 산줄기라고 본 거지. 그걸 터득한 거야. 그러니 우리도 산경 즉 산줄기를 볼 때 산줄기를 먼저 볼 게 아니고 물줄기를 보면 돼. 그러면 산줄기가 보여. 산경표는 바로 그 점을 주목한 거야. 그래서 10대 강을 설정하고 그에 따라 산줄기 이름도 강 이름을 따서 짓게 된 거고. 그게 바로 정맥이잖아. 한북정맥은 한강 북쪽에 있는 한강의 울타리가 되는 정맥이라는 거고, 한남정맥은 한강의 남쪽 울타리가 되는 정맥이라는 거지.”

-pp. 83-84

 

근데 깃대봉은 왜 붙여진 이름이야

여기가 바로 신라와 백제의 국경 바로 거기잖아. 대간이 국경 역할을 했으니까. 그러니 이 산 아래 주둔하고 있던 양측 군사들이 치열한 영토전쟁을 벌였을 거 아니야? 그때 어느 측이든 이길 때마다 정상에 자기 깃대(깃발)를 꽂았다는 데서 유래한 거라고 하지.”

, 그래? 국경을 두고 매일 싸우기만 한 건 아니잖아.”

그래. 나도 사실 그건 의심쩍지. 그 이유 때문에 깃대봉이었다면 사실 구시봉이라는 이름이 개입될 여지가 없잖겠어? 나는 여느 깃대봉이 다 그렇듯 일본인들과 관련된 것이라고 봐. 즉 일제강점기 때 우리 땅을 강탈하려는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전역을 측량했잖아. 그때 산봉우리란 봉우리에는 죄다 빨간 깃발을 꽂았고. 그러고는 그 봉우리에 깃대가 꽂혀 있다고 하여 그냥 깃대봉으로 불렸다는 거지.”

그러니 구시봉은 20061월에 되찾은 산 이름이다.

-pp. 118-119

 

한편 우리나라 산 이름 중 국사봉다음으로 많은 산 이름은 수리봉인데 이 수리봉수리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

이 단어는 원래 고구려 말로 제일 높은 곳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따라서 주변 산보다 높은 산을 수리봉이라 불렀던 것이다. 따라서 백수리봉은 주변 산에 비해 유별나게 높고 신성한 산이라고 보면 된다.

-pp. 154-155

 

 

, 근데 지질구조선이 산맥이라며? 우리가 배운 태백산맥이니 뭐니 하는 산맥이 어떻게 만들어지게 된 거야? 원래 산맥이라는 말이 우리가 쓰던 말이었다면서!”

장감독은 제법 언성이 높아졌다. 우리는 학교 다닐 때 그렇게 배웠으니 말이다.

장감독, 아베 노부유키라고 알지

, 요새 인터넷을 달구고 있잖아. 지금 수상인 아베 신조의 할아버지.”

하긴 똑똑한 장감독이 그런 걸 모를 리가 있나.

그가 한 소위 마지막 총독 아베의 소름끼치는 예언이라는 것도 알지

알지. ‘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 교육을 심어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조선은 결국 식민 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바로 그거야. 일본은 우리를 침략하고서는 역사와 지리교육에 각별하게 온 힘을 기울였다고 하잖아.”

-pp. 157-158

 

오늘 구간은 김천의 진산 황악산을 지나 추풍령을 지나겠네. 옛날 선비들이 지나다니길 꺼려했다는 궤방령도 지나고.”

황악산인가? 황학산인가? 이것도 한번 따져봐야지. 추풍령 포도 맛을 보며 그 유명한 금산을 오를 텐데 금산 얘기는 안 하니? 다 들어봤을 텐데.”

넌지시 장감독이 얼마나 공부를 했는지 떠본다.

대간꾼들은 대간을 졸업할 때까지 두 번 눈물을 흘린다는데 한 번 더 눈시울을 붉히는 곳이 있다면 바로 이 금산이라고 한다며?”

대간꾼들은 두 번 눈시울을 적신다고 한다. 한 번은 자병산 구간을 지나면서 싹둑 잘려나간 자병산을 보고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고, 다른 한 번은 진부령에서 졸업의 기쁨과 함께 가로막힌 휴전선 때문에 눈시울을 적신다고 한다.

그리고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오늘 추풍령을 지나면서 만나는 금산의 처참함을 보며 다시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pp. 168

 

갓바위재를 지나면서 우측으로 시루봉(876.8m)도 볼 수 있다. 시루봉이라! 시루봉하면 우선 서울 삼각산(북한산) 의상능선에 있는 증취봉이 떠오른다. 이 이름도 다 우리말 수리에서 온 것이다. 수리가 시루가 됐고 시루가 떡을 찌는 시루이니 한자로 차자(借字)하는 과정을 거쳐 증취(蒸炊)가 되었을 것이다. 자세히 읽지 않으면 그 복잡한 단계를 한눈에 알아채기가 그리 쉽지 않다. 은평구 증산동(甑山洞)도 다 시루매>시루뫼가 변형된 것이다. 그러니 떡시루 모양의 산이어서 시루봉이라 부르게 됐다는 말도 이젠 삼가자.

조항산을 지나면서 서서히 고모치 광산과 좌측의 삼송리 채석장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고모치의 고모샘은 오아시스 역할을 하는 곳이다. 반드시 체크를 해야 할 곳이다.

-pp. 243-244

 

 

그럼 예전에는 태백산맥 종주를 어떻게 한 거야?”

말은 태백산맥 종주였는데 산맥을 종주한 게 아니고 실제는 백두대간 일부와 낙동정맥 일부를 이어서 걸은 것이지. 백번 양보하여 그 당시 개념으로 얘기하더라도 태백산맥을 걸은 게 아니고 태백산맥의 분수계만 걸었다는 것이지. ‘산맥=분수계의 개념으로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엄격하게 따지면 산맥은 사람이 걷거나 종주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야.”

그래도 명색이 태백산맥인데 태백산은 지나야 했을 거 아니야!”

결론을 우선 보자면 그들이 걸었던 태백산맥에는 태백산이 없었어. 즉 태백산맥 안에는 태백산이 없었던 거야!”

그랬다. 태백산맥은 태백산을 품어야 태백산맥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었을 것 아닌가. 당연히 구조선은 분수계와 달라 태백산맥이라 하면 산줄기의 분수계를 얘기하는 게 아니고 지괴(地塊)나 산괴(山塊)를 얘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태백산맥은 당연히 태백산을 품고 있다고 얘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던 사람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pp. 330

 

전망이 좋은 쉼터를 지나고 우측으로 잠시 조망이 트이는 곳이 나오기 시작하면 항상 그 우측 방향으로 시선을 집중시키자. 그러면 머리는 없어지고 허리가 잘려나가고 있으며 허옇게 속살을 드러낸 자병산(紫屛山)을 볼 수 있다. 차마 눈을 뜨고 보기 어렵다면 그냥 지나쳐도 되는 곳이다. 궂은 날이면 피어오르는 자줏빛 안개가 한 폭의 병풍이었다는 자병산. 대간을 지나는 이들이 김천 금산에 이어 두 번째 눈물을 흘리는 곳이다.

-pp. 397-398

 

 

한계령의 옛 이름은 소동라령(所東羅嶺)이었다. 그러던 이름이 택리지나 산경표에 오색령이라고 표기되었으니 적어도 조선 중반기인 17세기부터는 오색령이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잡았던 것 같다. 그 이름이 지금의 한계령으로 바뀌게 된 계기는 197112월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하고 있는 인물인 김재규가 1103야공단을 지휘하여 44번 도로를 확포장하면서부터다. 그 덕분에 만들어진 조침령은 순전히 한계령에서 축적한 기술력의 산물이다. 시작은 군사용 비상도로였다.

물론 이 비포장도로는 얼마 뒤 일부 포장도로가 되었고, 다시 2006121일에는 터널이 뚫리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참 역사란 알다가도 모를 것이고 돌고 도는 것이 역사일 것이다.

더욱이 산경표나 옛 지도에는 오색령(五色嶺)이나 조침령(曹枕嶺)이라 표기되었던 것들이 지금은 오색령이 한계령(寒溪嶺)이 되는 것이나 曹枕嶺鳥砧嶺이 되었다가 지금의 鳥寢嶺으로 바뀌는 것을 보면 예전에는 화석화(化石化)된 문화경관을 지명이라고 봤었는데 지금은 집권자나 가진 자들의 필요에 의해서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다. 더욱이 새재가 조령(鳥嶺)이 된 것에 착안을 했는지 여러 가지 이유로 무리를 지어 올라야하는 뜻의 조침령(曹枕嶺)하도 높은 고개라 새도 잠자고 지나던 고개라는 의미의 鳥寢嶺이라는 한자로 바꿨다는 것은 너무 자의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겠다.

-pp. 493

 

소설 태백산맥10권을 통틀어 봐도 태백산맥이라는 용어는 몇 번 나오지 않는다. 사실 태백산맥은 이 소설의 무대도 아니다. 소설은 단순히 끊어진 국토의 남북을 잇는 통일 산맥으로 태백산맥을 설정했을 뿐이다. 즉 남북으로 이어진 태백산맥이 그 허리를 잘린 것같이 우리 민족의 현실을 이 소설이 대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태백산맥이 척량산맥이고 우리나라의 허리가 곧 이 태백산맥이라는 명제를 우리는 수도 없이 들으면서 성장했기 때문에 태백산맥은 너무나 쉽게 우리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런데 지도를 봐도 실상 태백산맥은 휴전선을 넘어 북으로 얼마 올라가지도 않는다. 철령까지가 태백산맥이니까 그렇다. 척량산맥이라고는 하지만 태백산맥이 온전하게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외세라면 질색을 하는 조정래 작가가 왜 그 좋은 백두대간이라는 이름을 놔두고 태백산맥이라는 이름을 사용해야만 했을까?

-pp. 523-524

 

 

 

 

 
 



출처: 현오님께서 메일로 보내 주신 자료

댓글 모음

산 악 인  2017.09.07. 15:00 답글 신고

 

백두대간 을

종주한분이나

앞으로 계획중인

분들이 꼭 한번

읽어 보면 좋을 듯한

산서 입니다

울 나라에선 산서의

독자층이 없어 출판으로

돈이 안 되어 초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싑고

고로 오랜된 산서는

구하기도 싑지 않는것이

현실 이지요

아무튼 초반 중판

베스트셀러 로 남길 바랍니다.


이 동권     15:00 new

祝賀 합니다..


조은산 17.09.07. 18:19 new

대단합니다. 큰 박수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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