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모를 <묵묘>에서 아픈다리 잠시 쉬고….
무덤인지 둔덕인지 아니면 구릉인지 분간하기 조차 어려운 무덤을 내 고향 경상도에서는 묵묘(<묵뫼>가 표준말)라 부른다.
버려진 무덤, 자손이 대가 끊긴 것 인지? 아니면 조상 산소를 잃어 버렸는지? 벌초를 한지가 얼마나 됐는지?
자손의 술잔이 끊긴 지가 얼마나 됐는지? 알 수 없는 무덤 아닌 무덤,
억세 풀이 무성이 돋아나고 잔솔가지가 돋아 상머슴 팔뚝만한 굵은 나무로 자라 짙은 그늘을 드리웠고
낙엽이 켜켜이 쌓여 이끼마저 무성한데
두견이 울음에서 토한 핏자국이 검붉게 맺혔다는 슬픈 전설을 간직한 두견화(진달래) 몇 그루가 봄이면 애잔하게 피고,
이름 모를 산새가 날아와 노래 한 곡조 슬프게 울어주고
훌쩍 날아가 버릴 것 만 같은 둔덕 아닌 묵묘에 애잔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사람이 한평생 사는 것이 무엇인지?
권세와 부귀와 영화를 누려 동산만한 무덤에 묻힌 왕후장상 같은 사람도,
죽장망혜(竹杖芒鞋)에 괴나리 봇짐 걸러 메고 강산을 주유하다
어느 이름 모를 산비탈 양지 편에 묻힌 풍류묵객도,
백 년 세월 앞에는 멧돼지가 코 나발로 뒤집었거나 풍상우로(風霜雨露)에 시달리다가 결국은 묵묘가 되는 것을…….
내가 짬 날 때 마다 자주 찾는 산 자락을 휘적휘적 오르다 보면
둔덕인지 무덤인지 구분조차 어려운 묵묘를 종종 만나는 수가 있다.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 잔솔 가지가 자라 육간 대청의 들보재목으로 쓸 만큼 자랐으니 말이다.
주위를 살펴보니 잘 다듬어진 커다란 상석(床石)이 기울어 흙에 묻히고
낙엽으로 거적 덮이어 이끼를 뒤집어 쓰고 한쪽 모서리만 삐죽이 나와 있다.
풍마우세(風磨雨洗)에 명문(銘文)은 알 길이 없고
그 모서리의 크기만 보아 미루어 짐작해도 권세께나 누리던 사대부 집안 어르신 임은 익히 알 것 같다.
그 후손들 다 어디 가고 한적한 산자락에 묵묘되어 누웠는고?
밤에는 까만 하늘에 총총한 별을 벗삼고 두견이 슬픈 울음을 자장가 삼아 유유자적하며 백골로 누웠는가?
무덤 속에는 한 조각의 뼈마디 마저 삭아내려 없어졌겠지만 살았을 적 한 생을 호령하며 살았을 그 누구?
그도 자식 잘 키우기에 골몰했고 삼강오륜 가르쳐 깨우치게 했을 터인데
후손이 단손(斷孫) 되었는지 삶에 골몰하다 무덤을 잃었는지?
양지편의 봄빛이 따뜻하다 해도
아직은 바람이 귓볼에 차가우니 봄이 무르익어 백화가 만산에 가득해질 즈음이면 두견화 몇 가지라도 꺾어 묵묘 앞에 놓아주고 술잔이 끊어진 지 몇 해인지 모르지만 한 번 쓰고 버릴 종이 잔에라도 소주한잔 올려놓고
허리춤의 단소로 한 곡 가락이라도 불어주고 싶다.
사람이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가르침은 만고의 불변이고 자연 생태계의 법칙일 것인데
공원묘지에는 거대하고 화려하게 돌을 깎아 돌무덤을 만들어 놓고 무덤인지 석굴(?)인지
분간하기도 쉽지 않은 모습을 볼 때 마다 <저런 게 아닌데…..?>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다.
수 백 기(基)로 이렇게 돌 밭(?)을 만들어 놓았으니 몇 백 년을 지난들 흙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터…
새까만 오석이 그 때까지 반들반들 윤기 나며 곧추 서있기라도 하겠는가?
권세 누려 행세하던 사대부 집안의 조상도 저렇게 묵묘가 되는데?
세상 잘 만나 돈 몇 푼 벌었다고 저렇게 호화롭게 돌무덤 만들어 놓고 효도한다고 착각하고,
돈이면 뭐든지 다 된다고 자식 가르쳐 놓고 자기후손 몇 대까지 그 무덤 돌봐줄지 생각이나 해 보았는지가 궁금하다.
차라리 임자 없는 묵묘가 공원묘지 돌 무덤 보다는 행복하다 할 것이다. 흙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으니까.
그래도 세월이 흘러 그의 혼백이 머물렀다 떠난 흔적이라도 알아보고
두견화 한 두 가지 꺾어 놓아주고 술 한잔 부어 줄 지나가는 나그네라도 있을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니까.
내 나이 이제 엊그제 이순을 지났는데
무덤 얘기를 하면 “아니 벌써?” 할지 모르지만 나이가 덜 찼다고 묘지생각도 하지 말라는 법은 아니니까.
묘지야 묻히는 당사자 뜻이 아니라 남아 있는 자손의 몫이라 하릴없는 생각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리라.
그래도 내가 꿈꾸는 묘지는 멀다는 핑계로 자주 와 보지 않아도 좋고,
가깝다고 자주 찾아 올 것 같지도 않을 묘지를 낯설고 물 설은 엉뚱한 산자락이 아니라
내가 나고 자라 언제라도 포근히 보듬어 줄 고향 산자락이 좋겠다.
동네가 저만큼 내려다보이는 앞동산 부모님 발치 한구석에 한 평 땅이면 족할 것을,
봉분은 꼴머슴 보리밥 밥 그릇 만큼만 봉긋하면 될 것이고 땅이 비탈지면 돌로 축(築)을 쌓을 것이 아니라
흙으로 돋우어 두둑만 만들면 그만이고 상석(床石)이고 월석(月石)이고 묘비고 망주(望柱)고 이 모든 것은
흙으로 돌아가는데 더디고 어렵게만 할 따름이다.
벌초하고 술잔 올리는 것은 살아생전에 서로 대면(對面)하고 정을 교감한 할아버지까지만 끊어지지 않으면 될 것이다.
세월이 흘러 언젠가는 묵묘가 될 터인데 묵묘됨이 곧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백 년을 더 거슬러 조상을 기릴 지라도 세상을 떠난 영혼이 저 세상에서 계속될 영원한 삶을 생각한다면
묵묘가 되는 것에 백년을 차이가 있는 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자손들이 찾아보기 편하게 굳이 표식이라도 할라치면
잘 다듬은 춘양목에 단산오옥(丹山烏玉)을 곱게 간 먹(墨) 글씨가 제격이다.
고향을 그리며 객지에 살다가 이곳 어머니 발치에 잠들다
표지목이 풍상우로(風霜雨露)에 썩어 흙으로 돌아갈 때 까지는 표지석 역할을 충분히 해 내리라.
그 때까지 이면 충분하다.
인류 문화 중에 장례문화가 가장 더디 변한다고 한다.
그래서 역사를 연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자료를 무덤발굴에서 얻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와 같이 매장문화의 역사가 오랜 땅에는 후손이 있어 찾아보는 무덤보다
임자 없이 흙으로 돌아간 묵묘가 훨씬 더 많으리라.
휘적휘적 산길을 가다 한숨 돌리려고 걸터앉은 둔덕이 그 옛적 누구의 묵묘인지도 모를 일,
지나가는 길손에게 아픈 다리라도 잠시 쉴 수 있게 쉼터라도 되 주어 고마울 따름이고,
약삭빨라 눈이 먼 현대인들은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이름 없는 산새는 묵묘임을 알아보고
봄 되면 노래 한 곡은 불러주고 갈 것이다.[출처: 차선생]
'사랑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후배 용식이 (0) | 2018.04.19 |
---|---|
강 길따라 가는 사람 (0) | 2018.04.19 |
석바위 탁구장 (0) | 2018.02.14 |
후배의 정성 (0) | 2018.02.01 |
초등학교 동기들 서울팀 모임 (0) | 2018.0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