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기 지도

용인 능안산, 말등대산, 미륵산, 동맥이산, 송림산, 오정봉,

꼴통 도요새 2018. 4. 13. 20:29
반응형

용인 능안산, 말등대산, 미륵산, 동맥이산, 낭댕이산, 송림산, 오정봉, 오천골

 

1. 산행지: 능안산(146m), 말대등산(251.3m), 미륵산(260.9m), 동맥이산(352.8m), 낭댕이산(281.9m), 송림산(321.9m), 오정봉(332.2m), 오천골산(188.1m) 

2. 위치: 경기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오천리

      

7. 들머리/ 날머리: 마장초교[원점회귀] 

8. 산행코스: 마장초교능안산(146.8m)광주이씨 효열비말등대산(251.3m)미륵산(260.9m)동맥이산(352.8m)달랑고개사기실오정봉(332.2m)송림산(321.9m)낭댕이산(261m)왕복307.1임도오천골산(188.1m)마장초교 

9. 특징: 

동맥이산

옛날부터 각 골짜기마다 동쪽을 바라보며 산맥이 형성되었다고 해서 오늘날 동맥이산으로 불리우고 있다. 동맥이산을 중심으로 호랑이 한쌍이 이 곳범바위 동굴에 둥지를 틀고 1940년대 초까지 살았다고 이 곳 원주민들은 범바위 동굴 주변의 나무를 베어 땔감을 사용하지 못해 산림이 울창하였으며, 1950년대에 이 곳을 중심으로 나무를 베어 숯과 땜감을 만들어 팔았다고 한다. 현재에도 옛날 숯가마는 산중턱에 위치해 있으며, 현 위치와 아래쪽 길과 잣나무 숲 중앙 길은 숯과 땔감을 지게로 나르던 길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출처: 이천 공룡수목원]

용인시[龍仁市 

개관    

동쪽은 광주시·이천시, 서쪽에는 의왕시·수원시·화성시·평택시, 남쪽은 안성시, 북쪽은 성남시·광주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7°01′∼127°26, 북위 37°05′∼37°22에 위치한다. 면적은 591.33이고, 인구는 975746(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3개 구, 1개 읍, 6개 면, 24개 행정동(35개 법정동), 309개 행정리(72개 법정리)가 있다. 시청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삼가동에 있다.

자연환경    

동쪽 광주시와의 경계에는 노고봉(老姑峰, 574m)·정광산(503m)·태화산(泰華山, 630m)이 솟아 있고, 이천시의 경계에는 건지산(乾芝山, 411m)·수정산(水晶山, 344m)이 솟아 있다. 

서쪽의 의왕시와 수원시의 경계에는 바라산(428m)·백운산(白雲山, 507m)·광교산(光敎山, 582m)·형제봉(兄弟峰, 448m) 400m 이상의 산들이 있고, 그 동쪽에는 남한산성에서 뻗어나온 법화산(法華山, 385m)·성산(城山, 472m)·부아산(負兒山, 403m)·함봉산(咸峰山, 306m)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남쪽에는 사궁산(515m)·쌍령산(雙嶺山, 502m)·경수산(326m)·구봉산(465m)등이 안성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서쪽의 탄천(灘川)과 신갈천(新葛川)은 신갈저수지를 만들고 중앙의 금학천(金鶴川경안천(京安川진위천(振威川)을 따라 남북방향으로 저지대가 형성되고 있다. 시의 동남부에는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청미천(淸美川)이 동남쪽으로 흐른다. 지질은 전 지역에 선캄브리아기의 호상편마암과 화강암질편마암이 분포하고 서단에는 대보화강암이, 구성면에는 각섬석이 나타난다. 토양은 적황색토와 암설토가 나타난다.  

역사  

수렵과 농경이 동시에 가능한 하천을 낀 산간지역이 발달하여 비교적 많은 선사유물이 발굴되고 있다. 부아산과 석성산을 축으로 하여 방사상으로 뻗어나간 경안천·탄천·오산천·진위천 등 4개의 수계권역에서 석기류와 반월형 긁개 등 전기 석기시대 또는 그 이전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또 이 지방에는 북방식 고인돌과 남방식 고인돌이 있고 선돌 또한 간헐적으로 발견된 것으로 보아, 신석기시대에 이미 이 지방에 많은 수의 원시인들이 유입하여 주거지가 형성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모현면 초부리에서 출토된 거푸집[鎔范]으로 미루어 이곳은 이미 서기전 31세기 전에 청동기를 제작하여 사용하거나 다른 지방에 보급할 수 있을 만큼 높은 문화수준을 향유한 강력한 집단이 거주했음을 실증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청동기시대 1,000여 년간 한반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보이고 있다. 삼한시대 마한의 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과 모수국(牟水國) 사이로 비정(比定)되며 온조왕의 위례성(慰禮城) 도읍설에 따라 처음에는 백제국(伯濟國)의 속방(屬坊)으로 있다가 뒤에 백제(百濟)의 영토가 되었다. 이때까지도 독립된 행정구역을 가지지 못했다가 475년에 고구려장수왕이 남정하여 백제 왕도(王都) 한성(漢城 : 지금의 廣州)을 점령한 뒤, 그 속방인 용인을 구성현(駒城縣)으로 명명하고 고구려 영토에 예속시킴으로써 비로소 현치가 시작되었다. 551년 백제는 신라의 진흥왕과 공동으로 북벌을 실시하여 실지(失地)였던 용인을 수복했으나 553(진흥왕 14) 신라는 백제가 수복한 한강유역을 탈취하고 한성을 중심으로 신주(新州)를 설치함으로써 용인은 다시 신라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석성(石城할미산성(豁未山城처인성(處仁城행군이토성 등은 이때를 전후하여 축성되었다. 삼국이 통일되었을 때 용인은 한주(漢州)의 속현이 되었고 현의 명칭이 거서(巨黍)로 고쳐졌다. 고려태조가 즉위한 뒤 940년 거서현을 용구현(龍駒縣)으로 고치고 광주목(廣州牧)의 임내에 두었다. 1172(명종 2)에 광주목에서 분리되어 감무(監務)가 설치되고 현령으로 보직케 하였다. 1232(고종 19) 몽골의 제2차 침입 때 적 3만 대군이 아곡리의 처인성에 이르렀을 때 승장 김윤후(金允侯)가 적장 사르타이[撒禮塔]를 사살하여 크게 물리쳤다. 기타 문화유적으로는 10세기를 전후하여 수축된 고려백자 요지(窯址)가 서리 중덕마을에 있다. 인천안목(仁天眼目)·불조삼경(佛祖三經)·불설예수시왕경(佛說豫修十王經)10여 종의 목판본을 내었던 신봉리의 서봉사장판(瑞峰寺藏板)은 특출했던 고려 인쇄문화의 일단으로 전해오고 있다. 조선 초인 1413(태종 17) 용구현과 처인현(處仁縣)이 합쳐져 용인현이라 하였다. 용인현은 수원진관(水原鎭管) 소속으로 관직은 현령, 5품으로 보하였다. 1400(정종 2)에 용인향교가 건립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조선 초기 호수는 457, 인구는 1,168인이었다. 1576(선조 9) 이계(李棨이지(李贄) 등이 충렬사(忠烈祠)를 건립하고 정몽주(鄭夢周)의 신위를 배향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라순찰사 이광(李洸)이 이끄는 근왕병 3만이 광교산에서 패했으나, 의병장 김충수(金忠守)의 청룡산(靑龍山)싸움과 원연(元埏)의 햇골싸움으로 적세를 크게 꺾었다. 병자호란 때 충청감사 정세규(鄭世䂓)는 용인의 험천(지금의 수지읍 동천리)에서 패했는데, 이 싸움에서 공주영장 최진립(崔震立)이 장렬하게 순사하였고, 용인인 이찬조(李讚祖) 등이 창의(倡義)하여 순절하였다. 이듬해인 16371월 전라병사 김준룡(金俊龍)이 광교산에 진병하여 방진(方陣)을 쌓고 적을 크게 무찔렀다. 1650(효종 1)에 심곡서원(深谷書院)이 건립되고 기묘명현 조광조(趙光祖)의 신위가 배향되었다. 갑오개혁 이후 전국 행정구역 개편 때 용인군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충청도의 양지군(陽智郡) 전역과 죽산군의 근일면(近一面근이면·근삼면·원일면(遠一面원삼면이 용인군으로 편입되었다. 이때 용인군은 12개 면으로 확정되었고 호수는 6,462, 인구는 27635인이었다. 근대인물로서 열사 이한응(李漢應)을 비롯하여 독립지사 김혁(金赫맹철호(孟哲鎬여준(呂準)과 언론인 유근(柳瑾), 어문학자 유희(柳僖), 시인 홍사용(洪思容) 등이 있다. 

1963년 고삼면이 이웃 안성군으로 편입되었으며, 1973년에는 구성면 죽전리가 수지면에, 원삼면 가좌리가 외사면에 각각 편입되는 행정구역 조정이 있었다. 1979년 용인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3년에는 수지면 하리·이의리가 수원시로, 남면 진목리·봉명리 일부가 평택군 진위면으로, 외사면 가좌리 일부가 원삼면으로 각각 편입되었다. 1985년 기흥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96년 용인군이 시로 승격되면서 외사면을 백암면으로, 내사면이 양지면으로 개칭되었고, 수지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중앙동·역삼동·유림동·동부동이 신설되는 등 행정상 많은 변화를 거쳤다. 200091일 구성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20011224일에는 수지읍이 수지출장소로 승격되었고, 이 때 풍덕천 1·2, 죽전 1·2, 동천동, 상현동의 6개 동이 신설되었다. 이로써 용인시는 1개 출장소 2개 읍 7개 면 107개 법정 리·동이 되었다. 2003년에는 상현동이 분동되어 성복동이 신설되었다. 20051031,처인구기흥구, 수지구 등 3개 구가 설치되면서 수지출장소가 수지구청으로 승격되었고, 기흥읍과 구성읍이 기흥구로, 시 동부지역이 처인구로 각각 승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77월에 기흥구에 동백동이 설치되었다. 

유물·유적  

포곡읍 가실리에 있는 호암미술관(湖巖美術館)과 기흥구 상갈동에 있는 경기도박물관, 남사면 완장리의 경기도향토사료실 등에 국보·보물급 문화재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으며, 선사시대의 유물·유적으로부터 무형문화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화재들이 보존되어 있는 지역이다. 선사시대의 유물로는 모현면 왕산리의 용인 완산리 지석묘(경기도 기념물 제22), 양지면의 용인 주북리 지석묘(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9)를 비롯하여 구성면 상하리에 북방식고인돌이 있다. 원삼면의 용인 맹리 지석묘(경기도 문화재자료 제68)와 백암면 근삼리 두 곳에는 남방식고인돌이 있다.또 용인 창리 선돌(경기도 문화재자료 제61), 원삼면 사 

그 밖에도 이동면 덕성리, 구성면 보정리 연원마을, 원삼면 창리, 남동 옥현마을 등지에서 신석기유물인 마제돌칼·돌도끼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1965년에는 모현면 초부리에서 세형동검의 제작에 사용되었던 거푸집[鎔范]3개나 출토되어 청동기 문화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관방 유적으로는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전하는 할미산성과 석성산성(일명 보개산성)이 있다. 토성지로 남사면 아곡리의 처인성(處仁城, 경기도 기념물 제44), 원삼면 맹리의 행군이토성지, 좌항리의 태봉산토성지(台峰山土城址) 등이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신봉동의 용인 서봉사지(瑞鳳寺址) 현오국사탑비(玄悟國師塔碑, 보물 제9), 원삼면 문촌리의 문수산마애보살상(文殊山磨崖菩薩像,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0) 2,를 비롯하여 기흥읍의 용인공세리오층석탑(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2), 이동면의 용인어비리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4), 백암면의 용천리오층석탑, 구성면의 마북리탑재 등 고려시대의 유물·유적이 있다. 석불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용인목신리석조여래입상(경기도 문화재자료 제62), 이동면의 천리석조여래입상 등이 있고, 고려시대의 것으로는 원삼면의 용인미평리약사여래입상(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4), 기흥읍의 공세리석조여래좌상, 이동면 묵리에 용덕사석조여래입상(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11) 등이 대표적이다. 그 밖에 조선 초기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조성한 것으로 전하는 백련암18나한상(白蓮庵十八羅漢像)이 있다. 용덕사석조여래유희좌상(龍德寺石造如來遊戱坐像)은 기림사(祇林寺)의 건칠보살상(乾漆菩薩像)과 맥락을 함께 하고 있어 주목되고 있다. 사지로는 박곡사지(朴谷寺址서봉사지(瑞峰寺址문수사지(文殊寺址)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모현면 능원리의 충렬서원(忠烈書院,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과 상현동의 심곡서원(深谷書院,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 구성면 언남리의 용인향교, 양지면 양지리의 양지향교(陽智鄕校,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3) 등이 있다. 고건축으로는 기묘명현인 조광조(趙光祖이자(李耔조광좌(趙光佐조광보(趙光輔) 등 네 선비가 모여 장수강학(藏修講學)하던 사은정(四隱亭)이 기흥읍 지곡리에, 남구만사당(南九萬祠堂)이 모현면 갈담리에, 포은사당(圃隱祠堂)이 능원리에 있고, 용인정영대가옥(龍仁鄭榮大家屋, 전통건조물 제3)과 이주국장군고택(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6)이 원삼면 문촌리에, 전음애이자고택(경기도 민속자료 제10)이 기흥읍 갈곡리에 있다. 능묘로는 고기동의 이종무장군묘(李從茂將軍墓, 경기도 기념물 제25), 모현면 능원리의 정몽주선생묘(경기도 기념물 제1)와 저현이석형묘 및 신도비(경기도 기념물 제17), 오산리의 오윤겸선생묘(吳允謙先生墓, 경기도 기념물 제104), 역북동의 채제공선생뇌문비(蔡濟恭先生誄文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6채제공선생묘(경기도 기념물 제17), 백암면 석천리의 유형원선생묘(柳馨遠先生墓, 경기도 기념물 제31), 상현동의 문정공조광조묘 및 신도비(경기도 기념물 제169), 지곡동에 음애이자묘역(경기도 기념물 제172)이 있다. 또한 구성읍 마북리의 민영환선생묘(閔永煥先生墓, 경기도 기념물 제18), 남사면 완장리의 심대장군묘(沈岱將軍墓, 경기도 기념물 제3) 등이 이곳에 있다. 이외 양지면 제인리에 공안공정옥형·충정공정응두신도비(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1), 죽전동에 문간공김세필묘역일원(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2), 기흥읍 공세리에 최유경묘역(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0) 등이 있다한편 묘현면 오산리에 쇄미록(보물 제1096), 마북동에 오명항영정병함부양무공신교서(보물 제1177), 모현면 갈담리에 남은유서분재기부남재왕지(보물 제1173) 등은 이 시의 주요 문서 유적 들이다이동면의 용인서리고려백자요지(사적 제329)와 백암면 고안리의 분청사기도요지(粉靑砂器陶窯址,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65) 등도 주요사적지로 손꼽히고 있다

무형문화재로 기흥읍 지곡리에 줄타기(중요무형문화재 제58), 보라리에 부의주(浮蟻酒, 일명 동동주,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 백암면 박곡리에 군포당정옥로주(軍浦堂井玉露酒,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12), 기흥읍 보라리에 악기장(경기도 무형문화재 제30) 등이 있다.

교육·문화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향교와 서원이 있는데, 1400년에 창건된 용인향교가 그 최초이며, 다음이 1523(중종 18)에 창건된 양지향교이다. 그리고 1576(선조 9)에 설립된 충렬서원, 1650년에 설립된 심곡서원이 등이 있다. 이 밖에 정종조에 세워졌던 한천서원은 대원군 집정시에 훼철되었다.

근대교육의 태동은 심곡서원의 명륜당에서 시작된 명륜학원으로 문정중학교의 전신이기도 하다. 1940년에 설립된 태성학원이 중등 교육기관으로서는 최초이며, 뒤를 이어 1954년에 공립학교인 용인중고등학교가 문을 열었다.

1950년대에는 문맹퇴치를 위한 야학이 있었고, 교육시설과 교육의 기회가 적었던 1960년대에는 재건학교 또는 고등공민학교 등의 명칭으로 개설된 교육운동이 자원봉사와 배우려는 열기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점도 이 고장 특색 중의 하나였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00개교, 중학교 50개교, 고등학교 30개교, 특수학교 1개교가 있으며, 단국대학교 죽전캠퍼스·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강남대학교·명지대학교 자연캠퍼스·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캠퍼스·칼빈대학교·용인대학교·루터대학교·용인송담대학교 등이 있다.교육문화시설로는 삼성그룹연수원·지적공사연수원·대한항공연수원을 비롯한 연수원이 많고,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 시설인 걸스카우트 야영장이 모현면 일산리에 있다. 문화시설로는 1965년에 설립된 군립도서관과 1950년대에 건립된 용인문화원이 있다.용인문화원은 이 고장 문화예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이 고장 유일의 문예창작집인 용구문화를 발행하는 한편, 향토문화축제인 용구문화제를 주관하고 있다.

민속

이 고장의 중요한 민속놀이로는 줄다리기(고싸움)타작노동요를 들 수 있다. 이 민속놀이들은 예로부터 우리나라 중부지방 여러 곳에서 성행하던 것으로, 줄다리기는 음력 정월대보름날 달맞이가 끝난 다음 시작되는데, 남사면 봉무리에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대략 조선 숙종 때부터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줄다리기는 우선 짚으로 줄을 꼬아 만들며, 암줄의 머리부분은 지름이 7080정도이고 수줄은 조금 작게 하며 본줄 옆에 곁줄(다림줄)을 만들어 이 줄을 잡고 당기게 한다. 암줄은 부녀자와 미혼남성이, 수줄은 기혼남성이 각각 잡고 32승으로 승부를 가름한다. 이 놀이가 시작되기 전에 농악대와 함께 줄을 메고 동리를 돌며 우물고사를 지내고 절을 하며 도는 것이 보통이다. 또한 놀이가 시작되기 3일 전부터는 외부와의 통행을 금하고 있다. 이 놀이는 마을의 액운을 막고 질병을 물리치는 등 흉사를 예방하는 데 뜻이 있다고 하며, 수줄이 이기면 쌀풍년이, 암줄이 이기면 보리풍년이 든다고 한다. 타작노동요는 예로부터 이동면 묘봉리와 백암면 석천리 등 여러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농사를 지을 때 주민들의 단합과 친목 그리고 공동작업으로 능률을 올리기 위해 가락을 맞추어 노래부르며 일하는 것이다. 특히 도리깨질이며 태질꾼·부뚜질·키질·비질 등 북소리에 맞추어 노동요를 부르며 흥겹게 타작이 진행된다. 그 밖에 재앙을 면하게 해준다는 거북놀이·서리·복조리·터줏가리 등 세시풍속이 남아 내려오고 있다. 동제는 유래가 약 200년 전으로 추정되는데, 원삼면 맹리 맹골마을에서는 뒷산인 건지산의 산신제를 매년 음력 10월중에 택일하여 밤 9시경에 지내고 있다. 산중턱의 오래된 소나무 100여 주가 있는 곳에 예로부터 제단이 마련되어 있으며, 햇곡식과 햇과일로 제물을 차리고 시루떡은 물론 소 한 마리를 통째로 바치는 등 절차가 엄격한 관례로 규제되고 있다. 특히 제관(祭官)은 생기복덕(生氣福德)에 맞는 사람으로서 상제관과 부제관을 정한다. 제물은 낮에 제단에 미리 차려놓고, 밤에 제관만 올라가서 제를 지내는 것이 특이한 것이다. 산신제가 끝나면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여 술과 고기와 떡을 나누어 먹으면서 엄숙하게 이날 하루를 보낸다. 운학동, 이동면 덕성리, 양지면 송문리에서도 각각 산신제를 지내고 있으며, 그 절차나 형식에 있어서는 모두 대동소이하다.

설화·민요

이 고장에서 전래되고 있는 전설로 생거진천사거용인(生居鎭川死居龍仁)이 있다. 이 전설은 이동면 묘봉리에서 유래된 이야기로, 이 마을의 한 젊은 남자가 산등성이에서 낮잠을 자다가 산꼭대기로부터 굴러내려온 수천 근 되는 바위에 깔려서 죽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혼령이 저승의 염라대왕에게 갔는데, 아직 천수가 다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시 이승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하지만 시신이 바윗덩이에 눌린 채 이미 흙으로 덮였으므로 접신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던 혼령은, 충청도 진천의 어느 부잣집의 죽은 지 얼마 안 된 외아들의 몸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다시 살아난 그는 진천의 아내와 함께 이동면 묘봉리의 아내도 거느려 각각 자식을 삼형제씩 두게 되었는데, 드디어 천수를 다한 그가 죽게 되자 용인과 진천의 아들들 사이에서 혼백다툼이 생기게 되었다. 이 송사를 받은 진천군수는 그가 살아서는 진천에 있었으니 죽어서는 용인으로 가라는 판결을 내려, 결국 용인의 아들들이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또 병자호란 때 끝까지 항복을 반대하여 청나라로 끌려가 처형당한 삼학사 중의 한 사람인 오달제(吳達濟)가 출생한 곳이 원삼면 학일리 고초동이라 한다. 그가 태어날 적에 마을의 초목이 모두 말라죽었다 하여 마을의 이름이 고초동(枯草洞)’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양지면 양지리의 등촌마을에는 마을과 관련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이 마을에 원님이 부임하여 올 때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 산골로 귀양보내나.”하고 통곡하며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부임하여 몇 해 지내보면, 장작불에 쌀밥을 먹을 정도로 풍부한 물산에 주민들의 인심까지 좋아서 그 원님이 다른 곳으로 부임하여 갈 때 다시 통곡하며 떠난다고 하여, 이 마을을 들통곡 날통곡이라 하기도 하였다 한다. 이 밖에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언청이미륵의 전설, 힘내기를 하여 목숨을 잃은 남매의 이야기인 석성(石城)의 전설, 경기도 일대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이완대장이야기·달래내고개전설등이 이 고장에도 전승되고 있다. 이 고장에 구비전승되는 민요는 노동요, 그 중에도 논매기소리가 주종을 이루고 있고, 그 다음으로 애정요와 타령요 등이 많다. 이 지방의 향토색이 짙은 노래로는 찍었네타령(논매기소리)을 비롯하여 꼴노래·지게동발·둘레타령·홀아비소리(애정요) 등을 들 수가 있다. 그 중 찍었네타령의 일부를 소개하면 ……/ 오조를 갈고 움머쇠야/ 어하어흠차 찍었네(후렴)/ 움머리는 웃머새야/ 청차조 심어 움머새야/ 새야새야 앉지 말아/ 커다란 처녀 몸닳는구나/ 새야새야 앉지 말아/ 커다란 처녀 울고 앉았네/ 우워내혀/…….”와 같다. 이것은 호미로 논매는 시늉을 어하 어흠차 찍었네라고 하여 후렴으로 부르고 있다. 가사는 연정을 제재로 하여 힘든 것을 잊고 빨리 일을 마치어 음식을 먹으며 놀자는 내용이며, 가락은 단조로우나 장단은 일의 속도에 따라 변화된다. 그리고 홀아비소리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무엇을 믿고 잠이 오나/ 반겨줄 이 하나 없고/ 신부 생각에 잠 못 이뤄/ 새벽서리 찬 바람에/ 울고 가는 저 기럭아/ 너도 나와 짝을 잃어/ 울고 가는 게로구나.”이 노래는 잠 못 이루는 홀아비의 심정을 소박하게 잘 표현하고 있는 희귀한 노래이다. 그리고 지게동발은 나무꾼이 지게목발을 두들기면서 부르는 노래로, 지게 지는 신세에 대한 넋두리가 내용이다. 가락은 흥겨운 창부가락이지만 가사는 매우 애상적이다. 꼴노래도 신세를 한탄하는 내용은 비슷하나 문답형식인 점이 다르다.

산업·교통

전 토지의 53%가 임야이고 농경지는 전체토지의 22%, 대지 5%, 하천 2.3%, 도로 3.0%이다. 주요 저수지는 이동저수지·기흥저수지·송전저수지·지곡저수지 등이 있어 주변의 농경지에 관개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경지 중 논은 5,065ha, 밭은 3,340ha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 이외에 밭작물로 배추··고추·오이·호박·수박·마늘··시금치, 과실류로 사과, 특용작물로 인삼이 있다. 옛날에는 연근·면화 등이 생산되었으나 최근에는 용삼이 일부 농가에서 생산되고 있다. 대도시에 인접하고 대도시와의 접근성이 높아 목장·화훼단지·수목원이 발달하고 있다. 산지가 많은 이곳은 밤·도토리·은행·대추·호두 그리고 표고버섯 등이 생산된다. 농가인구는 1980년에는 전체인구의 1/2에 이르렀으나 1995년에는 15.7%38269, 2008년에는 전체인구의 3.3%27222명으로 감소하였다. 제조업 인구는 수도권 공장의 지방분산정책과 경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의 개통으로 많은 생산업체들이 기흥공업단지를 비롯해 용인 등지에 건설되면서 제조업인구가 급격히 늘었다. 2008년 현재 제조업 인구는 전체 인구의 5.1%이다. 주요 광산물로 고령토·장석 등이 생산되고, 제조업으로 조립금속업·화학공업·종이인쇄업·섬유공업·식료품공업 등이 발달하였다. 상업시설로 용인시내와 백암면에 정기시장이 열리고 용인에는 상설시장·연쇄점 등이 있어 주민에게 생활필수품이 원활히 공급된다. 그리고 경기도에서 금융기관이 가장 많은 지역 중의 하나이다. 2개의 고속도로와 4개의 국도가 지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며, 도로는 경부고속도로가 서북쪽에서 남북으로 지나고 영동고속도로가 신갈에서 동서로 지나고 있다. 국도 45호선이 군의 중심부를 남북으로 지나고 국도 42호선이 군의 중심부를 동서로 지나고 있다. 국도 43호선은 동북단을 서남동북방향으로 지나 북상하고 국도 17호선이 양지면에서 국도 42호선과 분기하여 동남진하고 있다. 철도는 수려선(수원여주)이 지나고 있었으나 1972년 영동고속도로의 개설로 철거되었다. 용인 에버랜드유원지·콘도·골프장 등 위락시설이 입지하고 있어 주말에는 통행량이 많아 교통 혼잡이 심하다. 1994년부터 개통을 시작한 분당선의 죽전~상갈 구간이 용인시를 지나고 있으며, 2016년 신분당선의 정자~광교 구간이 개통하면서 동천~상현 구간이 용인시를 지나게 되었다. 또한, 용인경전철이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관광

용인에는 한국민속촌·에버랜드 내에 호암미술관이 있으며, 경기도박물관·절터··석탑·향교 등이 있어 문화 역사의 고장으로 경기지역 최대의 관광지이다. 특히, 동양 최대의 사립박물관 겸 미술관을 비롯한 향토사료관·상업사박물관·등잔박물관 등도 있어 조상의 숨결과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관광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겨울이면 즐기는 스키장 및 눈썰매장이 여러개나 있어 겨울 관광명소가 되고 있으며, 곳곳에 골프장 20개소가 있어 골프장을 찾는 사람이 많다. 그 외의 주변 관광지로서는 수지읍 상현리의 심곡서원, 고기리의 이종무장군묘, 모현면 능원리의 충열서원·정몽주묘, 왕산리의 모현지석묘, 원삼면 문촌리의 문수사절터, 남사면 아곡리의 처인성터, 양지면 양지리의 양지향교, 주북리의 북방식 지석묘, 남사면 창리에 선돌, 원삼면 옥신리의 석조여래입상, 구성면 언남리의 용인향교, 고안리의 분청사기그릇굽던터, 마북리의 민영환묘 등이 있다. 특히 역사에 남은 인물들의 묘가 많아 관광지로 유명해졌다. 예로부터 용인을 가리켜서 살아서는 진천이오 죽어서는 용인이라 할 만큼 좋은 묘자리가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것과 같은 지형을 이루고 있어 주변의 안성·이천·수원·평택·화성·광주·성남과 경계를 이루며 고개가 많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 대표적인 고개는 무푸레고개·정수리고개·박석고개·대지고개 등이다. 이와 같이 산과 평지의 높낮이가 심한 고장이라서 일찍부터 수렵과 농경이 가능했던 지역이다. 특히, 전국에서 유일한 고려시대의 백자도요지가 서리 중턱마을에 신비스러움을 품고 있어 관광명소로 기대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