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및 전설

남명 조식(南冥 曺植)

꼴통 도요새 2019. 8. 4.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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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조식(南冥 曺植)

위치: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


조선 중기 학자 남명 조식(南冥 曺植)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15011572)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199552일 경상남도의 기념물 제148호 남명조식선생 생가지로 지정되었다가, 201812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조식은 경상좌도의 대학자 이황과 같은 시대에 살면서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그와 쌍벽을 이루었다. 저서로 남명학기유편, 남명집등이 있으며 특히 의()와 경()을 존중하고 아는 것을 실천하는 선비정신을 강조하였다. 조식이 죽은 20년 뒤인 선조 25(1592) 임진왜란 때에는 제자들인 정인홍·곽재우 등 10여명이 의병을 모아 선생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였다고 한다.

 

157228, 남명 조식(南冥 曺植) 선생은 문병 온 제자들에게 창문을 열게 했다. 그런 다음 벽에 써둔 敬義(경의)’ 두 글자를 가리키면서 이 두 글자는 학자에게 지극히 절실하고 중요하다. 요점은 이 공부를 익숙히 하는 데 있다. 익숙하면 흉중에 하나의 사물도 없게 된다. 나는 아직 이 경계에 이르지 못하고 죽는다.” 라며 숨을 거두었다.

임금도 꾸짖은 선비 정신 

선생의 바람을 담은 천석종과 달리 신도비는 가볍다. 옮기는 과정이 시류에 휩쓸렸다. 단성사직소를 옮겨 새긴 비석으로 걸음을 옮겨 찬찬히 읽었다. 

“~ 전하, 나랏일은 이미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없어졌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나버렸고 민심도 이미 돌아섰습니다. 큰 고목이 100년 동안 벌레 속이 패어 그 진이 다 말라버려 언제 폭풍우를 만나 쓰러질지 모르는 지경에 이른지 이미 오래입니다. ~ 낮은 벼슬아치는 아랫자리에서 시시덕거리며 술과 여색에 빠져 있고 높은 벼슬아치는 윗자리에서 빈둥거리며 뇌물을 받아 재물 불리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오장육부가 썩어 배가 아픈 것처럼 온 나라의 형세가 안으로 곪을 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한 사람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 대비(문정왕후)께서는 신실하고 뜻이 깊다 하나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는 아직 어리시니 다만 돌아가신 임금님의 한 고아에 불과합니다. 백 가지 천 가지로 내리는 하늘의 재앙을 어떻게 감당하며 억만 갈래로 흩어진 민심을 어떻게 수습하시렵니까. ~ 임금으로서의 원칙을 세우십시오. 임금에게 원칙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됩니다.”

 

명종은 자신을 한 고아에 불과하고 어머니인 문정왕후를 구중궁궐의 한 과부라고 한 내용에 격분했다. 결국, 언로를 막을 수 없다는 신하들의 만류에 명종은 벌을 줄 수 없었다.

 

남명 조식 선생은 72세 되던 1572년 정 월, 병문안을 온 제자 동강 김우옹이 만약 돌아가신다면 마땅히 무엇으로 칭해야합니까?”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벼슬하지 않고 숨어 사는 선비를 뜻하는 처사로 불리길 원했던 선생의 바람과 달리 묘에는 징사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문정공 남명 조선생지묘(徵士贈大匡輔國崇錄大夫議政府領議政文貞公南冥曺之墓)’라고 적혀 있다.

선생의 부음이 조정에 알려지자, 선조(宣祖)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사간원 대사헌(司諫院大司諫)에 증직했다. 광해군 7(1615)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경영연홍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兼 領經筵弘文館 藝文館 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로 추증되고, ‘文貞이란 시호를 받았다.[출처/ 해찬솔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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