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기도

여주 풀목산, 소달산

꼴통 도요새 2019. 9. 24.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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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풀목산, 소달산

1. 산행지: 풀목산(385.8m), 소달산(357m)

2. 위치: 경기 여주시 북내면 중암리 

 

6. 이동거리 및 소요시간: 11.2km/ 5시간

7. 들머리/ 날머리: 도전리 고개/ 북내초교

8. 산행코스: 도전리고개풀목산소목산북내초교

9. 특징:

여주 봄, 가을 입산 통제

봄철은 21일부터 515일까지, 가을철은 111일부터 1215일까지 산불조심기간 중 산불관리등급별로 입산통제 및 등산로를 폐쇄하기로 했다. 입산통제는 1단계(관심,A등급 통제), 2단계(주의,AB등급 통제), 3단계(경계,ABC등급 통제), 4단계(심각, ABCD등급 통제)로 되어 있고 등산로 폐쇄도 입산통제와 같은 단계를 거쳐 관리된다. 여주지역 입산통제구역 A등급에는 오갑산, 원적산, 천덕봉, 봉미산, 당산, 대렴산 등 6개소이며, B등급에는 양자산, 신통산, 강금산, 소무산, 연하산, 대포산, 철갑산 등 7개소다. , C등급에는 북성산, 황학산, 마감산, 보금산, 우두산, 삿갓봉, 남산, 싸리산, 파사산 등 9개소이고, D등급에는 연하산, 원통산, 고래산, 소달산 8개소가 지정됐다. 등산로 관리를 위해 마감산(E등급), 북성산(D등급), 오갑산(B등급), 대렴산(B등급), 양자산(B등급), 우두산(B등급), 대명산(E등급), 대포산(B등급), 연하산(B등급), 소달산(B등급) 등이 지정됐다

소달산 흥왕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고려 초 소달(蘇達)이 창건했다고도 하고, 고려 말 혜근(惠勤:13511374)이 세웠다고도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창건설화에 따르면 옛날에 고달(高達)과 소달이라는 형제가 살았는데, 형인 고달이 고달사를 짓고 아우 소달은 흥왕사를 지었다고 한다. 창건 후부터 조선 후기까지의 연혁은 전하는 바가 없고 단지 1893(고종 30)까지 상왕사(霜旺寺)라 불렸다는 말이 전할 뿐이다. 1905년 폐사에 가까웠던 것을 돈묵(頓默)이 중건한 뒤 1922년 성묵(性默)이 법당을 중수하고, 1932년 윤익(潤益)이 대방(大房:현 서래암)을 중수하였다. 이후 1933년과 1938년에 각각 동서 요사를 지었다. 현존하는 건물은 극락전과 칠성각·서래암·요사채 2동이 있고, 유물로는 여러 점의 탱화가 전한다. 탱화 중 아미타후불탱화와 아미타탱화·신중탱화(2독성탱화는 1892년에 제작된 것이며, 현왕탱화·산신탱화·칠성탱화는 1905년에 돈묵이 중건하면서 모신 것이다. 흥왕사는 신륵사 하구로 흘러 내리는 금당천과 중암리를 가로 질러 흐르는 완장천 사이에 자리한 고려시대 사찰로 나지막한 야산에 그 터를 잡고 있다. 여주시내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지만, 흥왕사를 찾아 가는 길은 풍요로운 시골마을의 전경과 전원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정겹고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흥왕사는 여주의 명찰 고달사와는 형제와 같은 절로 그 옛날 소달과 고달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고달과 소달은 형제지간으로 각기 뜻을 품어 부처님 전에 그 몸을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다. 하지만 각기 뜻을 품은 바가 달라 고달은 국가에 도움을 주는 절을 세웠으며, 소달은 사찰을 진리의 도량으로 생각하며 오래도록 중생을 교화하는 절을 세웠다. 한때 고달이 세운 고달사는 고려의 명문사찰로 명성을 떨쳤지만 일찍히 폐사되었고, 소달이 세운 상왕사는 조용히 은둔하며 그 법을 이어나가 아직도 법등을 이어오고 있다. 이처럼 소달산 흥왕사는 자그마한 암자의 모습으로 중생을 교화하고자하는 진리의 도량 모습을 품고 있다. 극락전과 삼성각이 사찰 가람의 전부인 흥왕사지만 따뜻하게 가람을 품은 소달산의 지세와 사찰의 수호신장처럼 사찰을 수호하는 보호수의 모습은 현재 폐허가 된 고달사의 쓸쓸함 보다 우리에게 정겨운 모습은 아닐까 생각한다.

북내면의 지명 유래

여주군 19면의 하나로 면을 중심으로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금당천을 사이에 두고 서쪽과 동쪽이 각기 행정구역이 달라 서쪽은 백제 온조왕 13(서기전 6)에 백제의 도읍을 위례성에서 남한산성으로 옮길무렵에는 백제땅에 속하다가 신라가 백제를 멸하고 나서 지금의 광주지역을 한산주로 고칠 때에는 신라의 영역에 들어 있었다.그후 고려 태조 24(941)에는 광주땅에 속하였다가 고려 현종 9년에 원주로 편입되었다. 1257년 현재의 여주를 영의(永義)라고 칭할 때에는 금당천 동쪽은 원주지역이고 서쪽은 영의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1699년 강희 기묘(己卯)지도를 보면 북면의 경계는 동쪽은 금당천이요.

근당천을 건너면 원주이고 북쪽은 상동면 (현양동) 서쪽은 등신면의 구현동과 재가동의 경계요. 남쪽은 한수(漢水)가 경계로 되어있다. 당시 리명은 배()(현 학동강변) 오천(烏川)(보뜰말, 대수리). 오금동(五今), 고달(高達)(상교, 주암, 외룡, 내룡), ()(소지게) 구남(九南)(당우, 신남)6개리에 3981822명이 살았다고 하였다. 한편 금당천 동쪽은 원주 서면으로 지금의 강천면 지역과 북내면의 하천 동쪽 전부를 합한 지명으로 1800년초에 서면은 분할하여 강천면을 떼어내고 나머지는 지내면으로 했다가 다시 내면으로 고쳐 그대로 원주에 속했고, 당시 리는 8개동이었다. 그러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북면과 원주내면을 병합하여 북내면이 되었고, 리는 19개리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金堂川(金塘川)

河川原流는 양평군 지제면 茂旺里 모라치고개 南谷에서 시작되어 日新里를 경유하여 관내에 북내면 주암리 서원리 사이와 석우리 내룡리, 외룡리, 당우리, 신남리, 천송리 등을 경유하여 신륵사 동쪽 한강에 합류하는 하천이다. 이 하천 변에 당우리 들과 청수들을 이룩하여 북내면에 농업요지를 이룬다.

      

1절 당우리(堂隅里)

당우리- 본래 여주군 북면의 지역으로서 서낭당이 있는 모퉁이가 되므로 당모루, 당머루, 또는 당우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모냉이를 병합하여 당우리라 한다. 북내면의 중심지가 되어 면사무소, 경찰지서, 우체국, 초등학교, 중 고등학교 시장 등이 있다. 자연부락으로는 당모루, 모냉이 등이 있다.

금당교 (구전자:군지참조)- 금당교 (북내교):다리 당모루 동쪽 금당천에 있는 다리

당우리와 신접리의 연결다리

당머루- 당머루(당우리. 당모루, 당우): 마을 , 당우리 참조

※① (산 의뜻)+모루(모퉁이), ()+모루(모퉁이)

당모루- 당모루(당우리, 당머루, 당우):마을 당머루 참조

당우- 당우(당우리, 당머루, 당모루):마을 당우리 참조

당우시장- 당우시장:, 당우리에 있는 시장. 1958년부터 섬(현재는 없어졌음)

모냉이- 모냉이 (모양): 마을 당모루 북쪽에 있는 마을

모랭이= ()의뜻이 = 모냉이로 변음

모양-모양(모냉이);마을 모냉이 참조

모냉이들 (구전자:최철국 73)- 모냉이 남쪽에 있는 들

북내교 (구전자:군지참조) 금당교 참조

새보들 (구전자:최철국 73)- 당우리 남쪽에 있는 들 새로된 보가 있음.

왜정때 수리조합보를 조성하고 사용하였던 들

새재 (구전자:군지참조)- 당우리에 있는 고개 ()+()

새재(구전자:군지참조)- 새재밑에 있는 골짜기

새터말(구전자:군지참조)- 당우리에 새로 생긴 마을

생겨골 (구전자:최철국 73)- 당우리에 있는 골짜기

소나무숲 (구전자:군지참조)- 당우리에 있는 소나무 숲

새보인()들 금당천 뚝방에 형성된 송림(松林)

속게 (구전자:최철국 73)- 당우리 북쪽에 있는 들

옛날에 어떤 주물을 만들던 장()이 있었던 곳이라하여 붙여진 이름 용()

     

2절 신남리(新南里) 

신남리 (구전자:김노식 38)- 본래 여주군 북면 구남동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양동과 구남동을 병합하여 신남리라 한다. 자연부락으로는 구남, 생이, 주막거리 등이 있다.

가산 모롱이 (구전자:군지 참조)- 신남리 오학리와 통하는 지방도에 접해 있는 마을

()+()+모롱이()

구남 (구전자:김노식 38)- 구한말 김씨 씨족들이 대성으로 살았는데 그중 김교익의 자손이 남자로만 아홉 명을 낳아서 길렀기 때문에 구남으로 불리었다.

구남이라고 한자로 쓰면서 구남(九南), 구남(九男), 구남(丘南), 등 여러 가지로 쓰고 있는데 옛 문헌이나 족보들의 묘지를 쓸 때 구남(丘南)으로 쓴 곳이 많고 김씨(金氏)들 족보에는 구남(九男)이라고 쓰고 있다. 옛 읍지들은 구남(丘男)이 많다. 당우리에서 볼 때는 산 너머 남쪽의 마을이다.

(언덕)+넘어(옛말은 남이 ) (언덕 너머 마을)

구남동 구남 참조

도장골 들(구전자:김재석 70)- 생이 앞에 있는 들

도장(導掌)을 옛날 관제(官制)에 세곡이너 도저를 받아 나라에 바치는 일을 맡은 관리를 칭하는 말이다.

등잔박골- 생이 서쪽에 있는 골짜기

등잔(긴등)+()+()(긴등 바깥 골짜기)

버삽고개- 버삽고개(버시고개, 보습고개) 버섯고개 참조

버시고개 보습고개 참조

보습고개- 생이 서쪽에서 오학리 구억말로 넘어가는 고개

고개길이 쟁기의 모습과 같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

분토골(粉土谷) (구전자:군지참조)- 신남리에 있는 골짜기로 분토가 났었다.

산신당 (구전자:김재석 70)- 3년마다 11월 초순에 마을의 안녕을 위하여 제사를 지냄 고려시대부터 전해 내려옴.

생이 남쪽 산기슭에 있음.

생이(신양동)- 옛날에 큰 홍수가 질 때 마을 앞 금당천이 범람하였다고 하는데, 이때 이 마을에도 큰 시내가 생긴 이후로 새우가 많이 모여서 생이로 불리움. (김노식 남 38) 옛날에 어느 선비가 좀 먼 동네를 갔다 오는데 날이 샜다하여 생이라 함.(김재덕 70)

()+()+()

(새로 생긴 양지마을의 뜻)

신양동 생이 참조

샘골- 천곡 참조

생겨골- 구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생골- 신남리에 있는 골짜기. 샘이 있음.

생이골- 생골 참조

생이고개- 생이 골에 있는 고개

생이 앞들- 생이 남쪽에 있는 들

신남교 (구전자:군지참조)- 신남리에 있는 다리

안산(案山) (구전자:김재석 70)- 구남 앞에 있는 산

안산들 (구전자:김재석 70)- 구남앞에 있는 들

웃구남 (구전자:군지참조)- 구남의 윗마을

주막거리 (구전자:김노식외 238)-옛부터 이 마을에는 주막이 있어 오가는 길손의 편의을 보아 주었다고 하는데 언제부터인지 주막거리로 불리우게 되었다.

주막거리들 (구전자:김재석 70)- 주막거리 앞에 있는 들

천곡- 구남에서 오금리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골짜기

호랑이굴- 봉미산에서 산신당으로 내려오는 길목에 있는 굴로서 산신당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자 호랑이굴 입구에 호랑이가 돼지머리를 갖다 놓아 마을 사람들이 그 이후로 산신당의 제사를 지냄.

    

3절 외룡리(外龍里 

외룡리 (구전자:이상헌 65)- 본래 여주군 북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용머리, 연마루, 내촌동, 담터를 병합하여 외룡리라 하였다.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주위의 산봉우리가 용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용모양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외룡리라 하였다 한다. 자연부락으로는 안(바깥) 용머리, 담터, 연마루가 있다.

개너구리- 연마루 동쪽에 있는 마을

금계동- 용머리 남쪽에 있는 마을

()+()=따로 떨어져 있는 마을

내촌동- 안말, 안용머리, 용두머리 안쪽의 마을을 안용머리 바깥쪽을 바깥용머리 라함

또는 안말 바깥말 이라 함.

담터 금계동 참조

댕알고개- 외룡리에서 대신면 하림리로 넘어가는 고개

댕알산- 외룡리 서북방에 위치함.

도리들 (구전자:군지참조)- 외룡리에 있는 들 ()+()=도래= 도리

돌터개울- 외룡리에 있는 내

(溝渠)+()+개울 (小川) (터앞을 흐르는 작은 도랑개울)

등지골- 등지고개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골짜기

()+()+()

바깥용머리 (구전자:이상헌 65)- 용머리 마을 중에 용두뿌리 바깥마을

버덩땀 (구전자:군지참조)- 댕알산 밑 버덩에 있는 마을 버덩은 거친들()의 뜻임.

비렁뱅이 고개- 외룡리에 있는 고개

비렁뱅이. 배랑뱅이는 걸인을 낮춰 부르는 말로 이 지방의 속어(俗語).

선바위- 외룡리에 서 있는 바위

아랫마을- 안말 아래쪽의 마을

안땀- 담터 부락중에 안쪽의 마을

안말 (구전자:이상헌 65)- 안용머리, 내촌동 내촌동 참조

용두뿌리 (구전자:이상헌65) 안용머리와 바깥용머리 사이로 흘러내린 산줄기 끝부분

연마루- 연현동, 외룡리, 서쪽 끝부분 산중에 들어있는 마을

()은 본래 필구중에 벼루를 뜻하는데 벼루는 벼루돌이 아닌 벼랑의 옛말이 벼루다. 이것을 (벼랑) 한자로 고쳐쓰면서 발음이 같은 벼루돌()자를 붙혀 지명을 만들었다.

(벼랑)+마루(꼭대기, 산마루)=연마루

(즉 벼랑(된비탈)위에 있는 마을의 뜻임)

연마루고개- 연마루에서 대신면 하림리 미륵으로 넘어가는 고개

연현동 연마루 참조

외룡교(구전자:군지참조)- 여주, 양동간 지방도로중 외룡리 담터에 있는 작은 다리

용두동 용머리 참조

용머리- 외룡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마을 중심을 관통한 산줄기의 끝부분을 용의 머리란 뜻(龍頭)에서 그 주위에 집단 형성된 부락을 통칭하여 부르는 명칭이며 용머리부락중에 용두뿌리 안쪽()을 안용머리 바깥()쪽을 바깥용머리라고 부름.

웃땀- 안말(안용머리) 마을 중에 위쪽의 마을

원골- 외룡리에 있는 골짜기

장자봉 (구전자:이상헌 65)-외룡리에 있는 산

장자란(臣當, 부자와 같은 뜻으로 속어(俗語)며 이산이 부자집 노적(제물)을 쌓은 형국이라하여 붙여진 이름.)

중룡교 (구전자:군지참조)- 용머리 앞에 있는 다리

중보들 - 외룡리에 있는 들로 보()가 있음

황새바위- 외룡리에 있는 바위로 황새처럼 생겼음.

    

제4절 내룡리(內龍里 

내룡리 (구전자:신동억 50)- 본래 여주군 북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용산동 , 벌말, 산양말을 병합하여 내룡리라 하였다. 내룡리의 유래는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주위의 산봉우리가 용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용모양 안쪽에 위치하였다는데 있다. 자연부락으로는 용산말, 벌말 등이 있다.

구석말 (구전자:이상헌 65)- 내룡리 끝에 있는 마을로 산의 경지가 가파른 곳에 위치함.

굿배미- 구석말 남쪽에 있는 마을

()+()+배미()=구웃배미=굿배미(옛 윗배미논)

너르석 바위(구전자:군지참조)- 내룡리에 있는 바위

너르석이란 편편하고 넓은 바위란 뜻임.

도룡골 (구전자:이상헌 65)- 상교리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들

도룡리란 산줄기가 그 근원 도산을 향하여 다시 도라 향한 것을 말한(廻龍)으로 희룡 안쪽의 들이란 뜻.

독사고개-독사들 위에 있는 고개로 용혈을 끊어 놓음.

독사들- 평촌 서쪽에 위치한 들

뒷뫼(구전자:군지 참조)- 용산말 뒤에 있는 산 뫼는 산을 말함

등지고개- 내룡리 외룡리 상교리 경계에 위치함.

()+()+고개=등치고개=등지고개=뒷고개라는 뜻으로 이것은 외룡리 쪽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벌말 평촌 참조 벌(버덩)+(마을)=벌말=버덩말 또는 들말

산양말 양지말 참조 산()+(陽地)+마을

살구골(구전자:이상헌 65)- 독사고개 서쪽에 있는 산골짜기로 살구나무가 있었다 함.

살은 살피라고 하며 경계를 뜻하는 것이고, 구는 구역의 뜻으로 경계지점의 뜻으로도 쓰임.

상자골- 내룡리에 있는 골짜기 상좌(上座)의 변천

.서낭댕이 고개(구전자: 군지 참조)-내룡리에 있는 고개로 서낭당이 있었음.

촌락을 출입하는 경계 언덕이나 산모퉁이에 있는 것으로 행주산성 싸움에 유래하여 유사시에 돌팔매에 적당한 작은 돌을 오고 갈때마다 한개씩 던져 축석한 곳으로 훗날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송골 - 내룡리에 있는 골짜기 속골 또는 솔()

쌍내들 (구전자:이상헌 65)- 용산말 앞에 있는 들로 곡창지대임.

금당천과 고달천 사이에 있기 때문에 쌍내들이라 함.(雙川)

아랫말 (구전자:군지 참조)- 용산말 아래쪽에 있는 마을

양지말 (구전자:이상헌 65)- 산양말, 굿배미 남쪽에 있는 마을

용산- 용산동, 용산말 용산말 참조

용산동 용산말 참조

용산말 (구전자:신동역 50, 이상헌 65)

1. 용의 형상을 하고 있는 봉우리의 양지쪽에 위치하였다하여 용산말로 불림.

2. 용산 밑에 있기 때문에 용산말이라 불림

()은 산줄기를 말함 또는 주산(主山)을 싸고 있는 산을 지칭하는 경우가 더 많음.

윗상자골 (구전자:이상헌 65)- 상자골 위에 있는 골짜기

중간말 (구전자:군지참조)- 벌말 남쪽에 있는 마을로 벌말과 용산중간이 됨.

간촌(間村) 중촌(中村) 새땀 새말과 같은 뜻

평촌 (구전자:신동억 50)- 넓은 들 복판에 있다하여 평촌 또는 벌말 이라 하였다.

(평촌(坪村))

 

5절 상교리(上橋里 

상교리 (구전자:안남희41)-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상고동과 교향동을 병합하여 상교리라 하였다. 자연부락으로는 다리목, 점말, 고달, 증골등이 있다.

가마골 (구전자:이문재외353)- 점말에서 국사령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보쌈을 하여 대신면으로 가는 도중에 쉬었던 곳임.

현재는 민가가 없다하나 감골(큰 마을)이 가마골로 변한 곳이 많다.

(숯가마, 옹기가마 등 있었던 곳은 대개 골자를 넣지 않고 터자를 넣게 된다. 그러나 이곳은 점말 주위에 있기 때문에 가마터가 있던 곳일지도 모른다.)

고달 (구전자:안남희 42) 절터골, 상고동(上高洞)

마을에 고달사라는 절이 있어 고달이라고 불리었으나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고 당시의 웅장한 사찰면모를 알려주는 사지(寺地)의 주초석, 석불좌대, 부도탑,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고달사터 (구전자:군지참조)-절터 골에 있는 고달사의 터.

신라 재35대 경덕왕23(764에 창건하였는데 고려 제4대 광종26(975)에 새운 보물 제6호 원종대사 혜진탑비 귀부, 보물 제7호 원종대사 혜진탑, 보물 제8호 석불대좌와 국보 제4호 부도가 있음.

고달사비 대석(구전자:군지참조) 고달사비 받침 참조

고달사비받침- 고달사 터에 있는 비의받침

어느 비의 받침인지 알 수 없으나 그 거북 받침은 아주 정교한데 위쪽으로 한곳이 깨진 것이 몹시 아까움.

고암 북바위 참조

교향동- 다리목 , 교향동 다리목 참조

교향동 다리목 참조

국사령 고개(國師嶺)- 절터골에서 지제면 곡수리로 넘어가는 높은 고개

※①왕사(王師), 국사(國師)가 너머다닌 고개 하여 불러지는 명칭

사리는 고불고불한 형태의 지명이 많은데 사리 앞에 다른 자가 더 붙어 있을 때는 싸리로 변하는 경우가 많다. 국은 굽이나 곱이 고비로 변음된 경우가 있어 굽사리 곱싸리 등이 대개 산이 협하여 오르내리는 길이 심하게 꼬불꼬불한 길인 경우들이다. 간혹 절터가 있던 근처의 고개면 한자로 쓰면서 국사(國師)라고 썼다.

국사령 국사리 고개 참조

상교리 서북 양평과 경계에 위치한 높은 산

기차바위 (구전자:이문재외 353)- 산의 형태가 기차모양으로 생겨서 기차바위로 불리움.

느느실(구전자:군지참조)- 상교리에 있는 골짜기

늘어난 (확장한)의 뜻이 많아 농지를 개간하여 면적이 늘었거나 마을은 민가가 늘었거나한 지명에 많이 붙여지는 곳으로 너더리, 느르실, 누르미, 느르재 등의 지명과 공통한다.

산이나 골짜기나 늘어졌거나 넓어진 경우도 있다.

다리목(橋項洞, 橋香洞) (구전자:안남희 41, 송종석외360) 마을 입구에 위치한 곳으로 인간의 다리목에 해당된다해서 다리목이라 하였다. (안남희남41) 소소한 돌다리가 여러 개 있어서 다리목 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송정석 외3인 남 60)

(=)+()+(목쟁이)

산능선 자락이 늘어진 끝에서 골짜기로 들어가는 목쟁이의 뜻일 경우도 있다.

둥지봉(구전자:이문재외 353)- 상교리에 있는 산

둔지(屯地)가 변음 하여 둥지로 됨. (높은 산에 언덕진 부분)

매봉- 상교리에 있는 산

매화나 매()와 관계없이 뫼사 매(+()=산봉우리란 뜻

병방모- 내룡리와 상교리의 경계상에 있음. 상교리를 방위하는 곳

부두골- 상교리에 있는 골짜기 비탈골

북바위 (구전자:이문재 53)- 고달사터 동쪽에 있는 바위로 이곳에서 북을 올렸기 때문에 북바위라 함.

마을에서는 북()처럼 생겨서 북바위라고 하는데 이산의 바위들은 그 색이 검지 않고 붉다. ()이 붓, 북으로 변한 경우가 많다, 붉은 바위란 뜻 같다.

북바위산 (구전자:군지참조)- 북바위가 있는 산

빈대바위- 고달사터 서쪽에 있는 바위

뻥치고개 (구전자:군지참조, 이문재 53)-뺑치산에 있는 고개

옛날에 과부를 보쌈하여 도망가던 고개라서 뺑치고개라 함. (이문재53)

뺑은 쑥을 말한다. 쑥대, 뺑대, ()+(고개)+고개

뺑치산 (구전자:군지참조)- 상교리에 있는 산

사기골- 고달사터 남쪽에 있는 산골짜기

사기(寺基), 사기(沙器)등의 뜻으로 많이 쓰임. 더러는 사이()의 뜻도 있음.

산신당- 장바위 밑에 있는 신당, 고려 제4대 광종때 원종대사가 고달사에 있게되니. 전국의 승려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배웠는데 그 중 한사람이 여주목사에게 고달사의 여자신도 하나가 세 정승을 낳을 상인데 그 배필이 이미 정해져 있더라고 말하니, 목사가 며느리를 삼을 욕심이 생겨서 그 방책을 강구한 끝에 중의 말을 듣고 진잠 바위에서 난 장사 아이를 죽였더니, 그 여자 신도가 달려가 장사의 시체를 안고 함께 죽었는데 원종대사가 이 광경을 보고 한탄하기를 이 장사아이를 잘 길러서 나라를 위하여 크게 쓰려고 하였더니 이제 허사로다하고 수리바위에서 술을 빚고 징바위에서 징을 쳐서 장사아이의 명복을 빌고 난 뒤 여러 승려들에게 나는 이제 이곳을 떠날 때가 되었으니 고달사에서 해마다 장사아이의 명복을 빌어 달라부탁하고 돌아갔는데 그 후부터 절이 어지러워지더니, 화적떼가 닥쳐 모두 약탈해 가서 승려들이 굶어 죽게 되니 한 늙은 스님이 나타나 사기골에 깊이 묻혀 있는 흰 흙을 가르쳐 주어서 잠시 허기를 면했으나 결국은 폐사가 되고, 마을 사람들이 장사터(징바위)밑에 사당을 짓고, 해마다 정성을 드려 제사를 지내며 또는 포수가 사냥할 때에도 꼭 이 신당에 빌어야 한다고 함. 현재는 나무만 있음.

상고동-고달, 절터골, 고달참조 상고동(上高洞)=웃고달

새절재 (구전자:이문재외 353)- 상교리에 있는 산으로 주춧돌과 탑기단부가 남아있음.

고달사후에 창건되었던 상원사지(上院寺地) 뒷고개

수리바위 (구전자:군지참조)- 점말 동쪽에 있는 바위. 산신당 참조

수리란 세 종류의 수리 또는 술() () 수레() 등의 한자로 기재되는 곳이 많으나 수리의 본뜻은 높은 꼭대기(정상:정수리)의 뜻이 담겨 있는 곳이 많다.

신털이봉- 고달 앞들에 있는 작은 산으로 고달사 승려들이 시주를 마치고 돌아올 때 신에 묻은 흙을 턴 것이라 함.

쌀기골 사기골 참조

영통산 (구전자:이문재외 753)- 다리목 북쪽에 위치한 산 (靈通寺가 있던 산)

원종대사 혜진탑(구전자:군지참조)-고달사 터에 있는 것으로 탑몸에 거북, , 구름 연꽃과 사천왕의 상을 새겼는데 보물 제 7호로 지정됨.

원종대사 혜진 탑비 기부 및 이수- 고달사터에 있는 원종대사혜진비의 받침, 높이 0.91, 길이 3.21, 이수의 높이1.09, 너비2.33, 대사의 존칭은 찬유 성은 김씨인데 신라 제 48 경문왕 9(869)에 나서 고려 제4대 광종 9(958) 8월에 입적하였다. 광종이 몹시 슬퍼하여 원종대사 혜진이란 시호를 내리고 영정을 그리게 하였으며, 광종26(975) 10월에 이 비를 세우게 하였음. 비문은 한림학사 김정언이 지었는데 1916년에 무너져 비는 경복궁으로 옮기고 받침만 남아 있어서 보물 제 6호로 지정됨.

장사터- 징바위, 진잠바위 징바위참조

점곡- 점말, 점골, 점곡동, 즘골, 즘촌 즘말 점말 참조

점곡동- 점말, 점골, 점곡, 즘골, 즘촌, 즘말 점말 참조

점골- 점말, 점곡, 점곡동. 즘골. 즘촌, 즘말 점말 참조

점말 (구전자:송종석외360)-점골, 점곡(店谷),점곡동(店谷洞), 즘골, 즘촌, 즘말

마을에 옹기점이 있었기 때문에 불리워 지게 되었다.

절터골 (구전자:안남희 42)- 고달, 상고동, 상교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 고달참조

즘골- 점말, 점골, 점곡, 점곡동, 즘촌, 즘말 점말 참조

즘말- 점말, 점골, 점곡, 잠곡동, 즘골, 즘촌 점말 참조

즘촌- 점말, 점골, 점곡, 점곡동, 즘골, 즘말 점말 참조

조사당 산신당 참조

지풍골(구전자:이문재외 353)- 상교리에서 있는 골짜기 깊은 골

진잠바위 징바위 참조

진주암 (구전자:군지참조)- 상교리에 있는 산

장바위 (구전자:이문재 53)-진잠바위, 장사터 도달살터 북쪽에 있는 바위로 이곳에서 징을 쳤기 때문에 징바위라 함.

큰고개 (구전자;이문재 53)점말 북쪽에 있는 고개

학발산 (구전자:이문재 53)-산의 형태가 학의 발모양으로 생겼으며, 주암리의 옥녀봉을 그리워하여 학이 되어 날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옴.

행치고개- 원주에서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는 가장 쉬운 길은 행치고개를 넘어 국사령으로 가는 것이었다. 따라서 벼슬아치가 행차를 하였으므로 행치고개라 함.

()+()=한치(큰고개)=행치

행치산 (구전자:군지참조)- 상교리에 있는 산

      

6절 주암리(注岩里 

주암리 (구전자:이광식 45)- 죽바위, 죽바우 또는 주암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북면에서 북내면으로 명칭 변경됨. 이 명칭은 옥녀봉 산에 작은 소가 있는데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옥수가 철철 넘쳐 농경지에 이 물을 대었다 하였으며 또한 부락에 죽바위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 두자를 합쳐서 주암리라 한다. 자연부락으로는 옥녀봉과 죽바위가 있다.

조선시대 리명(里名)은 죽암(竹岩)이었다.

여수-금산 (구전자:군지참조)- 금광산, 죽바위 북쪽에 있는 광산

옥녀봉- 죽바위 서북쪽에 있는 마을

옥녀봉 산 아래 동편(東便) 금당천변에 있음.

옥녀봉- 이 산 정상 가까이에 직경 4m정도의 소()가 있는데 이소에 선녀가 밤이면 목욕을 하러 온다하여 옥녀봉이라 한다는 전설이 있다.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옥수(玉水)가 철철 넘쳐 농경지에 물을 대었던 아름다운 소였으나 일제 때 금광을 개발하면서 없어졌다 한다. 북내에서 양동으로 가는 대로변 좌측에 우뚝 솟아 있어 한눈에 바라보이는 바위산으로 전체적인 산형은 삼각형에 가깝다. 전에는 이 산에서 많은 금을 채굴하였으나 지금은 다른 광물을 채굴하고 있다. 옥녀봉을 뒷산으로 하여 마을이 있어 옥녀봉으로 불리우고 있다.

주암시장- 주암리에 있는 시장. (1970년대에 없어졌음)

죽바위 죽바위참조

죽바위 (구전자:군지참조)- 주암리에 있는 바위. 죽당처럼 되었음.

죽바위 (구전자:이광식외 145)- 예부터 이 바위 때문에 주민들은 죽만 먹고 살았다고 전해오며 마을 이름도 바위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7절 서원리(西院里 

서원리 (구전자:최병옥 53)- 본래 지평현 상동지역인데 1895년 여주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원곡과 서화를 병합하여 서원리라 함 자연부락으로는 원곡과 서화가 있다. 그래서 자연부락의 서화의 서자와 원곡의 원자를 합쳐서 서원리라 한다.

까치바위 (구전자:곽건영외170)- 바위형상이 까치처럼 보여 그 명칭이 붙여졌으며 까치바위를 기점으로 여주 양평의 행정구역이 구분됨.

말무덤- 삼국시대부터 625까지 전쟁시에 죽은 말의 시체가 나왔던 곳이나 지금은 논으로 되었음.

삼바위골-여주, 원주, 양평을 의미하는 3개의바위가 있는데 옛날에는 위3개 군의 분치(分峙)가됨.

서화 (구전자:군지참조)- 서원리에 있는 자연 부락명

서화고개- 서화에서 양평군 양동면 단석리 요골로 넘어가는 고개

서화현 서화 고개 참조

서홰 서화 참조

원곡 (구전자:곽건영의 외 170)- 원골, 원촌, 원주군 지내면에 편입되었을 당시 원주 원님이 한영에 갔다가 돌아올 때, 이곳에 오면 날이 저물어 간이로 막을 짓고 머물고 갔기 때문에 불려진 이름이라 한다.

옛날 제도로 원()은 나라의 공무로 출장중인 사람이 날이 저물면 유숙하고 가는 여관의 역할을 하다가 조선후기에는 일반인의 유숙도 가능했다. 이 원()이 있던 곳의 지명에 원()()를 많이 썼고, 이 마을이 1895년 이전에 지평현 상동면(지금 양동면)에 속해 있었다. 양동자체에서 볼 때 서쪽에 있는 원()터 마을이란 뜻이고, 서홰란 서쪽에 있는 홰라는 뜻인데 홰는 쉰다(息宿)의 옛말로 근래에도 닭장안에 닭이 쉬거나 잠자도록 설치한 것을 닭의 홰라고 불리운다.

원골- 원곡, 원촌, 원곡 참조

원골막- 원주 원님이 쉬었다 갔던 간이로 지은 집으로 현재는 없음.

원촌- 원곡, 원골 원곡 참조

원터 원곡 참조, () ():원곡(원골 참조)

      

8절 석우리(石隅里 

석우리 (구전자:한명기외153)- 본래 강원도 원주군 지내면의 지역인데 1895년 여주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석장동, 입석동, 장우동을 병합하여 입석과 장우의 이름을 따서 석우리라 하였다.또한 옛부터 돌이 많은 곳이어서 돌을 피하기 위하여 돌아서 가기 때문에 석우리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자연부락명으로는 거지허탕골, 담모랭이, 선돌, 돌담이등이 있다.

거지허탕골- 지형이 이상하여 입구에서 보면 그 안쪽이 굉장히 넓어 보이고 큰마을이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막상 들어가 보면 인가가 없어 동냥을 나갔던 거지들이 허탕을 치고 나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고클바위 (구전자:군지참조)-고클바위가 있는 주변지역 고클모양으로 된 석우리에 있는 바위

고클=방안을 밝히기 위하여 기름으로 등불을 켤 수 없는 서민층에서 방구석에 소나무 관솔에 불을 다려 올려 놓을 수 있게 하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연기나 끄름을 밖으로 배출하도록 연통식으로 장치한 것이다

곰실(구전자:군지참조)- 석우리에 있는 들

곰이란 산중에 사는 짐승류 곰()의 뜻도 있지만 곰은 크다()의 뜻이 많다.

곰실(큰 논고래) 곰재(큰 고개) 곰내(큰 개울)

곰실고개- 곰실위에 있는 고개

구지절- 석우리에 있는 산

느락골- 석우리에 있는 긴 골짜기

너븐, 너른()과 느락은 같은 뜻이 많다.

느랏()=넓은 골 너븐바위(넓고 큰 바위)

너븐여울= 넓은 여울(廣灘) 느락골이면 대개 그 부락에서 넓은 골짜기에 많이 붙여지는 이름이다.

담모랭이 (구전자:한명석외 153)-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지형이 담처럼 생겼기 때문에 불리워지게 되었다.

선돌과 관계가 깊다. 선돌이 신석기시대 경계표지라면 선돌주위에 돌담이 있기 마련이고 그 돌담 모퉁이에 해당된 마을이 담모랭이 라고 붙혀진 경우가 많다.

돌담들 (구전자:군지 참조)- 돌담이 마을 앞에 있는 들

돌담이(구전자:한명석외 153)- 옛부터 돌이 많아서 이 돌을 농경지 둑에 쌓았기 때문에 돌담 이라고 부른다.

세운돌(선돌: 선들)과 관계된 지명이다. 선돌 주위에 돌담이 있기 마련이다.

두일 (구전자:군지참조) 거지허탕골 참조

두일(杜一) 하나로 막힌 골이란 뜻으로 원이름 거지허탕골을 한자로 기록한 것임.

뒤일-두일 앞에 있는 골짜기

.뒷골-담모랭이 뒤에 있는 골짜기

드랭이-석우리에 있는 산

높은 봉우리일 경우에 두령(頭領)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바깥모롱이- 담모랭이 바깥쪽에 있는 마을

박석고개 (구전자:원용무 72)- 박석고개 위에 길을 만들었는데 길을 만들면 동네가 좋지 않다고 하여 길에 깔았던 돌을 느티나무 밑에 묻어 놓았기 때문에 박석고개라 한다.

돌을 묻어 박석이라는 명칭은 거의 없고 박석(薄石)이란 넓고 얇게 뜬 돌이란 뜻이며 이 경우 외에 마을과 마을사이에 있거나 산과 산 사이에 있을 경우도 적지 않다.

()+()+고개(또는 마을) 이 같은 경우 새()가 석으로 변음된 곳이 많다.

박석고개나 박석마을이란 이름은 너무도 많다.

방축고개 (구전자:군지참조)-방축골 위에 있는 고개 방축(防築)

방축골- 석우리에 있는 골짜기

석장동 돌담이 참조

선돌 (구전자:원용무외 172)- 석우리에 있는 바위

선도의 유래는

1.선녀가 빨래를 하고 하늘로 올라가다가 빨래방망이와 빨래바탕돌을 떨어뜨렸는데 방망이는 지금의 선돌이 되고 바탕돌은 선돌옆의 큰 바위가 되었다.

2.마귀할머니가 석우리를 지나가다가 지팡이를 땅에 꼽았는데 그것이 후에 선돌이라 불리게 되었다.

신석기 시대 유물로 대개는 어떤 구역의 경계 표시로 훗날 신앙의 대상이된 경우도 많다.

선돌 (구전자:한명기외153)- 입석, 입석동

옛날에 세워진 선돌이 있기 때문에 불려지게 되었다.

선바위 (구전자:군지참조)- 석우리에 있는 바위

선바위- 선바위가 있는 골짜기

아랫말- 돌담이 아래쪽에 있는 마을

안 담모롱이- 담모랭이 안쪽에 있는 마을

왜미들- 석우리에 있는 들

왜미방죽- 왜미들에 있는 못

, (참외, 오이)+()

형태가 참외나 외처럼 생긴 산자락에 있는 들, 마을 등에 붙여지는데 왜, 외 등은 모두 오이()의 방언들이다.

웃말- 돌담이 위쪽에 있는 마을

입석 선돌 참조

입석- 선돌, 입석동 선돌 참조

입석동- 입석, 선돌. 선돌 참조

잣자리공동묘지- 담모랭이에 있는 공동묘지

(..)+저리()=낮은+고개 또는 잣고 개

장우동 담모랭이 참조

중봉(中峰 또는重峰)- 석우리에 있는 산으로 중턱에 논 한섬지기가 있음.

큰골- 석우리에 있는 큰 골짜기

토일들- 석우리에 있는 들

     

9절 덕산리(德山里 

덕산리(德山里)- 원래는 강원도 원주목 지내면 장산촌에 속한 부락이었다. 1895년 행정구역 변천때 원주 지내면과 여주 북면을 합하여 북내면으로 될 때 북내면 장산 촌에 속했다가 1914년 리명(里名)의 재조정 당시 덕산리(德山里)로 되었다.

동쪽은 중암리 서쪽은 금당천 북쪽은 석우리 남쪽은 장암리와 경계가 되었고. 큰 마을은 넉들(골말, 안말, 동산말의 통칭)도내미, 갖고개, 버덩말 등이 있다.

갬발- 잣고개마을 동북편 흑두들기 위의 산기슭 공동묘지 남쪽구역에 산이 느러진 자락에 서향판 전부를 말한다.

사당터-넉들에서 긴미 가래배미 보들로 넘어가는 언덕 음달이다. 사당이 있었다하여 붙혀진 이름이다.

안평지- 탱골과 검성골의 정상에서 합쳐진 곳인데 -산정산 부분이지만 평지가 넓어 논지와 농가가 있어 아늑한 평지가 있다하여 안평지(安坪地)라 한다. 현재는 골프장이 되었다.

찬우물 백이- 탱골 정상 남쪽에 안평지라는 평지가 있는데 그곳에 우물이 있다. 물이 차다고 해서 찬우물백 이라 부른다.

현재는 골프장 역내로 들어갔다.

새터말-넉들과 도내미 사이를 말한다. 두 마을 사이에 있어 새()터라 부른다.

후등고개- 넉들 마을 뒤고개란 뜻이다.

동내재- 넉들 서남쪽에서 장암리와 모냉이를 통하는 낮은 언덕고개다. 마을 앞의 재(고개)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물받이- 탱골 안막 우측 음달인데 안평지와 쇠머리 산의 물이 수로가 없이 흘러 우기라 수기가 많을 때 물의 낙차가 생기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곰실-잣고개 마을에서 석우리로 넘어가는 길 좌우 농지가 있는 곳을 말한다.

옛날에 곰이 많이나와 곰실이라고 부른다는 유래를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곰이란 ()크다는 뜻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

큰개울이라는 뜻으로 곰내 큰 부락을 곰말, 큰고개는 곰재, 곰치, 큰나루는 곰나루 등으로 쓰고 있다. 이곳은 큰고개실이란 뜻에서 곰실로 이름이 붙혀진 것이다.

망종봉- 덕산리 탱골에서 양동면 단석리 거단리로 넘어가는 고개다. 죽어서 마지막 넘어가는 고개라고 하여 한자로 망종봉(忘終峰)이라고 쓴다.

서울 보는 바위- 탱골정상에 있는 바위로 바위위에서 서울을 바라볼 수 있다는 바위인데 그다지 크지는 않고 장암리에서 양동 거단리를 통행하는 산길변에 있다. 높은 위치에 있는 바위이기 때문에 붙혀진 이름이다. 현재는 골프장 역내에 들어갔다.

쇠머리산- 검성골과 탱골 사이에 솟아있는 산인데 구전으로 천지 가력할 때 물에 묻히고 쇠머리만큼 남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나 이것은 새()가 쇠로 변음하고 마루(산등마루)가 머리로 변하여 쇠머리 산이라 하는 것이지 원뜻은 새마루산(새간에 있는 산꼭대기 산)의 뜻이다.

탱골- 덕산리에 석우리 경계 골짜기다. 큰 바위(물바가지 바위)가 있어 태암(泰岩)골이라 한다.

검성골- 한자로 쓰면서 금상곡(琴庠谷)이라고 쓴다. 그러나 원명은 검산(劍山=바위산 암산(岩山)의 뜻)골이다 즉 바위가 많은 골짜기라는 뜻이다.

흑두들기- 잣고개 마을에서 동쪽으로 개울건너편에 있는 검성골과 태암골 개울 사이에 있다. 수리시설이 온전하지 못하고 천수답들이다. 논두렁에 가래질을 거의 하지 못하고 두렁에 누수를 막기 위하여 두렁을 두들기는 데서 발원된 이름이다.

골말- 넉들부락 동남부에 위치한 마을

물방아거리- 남산보들에서 담터로 가는 논들 소로길 옆에 금당천과 인접한 곳에 물레방아를 설치하고 봇물을 이용하여 사용하던 방앗간이 있었다하여 물레방아-물방아거리라고 하였다.

남상보

버덩말- 남산보들에게 금당천변에 있는 마을이다. 옛부터 여러 가구가 집단해서 살지는 않았다. 버덩()+()

도내미-덕산리 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금당천이 외룡리 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면서 곰실 입구의 상에 부딪쳐 냇물이 방향을 서남쪽으로 바꾸면서 을앞을 둘러흐른다. 이 때문에 도내미라 부른다.

(돈다)+()+()

잣고개- 잣나무가 많아서 잣고개라고 부른다는 유래도 있으나 본뜻은 잦(작은, 자딴)고개라는 뜻인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백현(柏峴)이라고 잘못 기재하고 있다. 이 고개 넘어 10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 넉들에서 잣고개 마을로 넘어가는 작은 고개를 말하는 것이다.

넉들- 덕산리 중에 제일 큰 마을로 동산말, 안말, 골말을 합쳐 통칭한다. 원음은 넓()들이다. 마을 앞에 남산보들이라고 부르는 넓은 들이 있어 붙혀진 이름이다.

굴앞골- 검성골 양지쪽의 골짜기로 천연 바위굴이 있어 선사유적지였다. 굴앞 골짜기란 뜻에서 붙혀진 이름이다. 지금은 골프장이 되어 훼손되었다.

      

10절 장암리(長岩里 

장암리- 본래 강원도 원주목 지내면에 속하는 마을로 장산촌(長山村)이었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여주의 북면과 원주의 지내면을 합병하여 북내면이라 칭하고 1914년 리명의 제정 당시 장산 촌이라는 장()자와 같은 구역안에 좌암촌(佐岩村)의 암()자를 합하여 장암리(障岩里)라고 명명하고 여주군 북내면 19개리 중의 한마을로 되었다. 조선초기 원주 원씨가 세거하기 시작하여 대대로 집성촌을 이루어 총호수의 3분의 1에 달하였었다가 현재는 그 수가 많이 줄었다. 동쪽은 흥왕산을 경계로 중암리에 접하고 남쪽은 신접리, 서쪽은 당우리, 금당천 북쪽은 덕산리와 경계하고 있다. 자연집단 부락으로는 웃말, 아랫말(증터 또는 소계방), 음달말(원래의 음달말은 지금 없어지고 현재 앞말산 밑에 몇집을 칭함) 양지말(현재는 집은 다 없어지고 전답으로 변함), 토골미, 좨미(웃좨미, 넘은 좨미)등이 있다.

각장골- 긴미 아랫말 끝에 있는 골짜기로 맨 가장 자리의 골짜기다.

가장(가장자리 )+()=맨 끝 가장자리의 골짜기

삼우터- 한자로 쓰면서 삼우대(三友垈)라고 쓰고 있다. 긴미 마을 앞에 있는 앞말산 남쪽 부분을 칭하는 지명인데 선비가 즐기던 곳이기 때문이다.

삼우(三友)=()+()+거문족()

광터들- 은행나무가 있어 은행나무거리하고도 부른다. 옛날에 부자가 광을 짓고 살던 곳이라 은행나무 밑에 금항아리가 묻혔다는 전설이 있으나 이들이 광을(창고)지었던 터기 때문이 아니고 긴미에서는 제일 넓은 들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넓은 )+()+

앞밭들- 현재는 집들이 없지만 옛날에 음지말을 이루고 있던 것이 각장골 입구까지인데 그 당시 음지말 앞에 있는 밭()들이기 때문이다. 현재는 일부만 논()으로 기답한 것도 있다.

토골미- 한자로 쓸 때 토금동(土金洞)이라고 쓰는데 이곳은 금과는 상관없는 곳이고, 그 뒷산을 토골미산이라고 부르기 때문인데 산이름을 토골미라고 부른 것은 터()+()+()이 본뜻이다. 그것은 옛날 작은 좨미가 바로 이 토골미산 동쪽 골짜기이기 때문에 작은 좨미 부락이 있을 때 지어진 이름으로 텃골은 지은 산이란 뜻이다.

사다리- 산의 원줄기는 흥왕산(또는 설왕산)에서 서쪽으로 길게 뻗은 능선에서 다시 남쪽으로 4줄기의 산이 뻗었기 때문에 사다리라고 부른다.

()+(산줄기 )+()

매봉- 매와 독수리가 잘 앉아서 붙여진 명칭이나 이것은 유모어에 불과하고 산봉우리란 뜻이다. ()+

수리봉- 설왕산 줄기 중에 우뚝 솟은 봉으로 가창골 윗부분이다. 제일 높은(頂上)의 뜻에서 수리(정수리)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빈밖들- 마을과 들사이에 빈영산(해발 80)이 있다.

빈영산이란 몹시 가파른 산을 말하는 것으로 마을에서 볼 때 빈영밖에 있는 들이기 때문에 빈밖들이라고 하여 장암리의 큰 보들 논으로 유일한 들이며 100%가 논이다.

빈영= 비령()

앞말산- 긴미 부락 남쪽에 위치하여 마을의 청룡 역할을 하고 있는 산이다. 산 능선이 나지막하고 굴곡이 없이 길게 뻗은 산이다. 그래서 마을 앞에 있는 말림(조선시대 땔나무나 목축용 풀을 베지 못하도록 금지(말리는) 하는 곳) 산이란 뜻에서 지어진 이름인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전마산(前馬山) 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타는 말의 뜻이 아니고 이두식으로 풀이하면 역시 앞말산이다.

음지말- 아랫말 중에 남쪽 앞말산 밑에서부터 각장골 입구까지를 말하는 것인데 원래의 음지말은 다 없어지고 앞말 밑에 몇집만 남아있는 북향 말이다.

긴미- 장암리 중에 제일 큰부락이다. 긴미란 산이 길다는 뜻에서 긴()+()인데 변음 하여 진미라고도 부른다.

아랫말을 소계방(瀟溪坊)이라고 하여 중터라고도 하고 웃말과 음지 말을 합쳐서 통칭하는 이름이다. 긴산이란 흥왕산을 근원으로 하여 긴등이 여러 줄기 서향으로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다래기실- 청룡안 고래와 연결된 북향 논들이다. 논다랭이가 크지 않은 거의 계단식이 된 논들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다랭이실, 다래기실이라 한다.

검성골 버덩- 덕산리 검성골(琴床谷)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들을 말한다. 최근에 개간되어 경작지가 됨.

호랑이 색은골- 가창골안에 있는 골짜기로 호랑이가 죽어서 썩은 일이 있는 골짜기다.

논머리- 가창골 꼭대기 산속에 논이 있었다. 그 주위를 말한다.

웃터- 긴미 부락중에서 제일 위쪽이다. 옛날 집터인데 현재는 집이 없다.

여우골-긴미 장터골 서쪽 골짜기를 말하는데 여우들의 서식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논틀-긴미 아랫말 서쪽에 있는 논들이다. 논들이 변음하여 노틀이고 그 보()를 논틀보라고 한다.

왜갈나무 숲- 아랫말 웃말사이에 소하천이 있는데 하천변에 오리나무와 아카시아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

. 이 숲에 백노, 왜가리, 황새종류들이 서식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철새들이 매년 오다가 1950년 봄부터 오지 않고 인접 부락 신접리로 옮겼다.

곳집거리- 긴미 아랫말과 웃말사이에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는데 길가에 고집()을 짓고 장례에 사용하는 상여들의 가구를 보관하던 창고가 있던 곳이라하여 곳집거리 또는 고추거리라고 하였다.

연당거리- 긴미중 웃말 아랫부위를 칭하는데 마을에 화재때 방화수와 농업용수를 겸하여 사용하도록 하기 위하여 1943년에 연못을 파고 못의 이름을 연당(蓮糖)이라고 하였다. 그 연못 근처를 연당거리 또는 연못거리라고 불렀다.

용수물- 바위틈에서 솟아오르는 물로 옛날 지하수를 이용하기 전까지 식수로 사용한 물이다. 물이 차고 물맛이 좋고 수질이 극히 좋다. 땀여(더위에 생기는 피부병)치료와 위산과다 치료에 효험이 좋은 물이다.

용수정(龍水井:聳水井)이라고도 한다.

1991년도 발굴할 때 화살촉, 돌칼, 토기 등이 다량 출토되었다.

돌다리- 좨미고래 서쪽 끝 양쪽산이 안고 있는 사이에 작은 시내가 흐르는데 돌로 징검다리를 놓고 통행하던다리가 있던 곳

좨미- 큰좨미 작은좨미를 통합한 칭호

좨미고래- 좨미부락 앞고래실 전답고래

산다골-좨미부락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평범한 골짜기며 가는 산줄기가 많이 내린 곳이다.

()+()+(()) ()도 산의 뜻이다.

차돌봉- 청룡안고래 동남부에 있는 낮은 산봉우리로 차돌(磋石)이 많고 규석광산까지 있던 곳이다.

청룡안-긴미 동남쪽에 있는 논고래 오시뫼 청룡안 사다리 용수물까지 연결된 긴 고래실중에 능골 산뿌리 끝부분 안쪽을 청룡안이라고 부르고 그 부위의 논고래를 청룡안 논고래라고 한다.

어떤 목적물의 좌측을 싸고 있는 산줄기를 청룡이라고 부른다.

닥밭재-긴미 뒷능과 광터사이에 느러진 나지막한 언덕고개, 농지화 되기전에 닥나무 밭이었기 때문이다.

뒷골- 긴미 북쪽 뒷능 너머 고래 즉 마을 뒷고래를 말하는데 현재 전부가 농지다.

뒷능- 흥왕산에서 서향으로 길게 내려온 나지막한 산줄기로 긴미 마을의 백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원호() 이하 누대의 묘소가 계장되어 있다. 고관의 묘소가 있어 능()이라 부른다고 구전하는 사람도 있으나 왕의 묘가 아니 이상 고관의 묘라고 해서 능()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고 뒷산줄기라는 뜻에서 뒷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능골-두줄기 산 능선이 남향으로 뻗은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농지가 있다.

(丘陵)+()

가창골-긴미 웃말부락에서 옛날에 나무를 땔 때 시초장(柴草場=땔나무와 풀을 베든 곳)으로 사용해 왔다. 나무꾼의 노래소리가 들리던 골짜기라고 가창골(歌唱谷)이라고 하였다.

절골-긴미 윗부락에서 흥왕산으로 올라가는 골짜기, 가창골 남쪽너머 골짜기로 옛날에 절이 있던 골짜기로그 유지만 남아 있다. 최근에 수원사라고 하여 복원하였다가 다시 폐허되었다.

절골- 좨미 동쪽 골짜기로 흥왕사로 올라가는 골을 말한다.

새나무터-토골미산 동향판 산으로 경사가 완만하다. 옛날 세가들의 사폐지 내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소유 임야가 없어 땔나무와 목축사료용 풀을 벨 곳이 없기 때문에 어떤 구역을 지정하여 시초장(柴草=나무나 풀을 깎을 수 있는 장소)을 정해주는데 새로 지정한 곳이라 하여 새나무터(新柴草場)라고 부르게 되었다.

장터골-긴미 앞말산 너머 삼우터 남쪽의 사다리 능선 남쪽에 있으며 옛날 운동경기 중에 장치기를 하던 터다. 장각수- 장암리 가창골 물과 검성골이 합류되어 다시 덕산리의 태암골 물과 합류하는 지점으로 긴다리물이다. 하천 옆에 옷물(접촉성 피부염에 치료목적으로 사용하는 물)이 있었다.

장각(長脚긴다리)+()

오시매-원음은 오서(鼇鼠)()이다. 오서란 날다람쥐과 청서(靑鼠=청살 무라고 함)를 말하는 것으로 현재도 많이 서식하고 있다. 즉 청살무가 많이 서식한다하여 오서 뫼가 오시 매로 변음된 것이다. (긴미서 좨미로 다니는 낮은 고개)

오리나무들 (구전자:이현채 64)

동가나무들 참조

동가나무들- 오리나무들이라고도 부른다. 전자용으로 동가나무를 기러 교목이었다가 삭은 후에 오리나무를 길러 정자나무로 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신작골- 웃좨미 북쪽 골짜기로 설왕산에서 내려오는 골짜기다.

진실- 웃좨미서 동남쪽으로 넘어가면 당우리에서 도전리로 가는 포장도로가 나오는데 그 골짜기를 말하며 현재 전체가 논()고래가 되어 있다. 긴고래실이란 뜻에서 긴실인데 긴()이 진()으로 발음되어 진실이라고 부른다.

덕고래- 설왕산(흥왕산) 남쪽하던 부에 위치하며 좨미서 중산을 넘어 다니는 고개로 좨미쪽은 거의 평지고 중산 쪽은 가파른 편이다. 언턱진 고개라는 뜻에서 턱고개가 덕고개로 변한 것이다.

산다골-좨미부락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좨미부락을 들어가려면 초입 좌측골짜기다. 한자로는 산다곡(山多谷)이라 씀.

동쪽에서 서쪽으로 원능선이 늘어진데다가 남쪽으로 여러 가닥 늘어진 곳이다. ()+(達山)+=산달골을 산다골로 부르고 있다.

구삿골-옛날 샛길 골이라는 뜻이다. ()+()+()

수수고개 희수 고개 참조

희수고개-좨미 서쪽끝 돌다리에서 여강학교로 넘어가는 고개다. 수수고개라고도 부른다. 수수(붉은 차돌)돌이 박힌 산줄기의 고개이기 때문에 붙혀진 이름이다.

전나무고개-전나무(憎木)이 서있던 고개

목판골

박석고개-뒷능이라고 부르는 마을 북쪽에 있는 산의 윗 뒷능과 아랫 뒷능사에 있다. 수기가 많다고 해서 인위적으로 옛날에 길에다 돌을 많이 박아놓았다. 현재도 박힌돌로 깔려 있다.

      

11절 중암리(中岩里 

중암리(구전자:김연호 51)- 본래 강원도 원주군 지내면의 지역인데 고종 32(1895)여주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암동, 완장동, 중산동을 병합하여 중산과 동암의 이름을 따서 중암리라 함. 자연부락으로는 동암, 건너말, 녹수골, 가창골, 진원 완장이 돌산 등이 있다.

가창골 (구전자:서영주 62)- 동암 북쪽에 있는 마을

겉다니 고개- 여주군 북내면 중암리, 덕산리와 양평군, 양동면 단석리 거단이 부락의 경계 지점에 있는 고개

녹수골(구전자:군지 참조)- 중산 북쪽에 있는 마을로 약물이 있었다 함.

녹수동 녹수골 참조

당고개- 중암리에 있는 고개로 서낭당이 있었음.

동암- 중산 서쪽에 있는 마을(퉁바위)

동암- 중산 서쪽에 있는 바위(퉁바위)

방아골- 중암리에 있는 골짜기

베틀바위(구전자:서영주62)- 중암리에 있는 바위로 베틀처럼 생겼음.

보들(구전자:군지 참조)-중암리에 있는 들로 보()가 있음.

상왕사(霜旺寺)- 흥왕사, 설랭이절 설랭이절 참조

설랭이절 (雪旺寺)-상왕사.흥왕사.

신라 제 35대 경덕왕 때 고달과 소달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불교에 귀의하여 고달은 고달사를 짓고, 소달은 절터를 구하기 위하여 100일 기도를 마치고나니 5월인데, 이곳에 이르니 서리가 내렸으므로 그 자리에 절을 짓고 설랭이절 또는 상왕사라 하였는데 그 뒤에 흥왕사로 고쳤다 한다.

수뭉골(구전자:서영주62)- 중암리에 있는 골짜기

완장동 (구전자:군지참조)- 지론 서북쪽에 있는 마을

산능선이 완만하면서 긴등이 생긴 형태의 마을

완쟁이 완장동 참조

울 바위(구전자:서영주62)-중암리에 있는 바위로 사람이 말을 하면 산울림 소리를 내는 바위 대답바위라고도 함.

중산-중암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

중산동 중산 참조

중암리 은행나무(구전자:군지참조)-중암리 산 175번지에 있는 은행나무 높이 16, 둘레 4, 너비 35, 수령 약 300

지론(구전자:서영주 62)- 녹수골 북쪽에 있는 마을

고개 마루턱에 논이 있어 생긴 이름. (() +)

큰골 (구전자:군지 참조)- 중암리에 있는 큰 골짜기

퉁바위 동암 참조

풀목산 (구전자:서영주62)- 강천면과 도전리와 북내면의 경계에 있는 산

행성바위- 중암리에 있는 바위 행성은 상여의 뜻

흥왕사(興旺寺)-상왕사, 설랭이절, 상왕사 참조

      

12절 운촌리(雲村里 

운촌리(구전자:이종규59)- 어두운, 어득운, 어둔리, 운촌, 운천 본래 강원도 원주군 지내명의 지역으로서 보금산 서쪽 골짜기가 되어 늘 구름이 끼고 어두우므로, 어두운, 어득운 또는 운촌, 운천이라 하였는데 고종 32(1895)여주군 북내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숲말을 병합하여 운촌리라 함. 자연부락으로는 숲말, 양지말, 웃말이 있다.

갈월고개(구전자:군지참조)- 갈월 위에 있는 고개

갈월들 (구전자:이종규 59)-운촌리에 있는 들

강대울-운촌리에 있는 골짜기

건넌들- 어두운 건너쪽에  있는 들

구락골- 운촌리에 있는 골짜기로 굴이 있어 구락골 이라 함.

굴앞골의 변음이다.

굴바위 (구전자:군지 참조)- 운촌리의 구락골에 있는 바위

도투바위 (구전자:이종규 59)- 운촌리에 있는 바위

도투박골-도투바위가 있는 골짜기

도투바위골의 변천어

도투는 함경도지방에서는 돼지()의 사투리. 이 고장에서는 처녀가 머리에 드리는 댕기의 종류로 도투락 댕기, 도투락, 도투라고 함.

망재- 운촌리에 있는 산

변란때 망(파수)을 본다는 뜻도 되고 높아서 사방을 바라볼 수 있다는 뜻도 있다.

=(높은 고개)

매봉재(구전자:군지 참조)-운촌리에 있는 산

지명 중에 산++산 즉, 산을 겹쳐서 이름이 지어진 경우가 많은데 뒷날 식자(識者)란 사람들이 한자(漢字)로 지명을 쓰면서 전혀 다른 뜻으로 표기(表記)된 경우가 많다. 본래 이 변한 경우가 많고 은 꼭대기, 마루산의 뜻이다.

이것을 매라고 하여 매()또는 응()등의 한자를 붙였다. 처음에 말이 몰(모리)로 변하고 몰이 뫼로 변하고 뫼()가 산()으로 음이 변해온 것이다. 결국 매봉산이란 매()+()+()이다.

무두치 고개 (無屯峙) 운촌리에 있는 고개 산이 가파르기 때문에 평지가 없어 쉬어갈 곳이 없다는 뜻이다.

무두치산- 무두치고개가 있는 산

미락골- 운촌리에 있는 골짜기로 미륵이 있음.

미력골 미락골 참조

바랑골- 운촌리에 있는 골짜기

발도 산()의 뜻이다.

()+()+() 산중(山中)에 안골짜기의 뜻이다.

박음산 (구전자:이종규)- 천지가 개벽할 때, 산에 바구니가 걸려 있었기 때문에 불리워지게 되었다.

꽂힌산(串山)(우뚝한 산이란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산은 그렇게 유달리 우뚝한 산은 아니다.

방목산(구전자:군지 참조)- 운촌리에 있는 산으로 소를 놓아 먹였음.

보꼬리들(구전자:이종규59)= 운촌리에 있는 들로서 복이 있는 들이라 하여 보꼬리라 하였음.

보거리(洑巨犁)

분지개 고개- 운촌리에 있는 고개

석지(碩地) 분지(分枝)- 분지(分枝) 원줄기에서 갈려진 줄기

사기막골- 운촌리에 있는 골짜기로 사기점이 있었음.

사기는 절터(寺基) 사기점(沙器) 등의 뜻이 있다.

상운촌 상촌, 웃말, 웃말 참조

상촌- 상운촌, 웃말. 웃말 참조

서당골 (구전자:군지참조)- 운촌리에 있는 골짜기로 서당이 있었음.

수촌-숲말,음지, 음달말, 숲말 참조 수촌(藪村)

숲말- 수촌, 음지, 음달말

1.어두운 남쪽에 있는 마을로 숲이 많았음.(이종규 59)

2.이 곳으로 내려오는 골짜기가 제일 깊어서 물이 많았다하여 부락이름이 수말()이었던 곳이 현재는 숫말이라 부르고 있다.

(박준식63)

승지골(구전자:이종규59)-운촌리에 있는 골짜기

양지말(구전자:군지 참조)-어두운 양지쪽에 있는 마을

어둔리- 어두운, 어득운, 운천, 운촌, 운촌리. 운촌리 참조

어두운- 어둔리, 어득운, 운천, 운촌, 운촌리. 운촌리 참조

어득운- 어두운, 어둔리, 운천, 운촌, 운촌리. 운촌리 참조

운천 운촌리 참조

운촌 운촌리 참조

음달말 (구전자:이종규59)- 숲말, 수촌, 음지. 숲말 참조

음지 숲말 참조

웃말- 상운, 상운촌, 어두운 위쪽의 마을

한배미들- 운촌리에 있는 들로 한배미로 됨.

간촌-간씨(簡氏)들이 누대 살고 있다 하여 간촌

마을과 마을사이에 있는 마을로 간촌(簡氏)이라고 하는데 이런 경우 우리말로 새땀, 새말이라 부른다.

위의 마을은 간씨(簡氏)와 관련된 지명이다.

      

13절 신접리(新接里 

신접리 (구전자:이영환48)- 본래 강원도 원주군 지내면의 지역인데 고종 32(1895)여주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촌과 접가동을 병합하여 신접리라 하였다. 조선중기에 여흥 민씨가 처음 정착하여 새로이 마을을 형성하였다는 새말()과 새말에 인접하여 마을이 생긴 후부터 두 마을을 합하여 신접리로 하였다 한다. 자연부락으로는 새말과 접줄이 있다.

가재골(구전자:송조영61)-새말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가재가 많았음.

가재가 많아 가재골이 아니고 가재는 가장자리()의 뜻이 깊다.

가재울이라는 지명은 나무도 많다.

가재울(구전자:군지참조) 가재골 참조

개리울들 신접리에 있는 들

검박뿌리 (구전자:송조영61)- , 바위

검은바위(구전자:군지참조)- 신접리에 있는 바위, 색깔이 검음.

공실골(구전자:송조영61)-접줄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

공실들- 접줄 북동쪽에 있는 공실골 앞의 들

늠모들(구전자:군지참조)- 신접리에 있는 들로 늪이 있었음.

(=쌀광름)은 곡식창고(凜廣) 지방관리의 녹봉이나 녹봉으로 주기위한 토지 등을 참고할 필요도 있다.

뒷골-접줄뒤에 있는 골짜기

뒷밭들- 신접리에 있는 들로 밭이 많음.

매봉(구전자:송조영61)- 신접리에 있는 가장 높은 산

밤가시-가재울 모퉁이로 논과 밭이 조금 있음.

범바위(구전자:군지참조)-신접리에 있는 바위로 범처럼 생겼음.

벗째고개 (구전자:군지참조)-신접리에 있는 고개

, (, )벋은 고개란 가파르지 않고 완만한 작은 고개일 경우 많이 쓰임.

백로 왜가리 서식지-신접리 285번지에 있는 천연기념물 400년쯤 되는 은행나무가 있는 데 해마다 백로,

기 떼가 와서 새끼를 침.

새말(구전자:이영환48)-신촌(新村) 조선중기에 이곳은 인가가 없었던 곳으로 여흥 민씨가 처음으로 정착 새로이 마을을 형성 하였다하여 새말이라 불리고 있다. 새말에는 현재 백로 및 왜가리 서식지가 있는데 당초 이 새는 북내면 장암리에 있었던 것이 1950년 이곳으로 옮겨와 서식하였는데 백로와 왜가리가 서식하고부터는 마을이 번성하고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고 한다.

삭은절(구전자:송조영61)-옛날에 절이 있었는데 빈대가 너무 많아 신도들이 빈대를 잡자고 하였으나 스님들은 살생을 할 수 없다고 방치하다가 빈대소굴이 되어 스님들은 떠나버리고 절은 삭아서 쓸어졌다고 함. 지금도 여강중고등학교 뒷산과 주변산에 기와파편과 사기그릇 파편이 흩어져 있음.

신접교(구전자:군지 참조)-신촌 서쪽에 있는 다리

신촌 새말 참조

신촌교 신접교 참조

앙골(구전자;송조영 61)-접줄 안쪽에 있는 골짜기

안골(內谷)의 발음이 와전된 것.

자망들(구전자:군지참조)-자망보, 신접리에 있는 들

자망보 자망들 참조

장배미들- 신접리에 있는 들. 긴 배미가 있음. 긴 논배미

접주- 지촌, 접줄 접줄 참조

접줄(구전자:이영환48, 엄어도71)-접주(接主), 지촌

1.전설에 의하면 산중턱에 조그마한 암자가 있어서 그 곳을 찾는 사람이 많다보니 인가가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접절 자연부락이 형성되었는데 모양이 접줄처럼 되었다하여 접줄로 불렀다. 일명 이 골짜기를 미륵골이라고도 하는데 현재는 절의 흔적은 없고 바위에 미륵의 흔적만 남아 있다. 한편 일설에는 인근에 새말마을이 번창하여 새말에 인접하여 생기었다하여 접줄() 이라고도 한다.

2.(구전자:엄어도71)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곳은 산과 산이 겹쳐져 있어 동네가 있는 줄 모르고 군인들이 그냥 지나쳐 피해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같이 산과 산이 겹쳐 있어 접줄이라 하였다.

조산(구전자:송조영61)-신접리에 있는 작은 산

조산들-조산이 있는 들

지식들-지식보 신접리에 있는 들로서 가뭄시에도 물이 맑고 좋음.

지식보 (구전자:군지참조)지식들 참조

지촌-접줄, 접주. 접줄 참조

      

14절 지내리(池內里 

지내리(구전자:심근식81)- 모안, 못안, 못안말, 무안, 지내 본래는 강원도 원주군 지내면으로 있다가 고종 32(1895)에 여주군으로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북면과 지내면을 통합하여 북내면 지내리라 하였다.

조선시대 세종대왕 능을 여주에 모실 때 지내리 뒷산이 화산이라 이 마을이 화를 당한다하여 그 예방으로 부락복판을 가로 막아 둑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면 마을에 아무 지장이 없다고 하여 뚝을 쌓았다고 지내리라 하였다. 그 후 저수지에서 빨래를 할 때 물이 적어 물을 흐르게 하기 위해 빨래 방망이로 흙을 판 원인으로 인하여 홍수때 저수지 뚝이 파여서 이제는 그 흔적만 있는 상태이다. 자연부락으로는 돌바우, 못안말, 양지말, 웃말이 있다.

검은돌-흑석골, 검은박골. 지내리에 있는 들

검은박골- 검은들, 흑석골, 검은들 참조

개지박골- 우렁바위 앞에 있는 골짜기

귀논들(구전자:군지참조)-지내리에 있는 들로 귀가진 논이 있음.

너문버즐(구전자:심근식81)- 버즐 너머쪽에 있는 골짜기

다래실-지내리에 있는 골짜기로 올라가는 곳이 다래처럼 지형이 이루어져 있어 다래실 이라 함.

동막골- 여수고개 밑에 있는 골짜기

돌바우- 땅속이 바위로 되어 있어서 돌바우라 함.

돌바우앞(구전자:군지참조)-돌바우 앞에 있는 들

들게논- 지내리에 있는 논으로 메말라서 등게가 많이 된다 함.

마구할미바위(구전자:심근식81)- 마귀할미가 놀았다하여 명칭이 지어지게 됨.

매기자리(구전자:군지참조)- 지내리에 있는 들

맷돌바위- 지내리에 있는 바위로 맷돌처럼 생겼음

맷돌바위골(구전자:심근식81)- 마구할미바위 있는 곳의 골짜기

모안-못안, 못안말, 무안, 지내, 지내리. 지내리 참조

모래봉-옛날에 모래만 쌓여 있었기 때문에 모래봉이라 함.

못안말-모안,못안, 무안, 지내, 지내리. 방망이로 두드려서 연못이 터져 못안말이라 함.

지내리 참조

못안- 모산, 못안말, 무안, 지내, 지내리 지내리 참조

못장동-못안말과 석암동의 경계

무안 지내리 참조

박상골(구전자:군지 참조)- 지내리에 있는 골짜기

박전골(구전자:심근식81)- 여수고개 밑에 있는 골짜기

밧안터(구전자:군지 참조)- 지내리에 있는 골짜기

버줄-지내리에 있는 골짜기

붓당골(구전자:심근식81)- 여수 고개 남쪽에 있는 골짜기

석암동 돌바우 참조

새나지골- 지내리에 있는 골짜기

새말림(구전자:군지참조)-지내리에 있는 산

소터골(구전자:심근식81)-여수고개 밑에 있는 골짜기

안버즐(구전자:군지 참조)-버즐의 안쪽 골짜기

안청수- 청수들 안쪽의 들

양지말- 지내리에 있는 마을로 양지바른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양지말 이라 함.

억새-지내리에 있는 골짜기

여수 여새 참조

여새고개-여수고개, 절고개, 여새위에 있는 고개

여수고개- 여새고개, 절고개. 여새고개 참조

우렁바위(구전자:심근식81)-지내리에 있는 바위로 우렁처럼 생겼음.

웃말-지내리에 있는 마을로 높은 지대에 있기 때문에 웃말이라 함.

자맹이(구전자:군지참조)- 지내리에 있는 들

절고개-여새고개, 여수고개, 여새고개 참조

지내-모안, 못안, 못안말, 무안, 지내 지내리 참조

호장골(구전자:심근식81)- 여수고개 밑에 있는 골짜기

흑석골-검은들, 검은박골. 검은들 참조

      

15절 가정리(稼亭里 

가정리(구전자:이성국외142)-본래 강천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원주군 지내면의 지내동 일부를 병합하여 가정리라 하였다. 가정의 유래는 원나라에서 우리나라에 동녀(童女)의 징녀(徵女)를 강요할 때, 원나라 황제에게 금수로서도 하지 못할 일을 하고 있으니 중지하게 하라고 진정하는 청을 올려 그 제도를 중단하게 하였다.

그로 인하여 원나라 재상들로부터 탄압을 받게 되어 조정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이곡 선생을 이곳으로 귀양 보내게 되어 이곳에 와서 정자를 짓고 살았는데 그의 호를 따서 가정리라고 하였다. 자연부락으로는 가정자, 반여울 등이 있다.

가정 가정자 참조 가정자(稼亭子)

가정리 가정자 참조

가정리 숲(구전자:군지참조)-가정리에 있는 숲

가정자(구전자:이성국외 142)-고려시대 가정 이곡선생이 이 마을에 귀양와서 정자를 짓고 은둔하였기 때문에 정자의 이름을 따서 부르게 된 것임.

날타리(구전자:군지 참조)- 가정리 마감산(馬甘山)에 있는 골짜기

날타리고개- 날타리 골짜기에 있는 고개

농바위- 노린재, 가정리에 있는 바위 느린+=느린 재=노린재

노린재 농바위 참조

느러칭이-가정자에 있는 골짜기

느티나무- 둘레 1.5m, 높이6m, 수령 약 500

당게 (구전자:김호승70)-가정자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당집이 있었음.

대세비- 반여울 남쪽에 있는 골짜기

됭이정골(구전자:김호승외 470)- 가정자와 반여울 사이에 있는 골짜기

바탕터- 가정자 남서쪽에 있는 들 ()+()+()

무안고개(구전자:군지 참조)- 반여울에서 지내리 무안으로 넘어가는 고개

반곡동 반여울 참조

반여울(구전자:이성국외 142)- 반곡동(盤谷洞), 반탄(泮灘)

고려때 가정 이곡이 원나라에 처녀 공출을 막은 죄로 이곳에 와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금당 천에 낚시를 드리고 있는데 조정에서 더 멀리 섬으로 귀양 보내라는 전지를 받은 관원이 여주에 와서 한강을 건너려하였으나 홍수 때문에 감히 건너기는커녕 구경하기조차 무서웠으나 이상하게도 가정이 낚시질하는 반쪽은 여울이 되었다. 반쪽은 물이 깊고 반쪽은 물이 얕았다하는 연유로 반여울이란 지명이 붙여지게 되었다.

반여울 숲 (구전자:군지참조)-반여울에 있는 숲

반탄(泮灘) 반여울 참조

방게-가정리에 있는 골짜기

방축골-가정자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

버줄저수지-버줄에 있는 못

서낭고개- 가정리에 있는 고개. 서낭당이 있음.

연당우물(구전자:김호승외470) 가정자에 있는 우물로 약물이라 할만큼 물이 좋음.

채골- 가정자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

채골고개- 채골뒤에 있는 고개

턱골-가정자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집이 있었음. (, ,)+

 

우리산줄기이야기

한강성지지맥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홍천군 남면, 횡성군 서원면의 경계점인 한강정맥(기맥) 금물산(770m)에서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를 따라 남쪽으로 분기하여 성지봉(787.4m, 1.6km)-덕갈고개(470, 1.3/2.9)에서 올라간 530봉에서 남쪽으로 [(686, 단맥), 召君(470)]을 떨구고 서진한다 562.8봉에서 6번국도 도덕고개(370, 3.3/6.2)로 내려서서 576-587.4-612.4(, 5.5/11.7)에서 남쪽으로 [壽來(433, 단맥), 金王(486.8, 여맥), 建指(267.2, 여맥)]을 떨구고 서진하여 319번지방도로(450, 1/12.7) 몰운고개로 내려선다 무명봉들을 넘어 내려선 벗고개(350, 1.6/14.3)에서 양평군 양동면 내로 들어가 올라간 등고선상 430봉에서 북쪽으로 飛龍(515, 여맥)을 떨구고 남진한다 450.3봉에서 서쪽으로 구락산(324.6, 여맥)을 떨구고 328번지방도로 턱걸이고개 (310, 3.2/17.5)로 내려선다 三角山(539.3, 2/19.5)에서 내려간 410m 지점에서 [수리봉(450), 鳳尾(252.2), 고래산(539.8, 단맥), 玉女(419.3, 여맥), 國士嶺(470.3), 牛頭(472.9), 鳳尾(156.2) 싸리산(192, 여맥), 老驥(474.1, 여맥)], [매봉산(296.6), 배미산(396.5), 葛芝(345.4, 여맥),七寶(255.9, 여맥), 원통산(190, 여맥), 婆娑(230.5),趨揖(583, 단맥), 介軍(241.3)]을 서북으로 떨구고 지제면, 양동면 경계를 따라 남진한다 494.2-507.1-439.9-구둔치(330, 3.8/24.4)-404.9-매월터널(250, 1.3/25.7)-399.3-88국지도 서화고개(170, 3.5/29.2)에서 여주 북내, 양평 양동 경계를 따라간다 243.8-350.7-379-341.6(4/33.2)에서 남쪽으로 蘇達(357.7, 여맥)을 떨구고 동북진 한다 등고선상 410(1.2/34.4)에서 동쪽으로 [(545, 단맥), 수리봉(426, 여맥), 冠帽(402.5), 성상봉(370), 구천봉(410.2)]을 떨구고 여주군 북내면과 강천면의 경계를 따라 남진한다 풀목산(394.6)에서 328번지방도로(250, 1.5/35.9)-274.2-269-분지고개(270, 2.2/38.1)-378.3-390.7-371.5-寶金(388.1, 3.4/41.5)-도전리 도로(290)-馬甘(390)-329.6봉에서 동쪽으로 삿갓봉(293, 여맥)을 떨구고 남진한다. 337.1-성주봉(344.2, 3.8/45.3)-327.5-238.3-석량고개(230, 1.2/46.5)-뚜갈봉-행치고개-삿갓봉(239.2)에서 당고개(190, 1.5/48)로 내려선다 253.6봉어깨-228.5-영동고속도로 창남이고개(110, 3.5/51.5)-207-닫둔리고개(90, 1.5/53)-(248.5, 1/54)지나 여주군 강천면 강천리 횡성을 휘돌아 내려온 섬강이 남한강을 만나 남한강물이 되는 곳(50, 1/55)에서 끝이나는 약55km의 산줄기[출처/ 우리산줄기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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