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및 전설

강화 고려궁지, 용흥궁, 강화성당

꼴통 도요새 2023. 2. 26.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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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고려궁지, 용흥궁, 강화성당

1. 어디: 고려궁지, 용흥궁, 강화성당

2. 위치: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3. 일시: 2023년 2월 24일(금)

4. 날씨: 맑고 따스하고 옅은 박무

5. 누구랑: 나 홀로

6. 코스: 고려궁지→용흥궁공원→강화성당→용흥궁

7. 특징:

오늘은 강화군 강화읍에 위치한 견자산, 북산, 남산, 노적산을 탐방하기로 하고 산행을 시작하였는데, 산행 도중 강화읍내에 위치한 고려궁지, 용흥궁, 강화성당을 보면서 산행을 떠나 이곳들만 탐방하여도 멋진 코스가 되리란 생각을 하면서 자료들을 모아보았다.

강화 고려궁지(江華高麗宮址) 사적 제 133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고려의 궁궐터.

고려 고종 19년에 몽골군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왕도가 강화로 옮겨졌다. 이때 옮겨진 도읍터가 고려궁지로 원종 11년 환도할 때까지 39년간 사용되었다. 고려궁지는 규모는 작으나 송도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어졌고, 궁궐 뒷산 이름도 송악이라 하여 왕도의 제도를 잊지 않으려 하였다고 한다.병자호란 당시 강화성이 청군에게 함락된 사실이 있으며, 그 후 고려 궁터에는 조선 궁전건물(장령전, 행궁, 만령전, 봉선전, 외규장각, 척천정, 세심재 등) 및 유수부 건물들이 있었으나 1866년 병인양요 시 프랑스군에 의해 건물 등이 소실되고 지금은 유수부의 동헌과 이방청 건물만이 남아있다. 이 곳은 1977년 보수 정화되어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국난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국민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고려사절요 高麗史節要〉에 의하면 최우가 1232년 6월 이령군을 동원하여 건립했다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1234년 본격적인 궁궐과 백사의 건립이 이루어졌다. 규모는 작았으나 송도의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었고 궁궐의 뒷산도 송악이라 했다. 고려궁의 정문은 승평문으로 양쪽에 3층루의 문이 2개 있었고, 궁내에 많은 관아·전각·창고·문이 있었으나 1270년 송도환도 때 모두 허물어졌다. 1631년 행궁을 고려 옛 궁터에 건립하면서 장녕전을 지어 조선 태조와 세조의 영정을 모셨고, 강화유수부 건물들과 규장외각을 건립해 많은 장서와 문서를 보관했다. 그러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책과 서류를 약탈해갔으며 많은 건물이 불탔다.

지금 고려궁지에는 1638년(인조 16) 건립된 현윤관이 남아 있는데 1769년 중수하면서 '명위헌'이란 현판을 붙였다. 1977년 고려궁지를 보수하면서 담을 설치하고 고려궁지 진입로 옆에 있던 강화동종을 옮기고 경역에 보도를 설치해 경내를 조성했다.

용흥궁(龍興宮)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재위 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으로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유수 정기세가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이름을 붙였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용흥궁은 청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을 따라 지어져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이 든다. 경내에는 철종이 살았던 옛 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강화성당(江華聖堂)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있는 성공회 성당으로, 바로 옆에 위치한 천주교 인천교구 강화성당과 구별하기 위해 강화읍성당이라고도 한다. 1900년에 지어진 독특한 양식의 건축물. 바실리카와 한옥이 결합되었다. 사적 제424호로 지정되었다. 1890년 제물포를 통해 한국에 들어온 찰스 존 코프(C. J. Corfe) 주교를 비롯한 성공회 신부들이 1893년 강화도 갑곶 나루터에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1897년 조선왕실 해군사관학교(통제영학당)의 영국인 교관 Callwell 대위로부터 땅 3천 평가량을 매입하여 선교본부를 강화성내로 이전하였다. 1900년 11월 15일 찰스 존 코프(C. J. Corfe) 주교에 의해 '성 베드로와 바우로 성당'으로 축성되었다. 겉은 한옥처럼 보이나 구조와 내부는 바실리카 양식을 따른다. 바실리카 성당을 한옥 재료로 만들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한국 그리스도교 토착화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 건물의 웅장함과 견고함을 고려하여 목재는 수령 백년 이상의 백두산 정송을 조마가 사제가 직접 신의주에서 구하여 뗏목으로 운반하여 왔고, 석재와 기와는 강화도 내에서 구하였다. 도목수는 경복궁 중수에 참여했던 도편수였고, 중국인 석공과 강화 지역의 교우들이 참여하여 1년여 만에 완공되었다. 그 당시로는 최고의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것. 기와지붕에 십자가를 올린 모양새나, 한자 현판 등이 이국적이면서도 어색하지는 않은 묘한 분위기라 관광지로 많이 찾는 모양. 4칸x10칸 건물로 전통 건물의 개념에서 본다면 상당히 큰 편이다. 반면 면적에 비하면 그리 높지는 않다.[출처/ 다음백과]

고려궁지

용흥궁 공원

강화 성당

용흥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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