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기도

여주 싸리산, 봉미산

꼴통 도요새 2024. 7. 22. 07:25

여주 싸리산, 봉미산

[하림리입구 버스정류장에서 여주역까지]

신륵사

1. 산행지: 싸리산(196.2m), 봉미산(156.5m), 신륵사

2. 위치: 경기도 여주시

3. 일시: 2024년 7월 20일(토)

4. 날씨: 후덥지근하고 흐렸다 비 그리고 흐림

5. 누구랑: 나 홀로

6. 탐방거리및 소요시간: 27.30km/ 8시간 50분[식사및 휴식시간 포함]

7. 들머리/ 날머리: 여주역[출발/ 도착]

8. 탐방코스: 여주역→향교교→향교→도장교차로→하동사거리→여주고려뵹원→하동교→세종대교→싸리산 주차장→정자→흔들바위→싸리산 정상→하림리 입구 버스정류장→오금동고개밑버스정류장→오금동종점버스정류장→신남리버스정류장→신남리주막거리→신남교차로→여주시이정판→통정대부밀양박공묘→봉미산정상→천송1리 소지개→신륵사→조포나루터→여주 신접리고인돌→여주대교→세종대왕상→여주역

9. 특징:싸리산

여주시 현암동에 있는 해발 192m의 산이다. 예부터 자기의 원료가 되는 고령토가 많이 생산되어 인근에서 도자산업이 발달하였다. 산에 고령토를 채취하는 굴이 많았는데 서로 맞뚫릴 정도가 되어 관산(串山)이라고도 칭하였다. 싸리산이라는 이름은 이 산에 있던 바위에서 쌀이 나왔다는 옛이야기로부터 유래되었다. 옛날 싸리산에 암자가 하나 있었는데 고승과 수행자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암자에 있던 마당바위에서는 신기하게도 쌀이 나오는데 하루 먹을 만큼만 나왔다는 것이다. 어느 날 고승이 먼길을 떠나면서 바위를 함부로 다루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그러나 한 처사가 고승의 말을 무시하고 쌀 나오는 곳을 정으로 쪼아 넓히니 그나마 나오던 쌀이 뚝 그치고 말았다고 한다. 먹을 것이 떨어지자 수행자들도 암자를 떠났는데 마당바위 바로 아래서 쌀 대신 백토가 나와 도자기를 구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봉미산

북내면 신남리, 여주시 오학동·천송동에 걸쳐 있는 해발 156m의 산이다. 산의 형태가 봉황의 꼬리와 같아 봉미산이란 이름이 붙었다. 산 남쪽으로 남한강이 있으며 신륵사(神勒寺)가 자리 잡고 있다.

신륵사 전설

육가람(六伽藍) 신륵사(神勒寺)는 한강이 구비치는 봉미산 기슭 아늑한 숲에 감싸인 천년고찰이며 영릉(英陵)의 원찰(願刹)이기도 하였다. 김수온(金守溫)이 기문(記問)에 이르기를 여주는 국도의 상류지역에 있으며 산이 맑고 물이 아름다워 낙토라 칭하여 오는데 신륵사가 바로 이 형승(形勝)의 중앙에 있다. 옛날 현릉(玄陵)의 왕사 나옹(懶翁)과 한산 목은 선생 두 사람이 와서 놀았다. 이로부터 이 절이 기좌(畿左)의 유명한 절이 되었다 한다. 과연 신륵사는 우람한 우두산(牛頭山) 혜목산(彗目山) 낙맥이 줄기차게 뻗어 내리다가 평탄하게 봉이 솟아내린 여강의 동대(東臺)에 이르러 절경을 이룬 봉미산 기슭에 있다. 원래 이 절은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구전되기도 하나 사기(史記)에는 누가 창건하였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이곳에 절터를 잡은 개산조(開山祖)는 아마도 운치 있는 멋을 풍미할 줄 아는 스님이었을 것이다. 꽃봉오리를 에워싸듯 여강이 휘감아도는 동대에 벽돌탑[塼塔]을 쌓고 중생계(衆生界)의 복락(福樂)을 기원하던 그 불심(佛心)은 고고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이처럼 신륵사에는 이 전탑으로 해서 옛부터 벽절 혹은 벽사라 하였다. 이 전탑은 벽돌마다 당초문(唐草紋)이 아로 새겨져 마치 옛 선현들의 지문이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감흥을 일게 한다. 대웅전 앞뜨락에 나서면 다층석탑이 있는데 이 탑에는 정교한 비룡이 용트림 하는 듯한 조형(造形)이 있어 옛 석공의 돌 쪼는 정소리가 은은한 풍경처럼 아직도 귓전을 울리는 듯하다. 봉미산 중턱에 나옹선사의 부도를 모신 석종(石鐘)이 있는데 이 진당(眞當)을 오르자면 대들보가 없는 조사당이 있다. 이 사당에는 고려말에 불교계의 한가닥 빛이 되었던 고승들을 모시고 있다. 이들은 지공, 나옹, 무학으로 소위 3화상(和尙)이라 불린다. 이들 가운데 지공은 인도 스님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계법을 전한 고승이며, 나옹은 고려 공민왕의 왕사로서 영원사(瑩源寺)로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한 고승이다. 그리고 무학은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왕조를 개국케 한 왕사이다. 이들 3화상의 덕을 기리고 그들의 설법을 숭모(崇慕)하기 위해 건립된 조사당(祖師堂) 앞뜰에 용트림하듯 수령 오백 년을 자랑하는 향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이 나무가 바로 무학대사가 스승을 기리기 위해 식수한 것이다. 조사당엔 이들 3화상들의 영정이 있는데 그 중앙에 나옹 그리고 좌우에 지공과 무학대사의 영정을 봉안해두고 있으며, 또 목조의 나옹화상 독존을 안치했다. 경내에서 이 조사당이 건축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 그 외에 신륵사에는 고려말기의 중요한 금석문(金石文)들이 즐비하다. 나옹의 석종비(石鐘碑)를 위시하여 대장각비(大藏閣碑)가 그것이다. 이러한 비문들은 고려 말기에 매우 흥성했던 신륵사의 사격(寺格)을 짐작케 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목은 이색이 선왕 현릉 즉 공민왕의 자복(資福)과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명복을 빌고자 나옹의 문도와 함께 발원하여 장경(藏經)을 인출(印出)하였음을 대장각비를 통해 알 수가 있다. 나옹의 제자들과 더불어 권선(勸善)하는데 자초(自超, 무학대사)가 화부를 총괄하였으니 나옹, 무학, 목은 등은 벽사에서 깊은 인연을 점철하고 오늘날까지 모두 명성을 날리고 있다. 최수(崔脩)의 시에 이르기를 ‘벽절 종소리 한밤에 울리니(甓寺鐘聲 半夜鳴), 광릉에서 돌아오는 손의 꿈이 처음 깨었네(廣陵歸客 夢初驚). 만일 장계로 일찍이 여기를 지나게 하였다면(若敎張繼 會過此), 꼭 한산만이 홀로 이름을 얻지 못했으니(未必寒山 獨檀名)’하였다. 최수의 시구로 볼 때 신륵사의 경승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수 있고, 당대의 문인 목은 선생이 벽사와 깊게 인연된 것으로 명성을 떨쳤다고 한 이 사찰에는 마암대(馬巖臺)와 더불어 용마(龍馬)에 대한 전설이 숱하다. 옛날 도력 높은 고승이 벽사를 창건할 때 여강을 넘나드는 아홉 마리의 여용(驪龍)이 있었는데 이 여용들이 머물렀던 곳에 절터를 잡았다는 전설이 구전되는 이곳엔 구룡루(九龍樓)라는 누각이 있다. 그 누각 안에 신륵사라는 현판이 힘찬 서필(書筆)로 이곳을 찾는 방문 객(客)들의 시선을 끌고 있는데 신륵사라는 이름에는 이런 유래가 있다. 여주는 완만한 구릉지가 많아 수림이 울창하고 토질이 기름져 여강유역 농경은 예로부터 농사가 잘 되는 곳으로 소문이 나 있다. 일설에는 어느 날 포악한 용마가 나타나 농작물을 마루 짓밟고 사람들이 얼씬만 하면 그냥 물어뜯어 사람들은 이를 피해 집안으로 숨기 바빴고 절 근처도 얼씬 못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용마의 피해가 심한 것을 벽사에 와 있던 나옹선사께서 못 들을 리 없다. 선사께서 하루는 포악한 이 용마를 다스리기 위해 이상한 굴레[勒]을 씌워 용마를 다스렸더니 이후부터는 양마(良馬)가 되었다. 그후 신기한 굴레로 말을 다스렸다 하여 이 사찰을 신륵사(神勒寺)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산줄기이야기

한강성지고래단맥

한강정맥 금물산에서 분기한 한강성지지맥이 양평군 양동면 삼각산 지나 등고선 상(410m) 지점서 남쪽으로 한강성지지맥을 흘려 보내고 한줄기를 서북방향으로 분기하여 지제면과 양동면의 경계를 따라 도면상 수리봉(359, 0.5)-실제 수리봉(450, 0.5/1)-401.1-고솔고개(330)-446.7-한치고개임도(350, 1.8/2.8)를 지나 342번지방도로 모라치고개 삼거리(250, 1.8/4.6)로 내려선다. 345번지방도로 전양고개(210, 2.1/6.7)-245.9-망미터널(250)-등고선상450(2.7/9.4)에서 서북방향으로 추읍단맥을 분기시키고 467.5-고래산(539.8, 1.7/11.1)-國士(470.3)-양평군 지제면, 여주군 대신면, 북내면의 경계점인 牛頭(472.9, 2.1/13.2)에서 남쪽으로 대신면 북내면의 경계를 따라 골프장고개인 88국지도(210, 2.3/15.5)로 내려선다. 316.4-207.6-외룡목장 안부(170, 2.8/18.3)-2차선도로 새터고개(150, 1/19.3)-146.6-능원사 능선(150, 2/21.3)-153.2-1차선포장도로 고개(110, 2.6/23.9)-9번군도 버섯고개 도로(110, 1/24.9)-봉미산어깨(130, 0.3/25.2)-鳳尾(156.2, 0.4/25.6)-345번지방도로 소지개도로 사거리(50, 1.4/27)를 지나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한치고개가 발원지인 금당천이 남한강을 만나는 곳(50, 0.5/27.5)에서 끝나는 약27.5km의 산줄기를 말하는 것이 합수점으로 산줄기를 끌고 갔으니 일단은 맞는다. 그러나 그곳은 신라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신륵사와 세종대왕과 얽힌 역사적인 사실 그리고 작금의 신륵사관광지 사업 도예품 판매사업 등 전천후 레저시설들이 들어차 있어 많은 사람들로 사랑을 받고 있는 강가에 있는 특별한 고찰 신륵사를 외면할 수 없으니 봉미산어깨에서 우측 즉 고래꼬리 우측 날개를 타고 나가 제1경로는 남한강변 신륵사 조포나루(50, 2.8/28)에서 끝나는 곳으로 가도 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관광지가 되어있어 제2경로로 신륵사 북측으로 흐르는 산줄기 대신 신륵사관광지를 둘러보고 여주대교(50, 3.3/28.5) 밑 남한강변으로 내려가 조그만 개울물이 남한강으로 스며드는 모래톱(50, 0.5/29)에서 끝나는 29km의 산줄기를 말한다.

나는 이중에서 신륵사를 중히 여기어 마지막 경로를 따라 종주를 하고자 한다.

산행후기

오늘은 여주의 미답지 싸리산과 봉미산 그리고 봉미산 자락에 있는 신륵사를 탐방하기로 한다. 차량 지원이 된다면 싸리산 주차장에 차를 두고 싸리산 원점 신륵사에 차를 두고 신륵사와 봉미산을 탐방하였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필자는 대중교통으로 탐방하여야 하기에 여주역에서 도로를 따라 싸리산봉미산신륵사여주역으로 가는 산행기를 만들었다. 싸리산은 등산로및 등산안내도......등등 모두 잘 정비되어 있었다. 봉미산은 이정목 등산안내도...등등은 없었으나, 능선에만 올라서면 등산로는 선명하였다. 신륵사는 봉미산 끝자락에 위치하여 있었다. 산행 중간에 소나기가 내려 잠시 비를 피해가야만 하는 산행이 되었고, 비만 아니었다면 지도를 다시 그렸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았지만 그런대로 잘 마무리 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