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기도

강화 견자산, 북산, 남산, 노적산

꼴통 도요새 2023. 2. 26.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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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견자산, 북산, 남산, 노적산

1. 산행지: 견자산(60m), 북산(140m), 남산(225m), 노적산(190m),

고려궁지, 용흥궁, 강화성당

2. 위치: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3. 일시: 2023년 2월 24일(금)

4. 날씨: 맑고 따스하고 옅은 박무

5. 누구랑: 나 홀로

6. 이동거리및 소요시간: 13.43km/ 4시간 55분

7. 들머리/ 날머리: 강화버스터미널[출발/ 도착]

8. 산행코스: 강화버스터미널→알미골사거리→원조순대국→강화교회→견자산→강화동문→북장대터/ 북산 갈림길→북산 왕복→북장대터→북문→고려궁지→용흥궁공원→천주성전→용흥군→남산공원→남산(남장대)→국화리공원묘지→노적산→전주이씨묘→양달마을→충렬사→

성산청소년수련원→강화버스터미널

교통편: 9호선 동작→염창역→3,000번 버스 이용

9. 특징:

견자산(見子山)

인천광역시(仁川廣域市) 강화군(江華郡) 강화읍(江華邑)에 왕이 아들을 기다리던 의미의 견자산(見子山)이 있다. 이곳에는 현충탑(顯忠塔)이 있고, 매년 현충일 6월 6일이면 많은 뜻 있는 분들과 학생들이 이곳에 모여 나라를 위해 목숨을 희생한 분들의 고귀한 뜻을 기린다. 현재는 견자산-충혼탑-나라 사랑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지만, 7백여 년 전 이미 이 산은 한 임금이 나라의 힘없음을 뼈저리게 느끼던 산이었다. 13세기 초, 세계 제국을 이루려는 몽골 군대의 침략에 맞서 고려(高麗)의 고종(高宗) 임금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다. 그리고 내성(內城), 중성(中城), 외성(外城) 등 3중의 성곽을 쌓으면서 하루 빨리 몽골 군대를 쳐부수고 다시 개경(開京)으로 돌아갈 날을 기대했다. 그러나 전쟁은 예상 외로 길어졌고 육지에 있는 고려 백성들은 몽골군의 만행으로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더구나 몽골군의 제6차 침입 때(1254)는 고려 백성 26만 명 이상이 몽골 군대에 인질로 끌려가고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강화도의 고종 임금은 더 이상 육지 백성들의 고통을 두고 볼 수 없어 몽골 군대와 회담을 하기로 했다. 어느 날 몽골의 사신과 고려의 사신이 만났다. 몽골 군대가 고려정부에 요구한 것은 첫째, 강화도의 고려 정부는 빨리 개경으로 나올 것. 둘째, 고려의 왕이 원나라에 들어와 원(元)의 황제에게 인사드릴 것이었다. 쉽게 말해 빨리 육지로 나와 항복하라는 것이었다. 고종 임금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지만 고통당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생각해 그들의 조건을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여러 차례의 회담 끝에 우선 고려의 임금 대신 왕자가 원나라 황제에게 인사를 하러 가기로 약속했다. 처음에는 임금의 먼 친척 중에서 사람을 골라 원나라로 보냈으나 나중에는 왕의 친아들 안경공 창(?)을 보내야 했다. 살아온다는 보장도 없이 아들을 머나먼 적국으로 보낸다 생각하니 고종의 마음은 여간 아픈 것이 아니었다. 고종은 밤잠을 설치는 날이 잦아졌다.“아! 가슴이 답답하구나. 여봐라, 인근 정자산(亭子山)으로 바람을 쐬러 갈 터이니 준비를 하거라.”고종은 신하들과 함께 궁궐을 나와 인근의 산으로 올랐다. 이곳은 정자가 있어 정자산(亭子山)으로 불리고 있었다. 임금은 정자에 앉아 북쪽을 바라보며 적국으로 떠난 아들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임금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옆의 신하에게 말을 했다. “참 이상하구나. 궁궐에서는 아무리 왕자를 생각해도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데 이 산에만 오르면 왕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나타나는구나.”그 후부터 임금은 아들이 생각날 때마다 정자산(亭子山)으로 올라 북쪽을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임금의 정자산(亭子山) 행차는 백성들에게는 커다란 구경거리였다. 그럴 때마다 백성들은 먼 발치에 서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구경을 하곤 했다.“오늘도 임금님께서 행차하시나 본데, 정자산(亭子山)으로 가시는 거겠지?”“정자산(亭子山)에 올라 왕자님 생각을 하면, 그의 얼굴이 잘 떠오른다고 해서 산에 오르신대요.”“임금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정자산(亭子山) 주위 동네의 사람들은 임금의 행차만 보면 자연스럽게,“아, 임금님이 또 아드님을 보러 산으로 가시는구나.”하고 말했다. 이리하여 정자가 있어 정자산(亭子山)이라 불리던 이 산의 이름이 아들을 본다는 뜻으로 ‘볼 견(見)’, ‘아들 자(子)’자를 써서 견자산(見子山)이 되었다. (인천광역시 홈)

북산(北山)

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소재하는 강화산성의 내성상의 산이다. 강화산성(江華山城)은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수로들 옮겼을 때 도성으로 쌓은 것으로 내성, 중성, 외성으로 이루어졌으며, 내성은 1259년 몽골에 의해 헐린 후, 조선시대에 돌로 다시 쌓았고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가 다시 파괴하여 조선 숙종 3년(1677)에 크게 넓혀 고쳐 쌓았다고 한다. 강화산성 내성은 동서남북으로 난 대문 4개, 비밀통로인 암문 4개, 물이 흐르는 수문 2개, 관측소이자 지휘소인 남장대와 북장대가 있었으며 지금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강화산성의 내성은 약 1,200m(3,874척)에 걸쳐 토축(土築)됐다.현재의 강화읍을 둘러싸는 형태로, 북쪽으로는 북산(北山, 126m) 남쪽으로는 남산(南山, 222.5m), 동쪽으로는 견자산(見子山, 75m), 서쪽은 북산(北山, 126m)과 고려산(高麗山, 436.3m)의 산줄기가 이어지는 능선을 이용해 축성되었다. 사적 132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남산(南山)

강화산성의 내 성상에 자리 잡고 있는 산이다. 남산은 강화산성의 줄기로 강화 읍내를 보호하기위한 읍성으로 구한말 외세의 침략을 당했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은 강화 초지진으로 침입을 하여 강화읍성내 고려궁지에 있는 외규장각을 불태우고 수많은 고서들을 약탈해 갔다. 얼마 전 프랑스에서 일부를 영구 임대형식으로 반환한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그 당시 프랑스 병사들이 많이 놀랐다는데.. 강화의 아무 초가집에 들어가도 그들의 집엔 각종 서적이 즐비해 문화 충격을 받았단다. 산은 낮지만 상당히 가파르게 올라야 한다. 가파른 길을 20분만 오르면 남산 정상 남장대에 이른다. 북으론 강화산성의 북산이, 동으론 멀리 서울의 북한산, 양천 및 일산이, 서쪽으론 고려산, 혈구산 남쪽으론 진강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개성의 송학산도 한눈에 들어온다.

연미정(燕尾亭)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있는 고려시대의 누정이다. 한강과 임진강의 합해진 물줄기가 하나는 서해로, 또 하나는 강화해협으로 흐르는데, 이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고 해서 정자 이름을 연미정이라 지었다고 한다. 언제 처음 지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나 고려 고종(재위 1213∼1259)이 사립교육기관인 구재(九齋)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공부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조선 중종 5년(1510년) 삼포왜란 때 큰 공을 세운 황형에게 이 정자를 주었다고 한다. 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조약을 체결했던 곳이기도 하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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