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기도

인천 봉재산, 청량산, 노적봉, 연경산, 문학산, 길마산 선유봉

꼴통 도요새 2023. 3. 3.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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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봉재산, 청량산, 노적봉, 연경산, 문학산, 길마산 선유봉

1. 산행지: 봉재산(155m), 청량산(173m), 노적봉(150.3m), 연경산(176.9m), 문학산(217.1m), 길마산 선유봉(185m)

2. 위치: 인천시 연수구 청학동

3. 일시: 2023년 2월 26일(일)

4. 날씨: 맑고 따스하고 옅은 박무

5. 누구랑: 나 홀로

6. 이동거리 및 소요시간: 약 12.4km/ 4시간 15분

7. 들머리/ 날머리: 동막역 3번 출구/ 선학역 3번 출구

8. 산행코스: 동막역 3번 출구→구석말 삼거리(버스종점)→봉재산오리→푸른송도배수지→봉재산(정자 및 공원)→동춘터널 상부(억새밭)→청봉교(고가육교)→뱀사골 약수터 둘레길→청량산(정자, 경인방송 송신탑)→병풍바위 약수터→송도역 삼거리→연수둘레길→노적봉→안부삼거리→연경산(정자,전망대)→사모지고개(삼호현)→문학산(광장, 문학역사관, 문학 산성, 전망대, 옛 군부대)→ 눈썹바위, 마당바위→길마산 선유봉(정자, 전망대)→법주사→선학역 3번 출구

9. 특징:

문학산

조선 전기 관찬 지리지인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문학산이라는 명칭은 보이지 않고, 남산(南山)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어 이 때까지는 앞산이라는 의미에서 남산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또, 민간에서는 정상의 봉수대가 드러누운 사람의 배꼽처럼 보인다고 하여 배꼽산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현재는 남산, 배꼽산 모두 쓰이지 않고 문학산이라고만 불린다.문학산은 원래 '학산(鶴山)'이라고 하던 것을 근처 문묘(文廟)에서 '문(文)'자를 따와 문학산으로 부르게 된 것인데, '학산'이라는 명칭은 이 산에 학이 많이 살았기 때문이라거나 산세가 날개를 펼친 학의 모양을 닮아서라는 설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숙종이 인천서원에 편액을 내리면서 학산서원으로 이름이 바뀐 것이 유래라는 설도 널리 퍼져 있었으나, 학산서원 건립 이전의 한시에서도 학산이라고 칭한 것이 발견되면서 이 설은 현재 폐기되었다.그 외에 '학산'이 언어학적으로 '두룸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두룸은 '두르다'의 옛말인 '두루다'의 명사형이므로 두룸산은 '(마을을) 둘러싼 산'이라는 뜻이며, 이와 비슷한 지명으로 두륜산, 대둔산, 지리산의 이칭인 두류산 등이 있다. 두룸을 한자로 옮기면서 '두루미 학(鶴)' 자를 취하여 훈차하였을 뿐 조류인 두루미와는 관계가 없다는 설명이다. 비교적 덜 알려졌으나 또 다른 언어학적 설명으로 이 부근에서 이뤄졌던 조개잡이와 관련짓는 설이 있다. 19세기 말 이후 간척이 진행되기 전까지 학익동 일대는 바다에서 가까웠고, 조개가 많이 잡혀 합골[蛤谷]이라고 불렸는데 합골이 햇골, 핵굴 등으로 변형되어 학산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옥련동에 지금도 남아있는 조개고개라는 지명을 그 근거로 들기도 한다. 유래가 어찌 되었든 '문학'이라는 이름은 문학동, 학익동, 선학동, 청학동 등 주변 지명에 영향을 미쳤으며, 인천의 시조는(市鳥)는 두루미이고, 2017년까지 시의 마스코트도 두루미 캐릭터였다. 또한, 프로야구단 SSG 랜더스의 홈 구장인 인천문학경기장의 명칭이 여기서 유래한다.[출처/ 나무위키]

문학산성

1986년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213m의 산정부를 테뫼식(산 정상을 둘러 쌓은 성)으로 에워싼 석축산성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남산석성(南山石城)이라 하여 둘레가 160보(步)이고, 성안에 봉수대가 있다고 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남산고성(南山古城)의 둘레가 430척(尺)이라 하였다.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는 이 성을 비류(沸流)의 옛 성이며, 성안에 비류정(沸流井)이란 우물이 있다고 하였다. 『인천읍지』에서는 이 성을 미추홀(彌鄒忽) 고성이라 하고, 임진왜란 때 인천부사 김민선(金敏善)이 옛 성을 수축하여 지키면서 여러 차례 왜적을 무찌르다가 병으로 죽자, 김찬선(金纘善)이 이어받아 끝까지 성을 지켰으며, 동문 밖 100여 보 되는 곳에 왜군이 쌓은 성터가 있다고 하였다. 성벽의 길이는 577m이고, 이 가운데 현존하는 부분은 339m나 된다. 이 중 육안으로 성벽을 알 수 있는 부분은 220m인데, 성벽의 높이는 약 1.5m∼4m로 남았다. 성벽은 장방형의 면을 가지도록 수평고임쌓기로 정연하게 축조하였다. 성벽의 외측 기단 아래에서는 2∼3단을 안쪽 방향으로 10∼15㎝씩 들여쌓거나, 경사가 완만한 기초부의 보강축조가 있어 견고하다. 성에는 동문과 서문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졌으며, 동쪽에 작은 수구(水口)가 남아 있다. 성안에는 동문에서 서북쪽 150m 지점에 우물이 있었으나 매몰되었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으나 없어졌다. 정상의 동측 아래로 김민선을 모신 사당인 안관당(安官堂)이 있었으나 없어지고, 성안에서는 삼국시대 이래의 토기편과 기와 조각이 발견되고 있다. 작은 문학산성에서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친 것은 역사상 특이한 예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출처: 민족문화대백과]

우리산줄기이야기

한남문학단맥

한남정맥이 안성 칠장산에서 분기하여 흐르다가 인천시내로 접어들어 만월산(△187.1) 어깨로 오르자마자 남쪽으로 한남오봉단맥을 떨구고 약0.3k 정도 더 가다 정상전0.5km 지점인 등고선상150m 어름에서 남서쪽으로 분기하여 신한아파트(90, 0.3)에서 부터 도심지 도로를 따라간다 인제고교(30, 0.9/1.2)-상인천초교-주원고개-희망의공원-주원초교-간석역입구-석암사거리(30, 2.5/3.7)-경인고속도로(30, 2.3/5)-壽峰산(△104.4, 0.5/5.5)-경인고속도로(30, 1/6.5)-인천기계공고-남부초교-관교동 진흥아파트(50, 2.3/8.8)-북망산(승학산, 110)어깨(110, 0.5/9.3)까지가 새로 답사한 구간이다

그 다음 구간은 동일하니 그때의 기록을 그대로 옮긴다

승학체육공원 지나 신동아아파트 사거리(50, 1.1/10.4)-제2경인고속도로 문학IC(50, 0.4/10.7)-文鶴산(△213, 0.5/11.2)-문학터널위 삼호현(110, 0.8/12)-연경산(176)-117봉-노적산(151)어깨(110, 1.5/13.5)-88봉-송도역인근도로(30, 1/14.5)-淸凉산(170, 1/15.5)-134봉-연수구청소년수련관 앞 도로(50, 0.7/16.2)-봉래산(103, 0.8/17)-△61.8봉을 지나 인천시하수종말처리장이 있는 77번국도 사거리(10, 1.6/18.6)를 지나 승기천이 송도국제신도시를 넘어가는 다리 앞 강 같은 바다를 만나는 곳(0, 0.1/18.7)에서 끝나는 약18.7km의 산줄기를 말한다.[출처/ 우리산줄기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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